[로마서 성경주석] 1장17절'믿음에서 믿음으로'에 대한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국제비평주석,로마서1(로고스 1994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은 많은 다른 방식들로 이해되어 왔다.
예컨데 다음과 같은 의미들로 이해된 것이다.
즉'구약성서의 믿음에까지'(테르툴리아누스,오리게네스)
'설교자들의 믿음으로 부터 청중의 믿음에까지'또는
'율법의 믿음으로부터 청중의 믿음에까지'(아우구스티누스),
'한 신조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다른 신조에 대한 믿음에까지'(아퀴나스),
'현재의 믿음으로부터 미래의 믿음에까지'(아퀴나스가 언급한 또다른 해석),
'말들의 믿음으로부터(우리가 지금 보고 있지 않은 것을 지금 믿는 경우,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의 신실성으로부터 인간의 믿음에까지'(암브로시아스터,바르트,맨슨),또는
믿음의 성장을 가리키는 말씀으로서(바르바로,칼빈,카톨릭의 일반적인 견해)...이해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1장18절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뉴 인터내셔널 성서주석,로마서(생명의 말씀사,1979년)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형벌적 정의(定義)이다.
그것은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결의이다.
사람 속의 분노는 상대방의 악에게 고통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은 성경에 편만되어 있는 진리와 일치하게
하나님의 심정의 침착하고도 정확한 목적에 적용된다.
하나님의 심정에 품고 있는 목적은
하나님의 물리적 또는 도덕적 통치상의 어떤 다른 법칙이 작용하는
동일한 일반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죄와 비극간의 관계를 확보하자는 것이다.(찰스핫지)
칼빈의 논평에서도 이것이 인정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견해도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2장8절,'당을 짓는 사람들'에 관한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국제비평주석,로마서(로고스 1994년)
RV에서 그것은'faction'(당파)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당파를 짓는 사람들에게'
(unto them that are factious)로 번역되어 있다.
바레트는 이 번역어가 '싸움'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정하기'때문에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AV의역'unto them that are contentious'(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로 번역]...
RV의 번역자들은 이 단어가 아리스토텔레스,pol 1302b4와1303d14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단어는 거기서 정치운동을 하러 돌아다니는 것,
즉 음모를 꾸미는 일을 가리켜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음모를 꾸미는 일은 당파를 만드는 일을 의미했다.
따라서 RV의 번역문은 이 단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법에 기초해서 작성될수 있는 것이다.만약 이것이 옳다면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진리에 불순종하고 자신을 불의에 내어주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반대하는 당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아리스텔레스에서 사용된 의미의
연장일 수도 있는 더욱 일반적인 의미,즉'자기추구의'또는
'이기심이 많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RV의 번역을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3장3-8절,21절의 표준적 성경번역 選 성경주해
3 그런데 어떤 유다인들이 신의를 저버렸다고 합시다.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신의를 저버리시겠습니까?
4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세상 모든 사람이 거짓말장이라 하더라도
하느님만은 언제나 진실하십니다.
성서에서도,"당신의 말씀에는 언제나 정의가 드러나고
재판을 받으시면 반드시 이기십니다."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5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느님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는 말이지
6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겠습니까?
7 또"나의 영광에 오히려 하나님의 진실을 더욱 드러내고
하느님의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죄인으로 단정함을 받아야 하느냐?"하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8 그뿐아니라"아예 선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하는 말이
나옴직도 합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인간을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공동번역개정판]
한글개역개정판은 5,7절의 '그러나'와 8절의 '또는 그러면'을 생략하고
21절에서'그러나'를 첨가한다면 문장이해가 쉽게될 것 같다.
[로마서 성경주석] 3장19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국제비평주석,로마서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하려 함이니라"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결과를 나타내는 부사절로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목적절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즉,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하나의 목적은 모두 사람의 입을...)....바울이 율법아래 있는 자들란 말로써 유대인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못된다.바울의 생각은 유대인들(자기 자신을 예외적인 인물들로서 간주할 이유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사람들)도 사실상 전혀 예외는 아니라는 증거와 더불어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아래에 놓여 있다는 증거가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만일 유대인들이 성서에 의해 죄아래 있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면(죄아래)있지 않은 이방인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로마서 성경주석] 4장13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아브라함이 세상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그나 그의 후손에게 주어진 것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의로움을 통해서였습니다".
[200주년신약성서주해의 본문,NAV]
"It was not through law that Abraham and his offspring recieved the promise that he wouid be heir of the world,
but the rightousness that comes by faith".[NIV]
[로마서 성경주석] 4장17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국제비평주석 로마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바울은 아브라함의 육신과 사라의 자궁을 되살려서 잉태케 해주신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문의 대를 잇는다는 견지에서 볼때 그들은 죽은 자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또 그는 창세기22장에 진술된 이삭의 생명을 살린 이야기를 생각했을 수도 있으며(참조 히11:19)예수의 부활사건을 배경에 깔고 있음은 매우 확실하다.
(참조.24절과25절)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라(새번역-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하나님>; 공동번역-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하느님>).이것은 하나님의무로부터의 창조를 가리키고 있음은 거의 확실하다.샌디와 헤들람은 네가지 제시된 해석들을 열거해 주고 있다.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1)'존재없는 것들을 마치 존재했던 것인양 명명하시는<하나님>;(2)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도록 부르시는<하나님>;(3)'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들에게 마치 그것들이 존재했던 것인양 직접 소환장을 바랭하시는<하나님>;(4)'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마치 존재했던 것인양(생명과 구원에로)부르시는<하나님>.샌디와 헤들람이 마지막(4)를 문맥과 상관없는 것으로서 기각시킨 것은 옳은 일이다.그러나 (1)이나(3)은 전혀 확실치 않다.샌디와 헤들람은 그 둘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들은(3)을 더선호하며'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에게<그당시 그가 소환장을 발행했던 것처럼>소환장을 발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이 단어들을 표현하고 있다].
페테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나이였는데,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와 같았던 두 사람에게 아들을 얻게 하셨다."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하느님께서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나라 사람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부르실 것을 암시하셨던 것이다.
200주년신약성서주해의 본문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존재하지 않은 것들을 존재로 부르시는 하느님"이라고 번역하고난외주로 마카베오후서 7:23,28-29;고린도전서1:28을 참조하라고 되어 있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0절의 표준적번역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의 본문
'우리가(하느님의)원수였을 때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화해를 얻었다면,
하물며 우리가 화해한 지금 그분의 생명에 의해 더욱더 확실히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성구에서 '당신'의 문자적의미는 물론'그분의'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여기서 '그' '그의'라는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예수님,예수께서,예수그리스도께서,예수님을 믿읍시다와
예수가,예수그리스도가,예수믿읍시다,예수를 믿읍시다라는 표현은
너무나 느낌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2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그러므로' 또는 '이러므로'의 표현은 공동번역개정판이나
카톨릭새번역같이 생략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러운 것 같다.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카톨릭 새번역의 주석]
가. 라틴계 교부들,그리고 루터도 아담이 죄를 지은 그 행의 안에 모든 인간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포함되었다고 본다.(그래서 대중라틴말성서는'아담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다.'라는 식으로까지 번역한다).
이러한 해석의 방향에서는,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죽음이라는 유산을
자기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고,또는 인류의 모든 죄가 이미 아담의
불순종안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이해하게 된다.
나. 일부 그리스계 교부,많은 카톨릭주석가,그리고 칼뱅을 비롯한
많은 프로스탄트 주석가들은,바오로가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지은 죄를 가리키고 있다고 판단한다.바로 이러한 죄를
통하여,아담이 이 세상에 끌어들인 죄의 위력이 죽음이라는 그 열매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아무튼 이 말마디는 12-18절의 문맥과 마찬가지로,아담의범죄와
각 사람의 개인적인 죄사이의 연대성을 전제로 한다.
(카톨릭 새번역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의 견해는 하나의 범주안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굳이 우선 순위를 택한다면,
개인적으로 라틴계 교부들과 루터의 견해를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3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페떼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
유다인의 입장에서 인류의 역사를 본 바울로는"율법을 주시기 전에도"곧 모세의 율법이 제정되기 전에도"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하고
말하지만,"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죄가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뿐"이다.곧 율법이 없어서 죄를 지우지 않은 것이라면, 어떠한 율법을 근거로 하여 죄가 인간에게 돌아 갔는지 마땅히 의문으로 생각될 것이다.주목해야 할 것은 죽음의 원인이 되는 "죄"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12절에서"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한 그 죄이다.그렇다면 아직,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율법을 근거로 하여
죄를 인간에게 돌렸던 것은 아니지만,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자연법(2:12)에 근거를 둔 것도 아니다.왜냐하면 자연법은 여러 가지
죄를 금하고 있다고 하지만-이것은 중요한 곳인데-위반하는 자를
죽음으로써 벌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새번역의 주석
일부학자들은 13-14절이 12절의"모두 죄를 지었으므로"라는 말을
설명한다고 여긴다.바오로는 법적 관점에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아담에서 모세까지 이르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죄인이기는
하였지만,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 각자에게 적용되는 무슨 법에
따라 죽음의 벌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때문이 아니라 아담의 죄때문에
죽음의 운명을 겪었다는 것이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5,16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카톨릭 새번역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다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6 그리고 이 선물의 경우도 그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경우와
다릅니다.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왔지만,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도 좋지만 문맥상'그렇지만'으로 번역하는 것이
좀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렇지만'은 '또(다른) 한편으로', '또한'으로
번역할수 있다고 본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9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9절은 18절을 확증하고 설명하는 귀절이다.이 사실은 19절의
문장 구문 및 내용으로 보아서도 분명하거니와 그것들이 관계하고 있는
방식으로 보아서도 분명하다.19절은 "왜냐하면"(for)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NASV: 19. For as through the man's disobedience the many were made sinners,even so through the obedience of the One man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NIV: 19.For just as through the disobedience of the the one man the many were made sinners,so also through the obedience of one man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NAV:19. For just as through the disobedience of one person the many were made sinners,so through the obedience of one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로마서 성경주석] 6장2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신자는 죄에 대해서는 죽었다."죄에 대하여 현재 죽은 상태에 있는 우리"(we that are dead to sin)라는 번역은 엄격히 말해서 적절한 번역이 아니다.(A.V).이미 죽어버린 사람이 현재 죽은 상태로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그러나 이 경우에 사용되진 시제는 과거에 있어서 되어진 하나의 결정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시제인 만큼, 다니 존재의 상태를 암시하는 번역은 본문의 사상에 온당치 못하다.사도가 지닌 사상은 신자의 신분을 구성해 주는 영단번(永單番)의 결정적인 죄와의 결별인 것이다. 그러기에 신자는 죄 안에서 살수가 없다.
NASV
2 May it never be!How shall we who died to sin still live in it?
NIV
2 By no means!We died to sin;how can we live in it any longer?
공동번역개정판
2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우리가 이미 죽어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카톨릭 새번역
2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죄와 관련해서는 이미 죽은 우리가 어떻게 여전히 죄 안에 살 수 있겠습니까?
AV에서 개정된 NAV
2 How can we who died to sin yet live in it?
[로마서 성경주석] 6장4절 번역문과 성서주해비교 選 성경주해
한글개역개정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새 생명"(Newness of life)은 생명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새로움을 말한다.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화고해진"아버지의 영광"이 새 생명에게 내려진 것이다.새 생명은 생명이 실재함과 또 생명이 폭발적인 힘으로 실현된다는 보증이 된다.우리는 이런 사상을 금(禁)할 수가 없다.신자가 새 생명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생명을 단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신자의 활동을 영위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함을 가리키고 있다.
200주년신약성서주해
"그러므로 우리는 그 죽음에 참여하는 세례를 통해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해 죽은자들 가운데서 알으켜지셨음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활양식(7)으로 처신하기(8) 위함입니다.
(7) 직역하면"생명의 새로움안에서".그리스도의부활로 성취된(6:5-6)"새로운 창조"(2고린5:17;갈라6:15)와 통한다. (8) "처신하다를 직역하면"걷다".이 말은 히브리인들이 율법에 따르는 윤리적 처신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다.바울로는 인생을 하나의 길고 보고서 항상 상징적인 뜻으로 그리스도인의 종교적이고 유리적인 행위나 생활양식을 서술하기 위해 그 말을 사용했다.(8:4;13:13;14:15)
카톨릭 새번역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성경주석] 6장5절 성서주해와 잊혀져서는 안 될 번역 選 성경주해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한글개역판],
'본받아' 의 문자적 표현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한글개역개정판)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상에'(200주년신약성서난외주)이다.
뉴인터내셔널성경주석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그와 더불어 연합되었음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어진 말은 엄격한 의미로"함께 자란다"는 뜻이다."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함께 자란다고 하면"이란 말보다 더 적절하게 여기 의미된 연합의 친밀성을 전해 주는 말은 없다.이 관계는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성장의 과정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지금 문제되는 문장의 용어들과 문맥상으로 보아 그와 같은 사상은 용납되지 않는다.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의 진행 과정이 아니며,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일치도 역시 하나의 진행 과정은 아니다.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되어진 상태에 놓여 있다.그러나 "함께 자란다"는 의미는,그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가 그에게 대한 관계의 친근성을 지적하는 것이다....그리스도를 "본받아"가지는 것 속에서 우리가"함께 자란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관계의 친근성을 지적하는 것이라면,"본받는다"는 것은 중요한 구별을 선언하는 것이다.유사성이 동일성은 아니다.... "...자가 되리라"(we shall be)는 미래시제로서 확실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로마서 성경주석] 6장17절,19절 성서주해비교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7절 교훈의 본이 무엇이냐?그것은 교훈의 양태 또는 표준을 의미하는 질문임이 분명하다.그것은 굳이 사도 바울의 특수한 질문 형태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그것은 "바른 말의 본이다"이다(딤후1:13참고.딤전1:10;딤후4:3;딛1:9;2:1).이 경우 복음 교훈의 윤리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이 복음 교훈의 양태에 우리는 마땅히 순종해야하는 것이다.죄를 섬기는 것에서 돌아서서 변화를 받았다는 사실이 확고히 드러나는 것은,우리가 잘 조직된 교리적 양태에 순종하는 행동을 통해서다.사람들은 기독교가 사상및 실천의 확고한 규칙 양태를 지니지 않은 것으로 상상하는 모양인데,이것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교 윤리에 대해 품고 있는 사상과는 맞지 않는다.복음 안에 명시된 양태가 신자의 참된 자유성과 자발성을 조금도 해치지 않는다.신자는 "마음 속으로부터"순종한다.순종 속에 전제되고 있는 객관적 규정이 순종에 필요불가결한 자원성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우리는 이런 교훈의 양태가 신자들에게 전달되어진 것이었다고 사도가 말한 것으로 기피했었는지 모르나,실제로 사도가 말하기를 신자들이 그런 교훈의 양태에 이끌림을 받아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이것은 복음에 대한 신자들의 헌신은 전적인 헌신이었음과 또 이 헌신은 그들이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예속당하게 된 헌신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또 이런 사실은 우리가 복음에 헌신할 때의 우리의 수동성은 물론이거니와 그 복음 양태의 객관성도 강조하고 있다.마음에서부터 전적으로 자원해서 순종하는 사람에게서 객관성과 수동성이 조금도 마찰되지 않는다.
19절난외주 육신의 연약이 우리의 도덕적 약함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의심할 것도 없이 이해의 약점은 우리의 도덕적 약함과 관계되어 있다.유일한 핵심은 이것이니 곧"사람의 예 대로 말한다"는 것은 우리의 약점에 대해 제정된 요구사항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우리의 이해의 약점에 대해 말의 형태로 조절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카톨릭 새번역의 주석
17절 (공통 가르침에서)"공통"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여러 가지 뜻을 지니기 때문에,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그래서 매우 다양하게 번역된다.아무튼 이 "공통 가르침"은,누가 선포하였든 근본 내용은 항상 똑같은(1고린15,11)그리스도교의 첫 설교를 가리키는 것 같다.이로써 바오로는 자기가 로마의 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받은 가르침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이다.(15,15;16,17).그리고 바오로는 자기가 다른 복음 선포자들과 다름이 없음을 강조하기도 한다(갈라2,2) "마음으로부터"라는 말은 여기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어쩔 수 없이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는 "종"이라는 개념을 의로움이라든가(16,18,19절)하느님께 적용하는 것은(22절)본디 적절하지 않다.이러한 점을"마음으로부터"라는 말마디가 보완한다.곧 의로움이나 하느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죄의 종이 되는 것과는 달리,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유롭게 봉사함을 뜻한다.
19절 바오로는 부적절한 언어를 사숑하는 것에 대해서(17절 각주 참조)양해를 구하는 것이다.이러한 언어의 모자란 점은 서간 수신인들의 나약성에서,또는 어떠한 인간의 만족스럽게 표현해 낼 수 없는 신비 그 자체에서,또는(가능성이 더 크기로는)둘다에서 유래할 수 있다.
[로마서 성서주해] 7장1절,4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페떼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
1절"형제여러분,여러분이 법률에 정통한 사람들이니 말씀드리는데,법률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구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모르십니까?(공동번역,한글개역개정판은'법'이라고 번역했다)
당시 로마인들을 법률의 스승으로 보았고,온 세계는 로마법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이 경우 여기서 법률이라고 한 말은 <율법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일반적인 법률을 말하는 것 같다.그런 뜻에서 율법도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여기서 바울로는 일반인 특히 로마인이 인정하고 있는 법률관을 말하고 있다."법률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구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그런데 어떤 해석학자는 "법률이란 것"이라고 한 말은 일반 법률이 아니라 <율법>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여러분도 이와같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죽음으로써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났다"고 4절에서 말하고 있다.그런데 여기서 의문으로 떠오르는 것은 바울로가 모세의 율법 전체가 폐지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아니면 윤리에 관한 율법을 남기고, 의식과 유다 민법이 폐지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토마스 아퀴나스는 구 율법에 있는 자연법과 관계있는 부분이 남아있다고 하였다.그 부분이 남은 것은 율법에 부속되어있었기 때문이 아니라,자연법으로서 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바울로의 기술에 대하여 라그랑즈는 다음과 같이 간추렸다.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구원이 율법에 있다고 하였으나,그것에 대하여 바울로는,그리스도께만 구원이 있다고 대답한다.그것은 몬든 신뢰를 그리스도께 걸고 율법을 보존하자고는 할 수없기 때문이다.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율법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특징을 부정하는 것이다.실로 율법은 구원의 제2의적(第二義的)인 수단이었고,또 일시적인 것이어서,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구원 그 자체는 아니었다(Aux Romains.p.186).기초가 되는 원리는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을 가지셨다는 것이고,이것이 또한 바울로의 적들이 부정하는 것이었다.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였으나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모세의 율법도 계속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곧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니즘은,하느님의 계획에 있어서,영원한 율법을 가치있게 하는 하나의 삽화에 지나지 않았다.그것에 대해서 바울로는 일시적인 구율법(舊律法)에 의해서 계획된 새로운 계획,새로운 질서가 있다고 대답하고,율법의 제도와 새로운 은총의 제도를 비교하는 것이다.율법의 제도는 죄에 대해 무능할 뿐 아니라 죄를 늘게 하지만,은총의 제도는 죄를 없애고 죄를 극복할 힘을 준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현대에도 비슷한 성향을 지니고 있는 교파들이 있는데 기독교와 적대시 하지 않는 한 존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적대시하더라도 어느정도 믿음의 범주안에 있어 열매를 맺고 있다면 일종의 포트폴리오 모델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로마서 성서주해] 7장6절 성경주석, 17,21-23절 번역비교 選 성경주해
한글개역개정판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페떼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
"낡은 법조문을 따라서 섬기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가지고 섬기게 되었습니다"하고 바울로는 말하였는데,율법에 죽었다고해서 사람이 모두 의무에서 풀려난 것이 아니다.하느님을 따라야 할 의무는 여전히 남아 있다.그러나 새로운 생활의 기준은 법조문 곧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데 별 쓰잘데 없는 율법의 규정에 있는 것이 아니고,세례를 받음으로써 새로 태어난<정신화된>인간의 새로운 상태에 근거를 둔다.
한글개역개정판
16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카톨릭새번역
16 ... 율법이 좋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것입니다.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원칙'200주년신약성서)을 발견합니다.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22 나의 내적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의 포로로 만들어 버립니다.
"내적 인간"에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그리스 대중철학에서 유래하는 표현으로 인간의 이성적인 부분을 가리킨다.이 개념에는 성렬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갱신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곧"내적 인간"은 여기에서 옛 인간 곧 죄많은 인간의 한 면을 일컫는다."지체"는 죄의 포로로 간주되는 인간 전체를 가리킨다.그래서 여기 본문에서는 5절과 18절에 나오는 "육"과 같은 뜻을 지닌다.
[로마서 성경주석] 8장2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생명의 성령의 법"(한글개역)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법"(카톨릭 새번역)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할 때의 "그 법"이 무엇인지 결정하기만 하면 바로 해답에 이를 수 있다..."법"이란 말은 여기서는 합법적인 권위는 물론,통제하고 활동하는 세력으로 사용되어진 것이다.그러므로 이런 대조의 관점에서 볼때에,"생명의 성령의 법"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통제하시고 활동하시는 세력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성령이 역사하시는 세력은 사망으로 나아가게 하는 죄의 세력과도 구별된다.그것은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이 생명의 영으로 정의됨은 너무도 타당하다 할 것이다.그러므로"생명의 성령의 법"은 사망으로 나아가게 하는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하기 위하여 우리안에 작용하시는 성령의 권세인 것이다.
카톨릭 새번역의 주석
예수님안에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새로워지고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된다.이 하느님의 뜻은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밖에서부터 강요된 것이 아니라,그의 새로운 삶 자체에 들어 있는 내적"법"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성경주석] 8장3-4절 표준적번역과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카톨릭 새번역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곧 당신의(그분의) 친 아드님을 죄스러운 육의 모습을 지닌 속제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200주년신약성서,단죄하셨습니다).(2) 4 이는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채워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3)
(2)그리스도께서 "죄스러운 육의 모습"을 취하셨다는 것은,죄인이 아니신데도 죄 많은 인간 조건의 운명을 온전히 짊어지셨음을 뜻한다.(2고린5,21)"속죄제물로"대신에"죄 때문에","죄를 다루기 위하여"등으로 옮기기도 한다.그리스도의 "육"안에서 실현된 죄의 "처단"은 단 한번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이로써 믿는 이들의 육에 대한 죄의 지배가 종식되고,이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순종과 사랑에 동참하게 된다.(3)"성령"에서"성"은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가리킬 수 있다(5,18 참조).그러나 다른 학자들은,율법이 죄인에게 내리는 것으로서(1,32 참조)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름으로 짊어지신 유죄 판결로 이해한다.
200주년신약성서주해
"죄스러운 육과 같은 모습으로"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죄를 짓지는 않고 죄를 지향하는 인간조건을 취해 사람이 되시어 죄의 결과와 죽음을 당하신다는 것을 뜻한다(필립2,6-7;갈라3,13 참조).율법의 의당한 요구는 하느님의 법정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으로 실현되었으며 그리스도인이 성령에 따라 사는 생활 안에서 구현된다(8,2.11 참조)
[로마서 성서주해] 8장5-8절 표준적 번역과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한글개역개정판
5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육신의 일을,영(카톨릭 새번역,성령)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뉴인터내셔널성경주석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 (5절)는 것은 육신의 일을 사상과 관심과 애정과 목적의 흥미진진한 대상으로 취한다는 것이다."육신의 생각"은(6절)은 복합적 기질이다.그것은 단순히 이성의 활동을 포함되는 것만이 아니라,육신에 의해 형성되고 통제를 받는 감정과 의지의 활동까지 포함되는 것이다....이 육신의 생각은 "육신을 쫓으며" "육신 안에 있는"사람들을 특징짓는 생각이다.이 생각은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는 사상의 지배와 통제를 받고 있다.하나님을 향해 원수가 되는 것은 육신의 생각의 실제적인 원리이며 지배적인 경향이다.이와 관련해서"생각"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유의해 볼때에,그것은 모든 행동 저변에 흐르고 있는 기질은 하나님을 대항하고 증오하는 기질임을 말해 준다는 것이다.
"영의 일" (5절)은 성령의 일들을 사상과 관심과 애정과 목적의 흥미진진한 대상으로 취하는 것이다. "영의 생각"도 역시 복합적인 기질이다.여기에는 성령에 의해 형성되고 통제를 받는 이성과 감정과 의지의 활동이 포함된다.
[로마서 성경주석] 8장10-11,13절 표준적 번역과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200주년신약성서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비록 몸은 죄 때문에 죽어 있지만 영(한글개역개정판도 동일)은 의로움 때문에 생명을 가집니다. 11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처하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은 여러분안에 살고 계신 당신(문자적으로는 그분)의 영을 통해 여러분의 죽은(죽을,한글개역개정판)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13 실상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고 말 것입니다.그러나 여러분이 영(한글개역개정판도 동일)으로 몸의 행실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우리로서는 사도가"mortal bodies"(죽을 몸)보다는"dead bodies"(죽은 몸)라고 말한 것으로 기대했을지도 모른다(10절).그러나 표현된 언어는 의미가 있다.여기 "죽을"이라는 말은 비록 현재 살고 있으나 앞으로 있을 죽음의 사건을 대면하고 있는 신자들의 몸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신자들이 부활시에 살게 될 것은 이미 죽은 몸임은 사실이지만,그러나 그것들을 여기서"죽을 몸"(mortal bodies)과 동일시한데는 이유가 있다.부활시에 살게 될 몸이란 지금 신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몸과 동일한 몸이기 때문이다.사도가 여기서 들어 쓰고 있는 묘사 가운데는 죽을 몸과 죽을 몸 사이의 동일성과 계속성이 들어 있다.이 동일성과 계속성은 이들 동일한 몸들이 부활 상태에 어울리는 새로운 質的인 요소로 인해서도 결코 침해받지 않는다.(참고,고전15:35-54)...."너희가 성령대로 살면"(if you live after the Spirit)이라는 식의 표현을 아니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사도는 보다 구체적으로 부정적인 공식을 쓰고 있다.즉"만일 너희가 영으로써(by the spirit)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했다.이것은 사도의 사상의 실제적인 내용을 말해주며,또 성결은 적극적이면서 동시에 소극적으로 무엇을 부정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로마서 성서주해] 8장15,17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한글개역개정판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7 잔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카톨릭 새번역은'누리려면')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 이니라.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양자의 영"이 성령이라면"종의 영"은 무엇인가?어떤 경우에는 영에게 고유명사를 붙이고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멋대로 행동하는 독단처럼 보일 것이다.그렇지만,성령은 "종의 성령"이라고 불리울 수는 없다.왜냐하면 이미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가 계시는 곳에는 반드시 거기에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했다고 했다.또 우리는 종의 영으로서의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으로서의 성령을 받은 것이다...하나님의 자녀들의 고난이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으로 분류되어져야만 하는 다른 측면도 있다는 점이다.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에 참여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전체적인 몸의 구속과 영광의 완성에 필요한 고난의 전 분량을 채우는 자로 여김을 받는다.(참고,골1:24).그런즉 그리스도와의 연합 및 친교는 이런 참여의 설명이며 확인이다.
카톨릭 새번역의 주석
"누리려면"이라는 말은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이 의도하는 바를 가리키지 않는다.곧 영광을 획득할 목적으로 고난을 추구한다는 말이 아니다.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든 그리스도께든, 죽음과 부활이라는 한 신비가 지니는 두 가지 면의 필연적인 연관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다(필립3,10-11참조)
[로마서 성서주해] 8장18-23절 표준적인 번역과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한글개역개정판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국제비평주석
피조물은 수세기가 지나는 동안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믿는 자이든 믿지 않는 자이든 모든 인류와 천사들까지도 포함한 전 피조물(오리겐);모든 인류(아우구스티누스);믿지 않는 사람들만(슐라터);믿는 사람들만(18세기와 19세기의 몇몇 해석가);...인간 전체를 포함한 인간아래의 자연계(푀르스터,바르트);인간 아래의 자연계만(신구교의 다수설)....인간 아래의 피조물을 의미한다고 가정할 때 '자기 뜻이 아니요'는 자연히'그 자체의 결함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란 의미로 이해된다(만약 '피조물'이 인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면...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을 따라 피조물이 자신에게 부여된 형벌에 어쩔 수 없이 종속되어진 상황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로마서 성경주석] 8장 28-30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한글개역개정판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느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페데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불가따에는 "모든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에 협력한다"고 번역되어 있다.우리가 취한 해석은 거의 모든 성서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뜻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에 모든 것이 서로 작용하여 협력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에서 오는 것이다....하느님의 부르심보다 "예지"와"예정"이 앞서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豫知란 하느님께서 영광에 이르게 할 사람을 영원으로부터 아셨다는 뜻인데,하느님께서 어떻게 예지하시는지는 말하지 않는다.그러나 이 예지의 대상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태도는 나타나 있다.구약 성서(아모스3,2)에도 있는 것같이,하느님의 경우"태간다"는 것은 정신의 눈으로 본다고 하는 것만이 아니고,사랑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1고린토8,3,13,12;갈라디아4,9;2디모테오2,19).하느님께서 특별한 사랑의 눈길을 쏟아 주시는 이러한 사람들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이 경우 하느님께서는 미리 보신 이 사람들을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결정하시고,아들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에 대해 아들에 대한 것과 같은 감정을 품으신다.
200주년 신약성서의주해
바울로는 하느님이 개개인을 구원이나 단죄로 예정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하느님의 예정은 집단적 선택을 뜻한다.하느님이 예정하신 이들은 복수로 서술되어 있다:"미리 알아두신 이들"(29절)과"예정하신 이들"(30절).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미리 아신다"라는 말이 先見의 의미라고 인정해 준다하더라도,그렇다고해서 절대주권적인 選擇의 성서적인 교리가 제지되거나 논박되어지는 것은 아니다.왜냐하면 하나님은 믿음을 예견하시며,또 앞으로 생길 萬事를 예견하시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그런즉 문제는 이것이다.그럼 하나님이 예견하시는 이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까? 이에 대한 유일한 성서적인 해답은 하나님이 예견하시는 믿음은 하나님이 친히 창조하신 믿음이라는 것이다.(참고,요3:3-8;6:44,45,65;엡2:8;빌1:29;벧후1:2).그런즉 하나님께서 믿음을 영원 전에 예견하신 것은,믿은 것으로 그가 예견하신 사람들 속에 이런 믿음을 생기게 하신 그의 作定(decree)에 의한 것이다.그러기 때문에 이런 구별은 하나님께서 믿음과 믿음의 결과를 취하도록 영원 절대적인 스스로의 영원 절대적인 스스로의 선택에서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정과 작정은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라고 생각한다.예정은 보수적인 교리이고 작정은 예언적인 집단을 형성하기 위한 교리이기 때문이다.'작정'교리는 종교개혁때에는 성도가 분리됨으로 개혁을 이루고 천하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아주 유용한 교리였다.하지만 지금은 성도가 분리됨보다는 '하나'가 됨으로써 개혁을 이루고 천하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한다.물론 반대의 견해도 아직도 유용하고 본다.
[로마서 성서주해] 8장 35,38-39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한글개역개정판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200주년 신약성서,주권)(200주년 신약성서,권세)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국제비평주석
권세자들 은 물론(단순히 희랍어 단어로서)'시 당국의 관원들','행정관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그러나 천사와 짝지워질 때 그것은 천사들의 존재들의 범주를 의미함이 분명하다....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떠한 우주적인 영적 세력도 그것이 악하든지 선하든지 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떼어 놓을수 없다는 것이다...현재와 미래(종말적인 것도 포함하여)의 사건들과 환경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능력은 기적을 가리킨다는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여기서 천사와 권세자들과 마찬가지로 또다른 천사적 존재의 표상인 듯하다....높음과 깊음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 왔다.고대에 이것들은 보통 각기 천상의 일들과 지하의 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졌다.오리겐은 높음이 엡6:12의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언급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깊음은 지옥의 악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했다.현대에는 높음과 깊음이 고대의 천문학과 점성술의 전문용어들로 사용되었다는 근거위에서(TWNT;바우어) 이것들이 지평선 위의 하늘과 지평선 아래의 하늘에서 다스리는 별의 영들을 가리킨다고 주장되어 왔다.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전혀 무시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장소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그 장소와 관련된 어떤 영적 권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더욱 그럴듯해 보이며 또 그 의미는 단순히 가장 높은 높음과 가장 깊은 깊음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페데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
죽음,생명,천사,권세,현재,미래,능력 이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맞서 동맹하고 있다."악의 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필요한 것은 악한 천사,권세 따위의 교활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에페소6,12)."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시간을 가리키고,"능력들도"는 시간안에서 행동하는 인간의 힘(꼬루넬리)혹은 자연의 힘을 말한다."높음도 깊음도"는 하늘과 땅의 자연력을 가리키든가,일설에는 인간의 생활에 대한 별의 영향이라는 점성학적인 암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그러나 바울로에게 그런 생각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가령 점성학적인 뜻이 있었다 해도,그 자신은 그것을 믿었을 리 없다.그는 가정 안에도 있을 수 있는 모든 장애를 생각하고 어떤 힘도"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카톨릭 새번역의 주석
고대 점성술에서 쓰이던 용어로서,"높이"는 움직이는 어떤 천체가 가장 높이 다다르던 지점을,"깊이"는 별들이 솟는 지평선아래의 하늘을 가리킨다.그래서 이 두 용어는 인간에게 적대적일 수 있는 이 두 우주 공간 자체,또는 그러한 두 공간에서 움직이는 천체들이나 신비로운 힘들을 가리킨다.
[로마서 성경주석] 9장5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공동번역
5 그들은 저 훌륭한 선조들의 후손들이며 그리스도도 인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합시다.아멘.
한글개역개정판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하님이시니라. 아멘.
카톨릭 새번역과 주석
5 그들은 저 조상들의 후손이며,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찬미 받으실 분이십니다.아멘.
"그분은 만물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찬미 받으실 분이십니다.아멘." 이 문장을 "만물위에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라고 옮길수도 있다.이 두가지 해석을 놓고 학자들이 거의 양분되다시피 할 정도로, 어느 것의 가능성이 명백히 더 크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국제비평주석
석의釋義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교부의 주석이 관련된 다음의 것들은 명확히 그것이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것으로 간주한다.:Origen;Chrisostom;Theodore of Mopsuestia;Theodoret;Theophylact;Ambrosiaster;Augustine;Pelagius. 다소의 디오도르는 그것을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으로 인용된다....포티우스(Photius,A.D.9세기)는 마니교도들을 반박하는 그의 논증에서 그 단어들을 하나님을 언급한 것으로 사용한다.물론 좀더 많은 교부들이 그리스도와 연관시키는데 있어 인용될 수 있다.중세시대로부터 우리는 아벨라드와 아퀴나스를 언급할 수있는데 그들은 둘 다 그 단어를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것으로 분명히 간주하고 있다....칼빈은 강력하게 논평하기를:'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 분명한 증거를 그리스도로부터 제거할 목적으로 이 절을 그 맥락의 나머지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완전한 빛이 있는 곳에 어두움을 창조하려는 대담한 시도이다'.긴 논의를 한 마터(Martyr)는 그 단어들을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는 최근의 학자들 ..:도드;바르트;볼트만;테일러;케제만;쿠스.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최근의 학자들...:미첼;쿨만;머레이;브루스;베스트;B.M.Metzger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두 해석이 하나라고 생각한다.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령께 감동함을 받은 사도 바울이 율법의 영향력하에 있는 로마에 있는 자들에게 로마서를 쓸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 것이고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유일하신 구세주임을 부인하려는 유대인이나 이단들의 공격을 방어하고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내린 결단으로서의 사변적 교리思辨的敎理인 삼위일체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역시 성령께서 가르치신 가르침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후자를 지지하고 전자를 부정할 수는 있지만 전자를 지지하고 후자를 부인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을 거스리는 죄이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2장11절은"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강력히 경고한다.칼빈의 강력한 논평이 적용되는 경우이다.
[로마서 성경주석] 10장5-8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5 모세는 율법에서 오는 의로움을 (두고)"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로 살리라"고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6 그러나 믿음에서 오는 의로움은 이렇게 말합니다.(9)"당신의 마음속으로'누가 하늘로 올라갈 것인가?'라고 말하지 마시오"--즉,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 위하여.(10) 7 혹은,"누가 심연으로 내려갈 것인가?"--즉,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 올리기 위하여.(12) 8 그러나(성경은)무엇이라고 말합니까?"말씀은 당신 가까이,당신의 입과 당신의 마음속에 있다"(13)고,즉(그것은)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9)모세가 하느님께 말씀드린 것(신명30,12)을 신앙에서 오는 의로움이 말한 것으로 의인화한 표현이다. (10)"누가 하늘로 올라갈 것인가?"(신명30,12)라는 말은 모세가 율법을 듣고 준행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확신시키기 위해 한 말이다.바울로는 이 말을 그리스도께 적용했다.이미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내려오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로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분을 땅위로 모셔 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12)신명30,13을 바울로는 그리스도께 적용시켰다.그리스도는 이미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에,아무도 의로움에 이르기 위해 죽은 자들의 세계로 내려가서 모셔올 필요가 없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된다. (13)신명30,14.율법을 듣기 위해 하늘이나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갈 필요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입과 마음속에 있는 율법을 준행해야 한다.바울로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신앙에 의거한 의로움이 사도들의 복음선포에 있다고 논증한다.
[로마서 성서주해] 10장13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공식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표현하는 특이한 구약적 방법이며,따라서 특별히 간구의 예배에 적용되는 공식이다.요렐서2:32절은 다른 곳에서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바울이 이 동일한 말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할 때에는 이것은 무조건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는 구약의 성경귀절을 택해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또다른 한 예의 적용이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것은 신약 신자들의 특이한 표식이다.(참고,행9:14,21; 22:16; 고전1:!2; 딤후2:22). 그러기에 신약 신자들은 하나님에게만 속하는 경배를 그리스도에게도 드렸던 것이다.현재의 본문에서는 그 공식은 그리스도를 믿는 최초의 믿음에 적용되고 있지만,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특별히 가리키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의 행위에 국한되어 져서는 안 된다.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믿음을 전제로 하는 예배의 보다 포괄적인 행위이다.
카톨릭 새번역
13 과연"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요엘서3,5를 인용한 것이다(시편 86,5; 사도 2,21 참조).이처럼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께만 유보된"주님"이라는 칭호를 예수님에게도 적용한다는 것은,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첫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였음을 보여준다.그리고 이렇게 한 가지 용어가 쓰임은 구약과 신약 곧 두 계약의 연속성을 드러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이 귀절이 성부와 성자께서 일체이심을 밝혀주는 가장 직접적인 귀절이라고 본다.또한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 부터 발출發出하심을 밝혀주는 가장 직접적인 귀절이라고 본다.혹시 이 점이 이해가 안된다면 그리스도인이 성부의 이름을 부른다면 구원되겠는가를 생각해 보라.유대인이나 유대교적 분파라면 "그렇다"라고 하겠지만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그리스도인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
[로마서 성경주석] 11장9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국제비평주석
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원래의 비유적 표현은 다양하게 해석되었는 데 예를 들면,축연이 베풀어졌을 때 만일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이 갑자기 위험물 가까이에 있을 때 그들의 발을 얽히게 할 수 있는 유목민들에 의해 땅에 깔려진(짐승의)가죽과 의복과 관련하여 해석되었으며,음식을 준비한 사람들이 특정한 개인들로 하여금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안되도록 그들을 위해 준비된 독이 든 요리와 관련하여 해석하였다. 그러한 단어들에 관한 바울의 사용을 고려하여 볼 때 샌데이와 헤들람이 제안한 것과 같은 그러한 설명의 해석('자신들이 믿는 율법과 율법서가 타락의 원인이 되었으며,또한 그런 것들이 자신들을 걸리게한 그물과 수렵용 망으로 되어버린 유대인들과 마찬가지이다')...과 같은 설명의 해석을 바울의 것으로 보기보다는 신적 완악함을 암시하는 일반적 방식으로 그러한 단어들을 바울이 단순하게 이해하였다고 추정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이러한 교회는 첨단과학수사를 통하여 반드시 척결되야 한다.
[로마서 성경주석]11장11,12,15절의 표준적인 번역과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11 그래서 나는 묻습니다.그들은 쓰러지기 위해 걸려넘어졌다는 말입니까?(21)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오히려 그들의 범행때문에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왔습니다.이는 그들을 질투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2 그러나 그들의 범행이 세상의 부가 되고,그들의 감손이(24) 이방인들의 부(가 되었다면)그들이 선택받은 이들의 충만한 수에 다다르는 것은 얼마나 더 대단하겠습니까? 15 그 이유로는 그들의 배척이 세상의 화해(를 뜻했다면)그들의 받아들임은 죽은 자들로부터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32)
(21)하느님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다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다면 그들을 저버리셨는가?하느님은 그들이 결정적으로 파멸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그들은 하느님의 선택에서 결정적으로 제외되지 않았다.하느님은 그들의 잘못을 신비스럽게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24)"감손"이라는 그리스어는"적다,약하다,열등하다,패배하다"를 뜻한다.이 말은 "배척"(15절)이라는 말과 병행되고 "충만한 수"(25절)와"온 이스라엘"(26절)에 대조된다.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다인들은 불신앙 때문에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수에서 탈락된 자들이다. (32)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 들이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몇이라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바울로의 기대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받아들여 이러한 새 생활을 주실 것을 가리킨다.
[로마서 성경주석] 11장26절의 "온 이스라엘"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이 귀절에서 말하고 있는"이스라엘"에게는 본장 전체를 통해 이 말에 속하던 의미를 그대로 적용해야지, 만약 그것과 다른 의미를 적용한다는 것은 주석적으로 불가능하다.이 사실은 본 서신의 이 부분에 나타난 문맥이나 유사한 문맥 양자로 보아서 분명한 일이다.앞의 주석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간의 대조를 말해왔던 것이다.그런데 이 귀절에 와서는 이스라엘을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가? 바울이 말한 것은 인종적으로 본 이스라엘이다.이 이스라엘 속에는 이방인은 포함될 수 없다.이 점에 있어서 앞의 귀절은 불합리하지 않은 것이다.26절은 상호 유비적 또는 상호관련적 진술이기 때문에,"이스라엘"의 의미는 25절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여기 '이스라엘'을 25절의'이스라엘'과 다른 의미로 주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F.F.Bruce").칼빈이 한 것처럼 갈라디아서 6:16절에 호소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이 문단에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사이의 대조가 계속 있었다.갈라디아서 6:16절의 문맥에서는 그러한 대조가 없다.]....25절의 주요논제는 이스라엘의 완악이 그치고 그들이 회복될 것이라는 점이다.이것은 12절에서는 이스라엘의"충만함",15절에서는"받아들이는 것".23,24절에서는 또다시 접붙임이라고 부르는 여러 사실들을 다른 표현으로 확증하고 주장하는 것이다."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최절정적 진술을 이상에서 말하는 대로 분명한 사실 이외에 달리 해석한다는 것은 주석상의 무리이다.....그것은 종말에 가서 모든 이스라엘이 다 회심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다음과 같은 유추로 보아서도 이런 주장은 반대되고 있다.이스라엘의 배교,그들의 범죄,그들의 실패,버림,완악은 전체적인 것이 아니었다.언제나 남은 자는 있었다.가지 모두가 꺾이움을 당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완악은 부분적이었다.마찬가지로 회복과 구원도 모든 이스라엘을 모두 다 포함시킬 필요는 없다."온 이스라엘"은 다수를 가리킨다.그것은 이 장 전체를 따라 나타나고 있는 형태와 일치되는 전체로서의 국민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모든은 그 말의 적절한 의미에서 다루어야만 한다.'전체로서의 이스라엘,한 국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이다.그것은 필연적으로 모든 개개 이스라엘을 포함하는 것으로 본 것은 아니다. Cf.왕상12:1....대하12:1....단9:11."(샌데이와 헤들람)]
[로마서 성서주해] 12장1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200주년 신약성서주석은 '이성적'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예배니라.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사도는"몸"이라는 말을 온 인격을 대표하는 데에 쓰고 있으며 따라서 그 의미는"너희 온 인격을 드려라"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어 온 터이다.....희랍철학에서는 몸에 대한 과소평가가 있었다.윤리적 이상은 몸과 몸의 타락적 세력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몸에 대한 이와같은 견해는 성경의 전반적인 증거와 모순된다.몸은 처음부터 인간의 인격 속에 하나의 완전한 요소이다(참고.창2:7,21-23).몸의 분해는 죄의 삯이며,그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다(참고.창2:17;3:19;롬5:12)구속의 완성은 몸의 부활을 기다린다(참고.롬8:23;고전15:54-56;빌3:21).그러므로 성화도 몸을 그것의 범위대로 가져와야만 한다.이런 종류의 권고를 해야 할 필요성은 몸에 대한 과소평가 때문임은 물론이거니와,몸과 밀접히 관련된 몸의 방종이 너무나 유행하고 득세하여 윤리적 요구의 평가에서 매우 동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산"이란 말이 이 제사의 영구성을 반영하고 있다.그것은 계속적인 헌신이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여기 사용된 말은 신약에서 보통"신령항"(Spiritual)이란 말로 해석되는 그런 용어가 아니다.합당한 또는 합리적이란 말이 보다 문자적 의미이다. 즉 그것은 성령의 지시에 따라 드린 제사이다.(참고.벧전2:5).그러나 바울이 다른 곳에서는 결코 사용하지 아니했고,오직 신약에서 기타 한 곳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이 분명한 용어를 쓰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노라고 했다.(벧전2:2).여기서 말한 예배는 경배적 예배이다.사도는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특징짓는다.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정신과 이성과 지성을 열거하고 있다는사실로 보아 하나님께 합당한 성질을 이끌어 오고 있는 예배이기 때문이다.이 예배는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것과는 대조적인 합리적인 예배이다.우리의 신체적 기능속의 상당수는 우리의 결의를 지원하지 않는다.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경배적 예배는 지적인 결의를 강요한다.우리가"합리적"이란 말에서 유도해 낼 수 있는 교훈은 이런 것이니,곧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전적으로 의식적,지성적 그리고 성별된 헌신으로 바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결코 성서적 의미에서 본"신령한"이란 말을 우리 몸에 대해서는 쓸 수 없다는 사실이다.더우기,이런 표현은 기계적인 형식주의와는 정면으로 반대된다.그리하여 예배는 H.P.Liddon이 말한 것 같이"유대교와 이교도 종파의 외부형식적 예식과는"대조를 이룬다.어떤 경우이든간에,문제의 이 용어는 우리의 몸과 몸이 드리는 예배가 특이하게도 합리적 반응적인 존재자들인 우리들과 어떻게 관련되고 있느냐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성서주해] 12장3-8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믿음"이란 말은 믿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서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즉 복음의 진리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참고.갈1:23; 딤전5:8; 유다서 3절).이것은 개개 신자들에게 어느 정도로 주어진 물건으로 생각되어질 수는 없다.그런즉 여기"믿음"은 신자에 의해 역사되어지는 믿음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믿음의 분량"은 마치 믿음이 부분으로 나뉘어질 수 있어서 몫으로 측량이나 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믿음의 분량"은 믿음이 그리스도의 교회안에서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기능들의 관점에서 역사되어지고 있는 각이各異한 국면을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바울이 사도직분에 관해 언급하지 아니한 이유는 명백하다.로마에는 사도가 없었기 때문이다...."섬기는 일"이란 말은 물질적 필요와 관련해서 자비의 봉사라는 보다 한정된 의미에서 사용되기도 한다(참고.행6:1;11:29;12:25;고후8:4;9:1,12,13).더우기 이 서신에서(15:31)그 말은 바울 자신이 예루살렘에 선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그것은 15:25-27절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그대로다. 이 말은 포괄적인 사용은 바울이 "직임은 여러 가지다"라고 말하고 있는 고린도 전서12:5절에서도 분명하다....집사직에 대한 것이라는 견해를 배격해도 될 만한 아무런 결정적인 이유도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이것이 바로 그와 같은 은사라고 생각될진대,집사들이 스스로 이런 섬기는 일에 권고를 받게 되는 좋은 이유가 있다고 할 것 이다....그 다음에 언급된 은사는 求濟구제하는 일이다.구제를 하되 성실함으로 하라는 것이다.이 말은 때로는 관대하게 구제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참고.고후8:2;9:11,13)....여기서의 구제는 사적私的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교회의 헌금에서 주는 것은 아니다...."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여기서 지시되고 있는 사람은 교회내에서의 치리治理와 감독의 책임을 맡은 사람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참고.살전5:12;딤전5:17).뒷 문단에서는"장로들"이라고 했다.고린도 전서12:28절에서는 이 직분이 다른 명칭, 즉 "다스리는것"으로 되어 있다...."긍휼"이란 말의 사용에는 궁핍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직접적 개인적 섬김에 대한 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앞에서 말한 구제는 지금의 긍휼의 사역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이 경우의 미덕은 즐거움으로 이행해야 하는 미덕인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봉사"(섬기는 일)란 말은 여러 경우에 적용되었다:식탁봉사(사도6,2),헌금(15,25.31),헌금관리(1고린16,15;2고린8'4),바울로의 사도적 직무(11,13;1고린12,5;2고린4,1;11,8). "지도자"(다스리는 자)는 교회공동체를 지도하는 사람(1데살5,12-13;1디모5,17참조)으로서 신자들을 훈계하는 직책을 맡는다. 8절에서는 그들을 보호하고 보살피는 사람인 것 같다(16,2참조).
[로마서 성서주해] 12장11,16,20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11 열성에 식지말고 영에 열렬하며 주님을 섬기시오.16 서로 사이좋게 살고(직역하면"서로 같은 것을 생각하라")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시오.분수에 넘치게 현명하다고 자처하지 마시오. 20 오히려"당신의 원수가 굶주리면 그를 먹여 주시오.그가 목말라하면 그에게 마실 것을 주시오.사실 당신이 이렇게 함으로써 불타는 숯을 그의 머리위에 쌓아올릴 것입니다.
"불타는 숯"은 하느님의 심판이나 죄인의 가책과 회개할 용의를 상징한다.원수를 악으로 대적하지 말고 자비를 베풀라고 권고하는 20절에서는 이 말이 회개할 용의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한다.
가톨릭 새번역
11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15) 16 서로 뜻을 같이 하십시오.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20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위에 놓는 셈입니다."(23)
(15) "마음이"와 "성령"의"성"은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일부 수사본들에는"주님을"대신에"시간을"로 되어 있는데,일부 주석가들은 이 말을'적절한 기회를 잘 살피십시오.'라는 뜻으로 이해한다.(에페5:16참조) (23)잠언25,21-22절을 인용한 것이다.바오로가 이 본문을 인용한 의도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첫째는,피해자의 선의로 가해자의 악의가 더 두드러짐으로써,그에 대한 하느님의 벌을 더 무겁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첫째 것과 반대로 피해자 쪽의 사랑을 보고 그야말로 괴로울 정도로 놀란 악인이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둘째 해석이 문맥에 더 잘 맞는 것으로 여겨진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Klassen의 결론은 이와 같다."숯불은 수치,양심의 가책 또는 형벌을 가리킨다는 너무도 널리 해석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이런 해석은 ,본문의 모든 지지를 결여하고 있다.애굽문헌과 속담에 의하면'숯불'은 사랑의 행위의 결과로서 생겨난 마음의 변화를 생동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국제비평주석
"머리 위에 핀 숯"이란 표현은 또한 2에스드라서16:53에도 나타난다.그 기원에 대한 그럴듯한 제안은 이것이 머리에 잿더미 위에 타는 숯을 담은 접시를 얹고 다님으로써 자신의 죄과를 깨끗이 했던 이집트의 의식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S.Morenz;W.Klassen;L.Ramaroson; S.Baltina)
페데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주해
타고 있는 불을 머리에 쌓아 놓는다는 것은 불과 기름을 성벽위로 던지는 옛날의 전략(플라비우스 요세푸스,<유다 전쟁>3:27,3.271-275) 에서 취한 예일 것이다.그리이스 교회의 교부들(금구 성 요한,데오도래투스,데오필라투스)는 적에 대한 무거운 벌이라는 뜻으라 하였다.아우구스띠노는 자주 그런 의견을 반박하였다.아우구스띠노의 생각이 좋을 것같다.신도들이 적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이나, 그것은 심한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적들에 대한 하느님의 크신 복수를 청하는 애덕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좋을 것이다.혜택을 입은 적敵은 마음의 가책을 느끼고,그런 가책은 겉으로도 나타날 것이다.사랑의 불에 탔다면 적은 은혜를 받고 회개할 것이다.요컨대 사랑은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데 그 사명이 있다.
Commentary Critical and Explanatory on the Whole Bible-jamieson,robert
(compare Mt5:44;Ro12;20).As metals are melted by heaping coals upon them,so is the heart softened by kindness.
[로마서 성서주해] 13장11-12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셩경주석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왔다는 신약적 개념과 관련해서 이런 전망을 취한다는 것은 필요하다.그것은 예언적인 전망이 가까움이지,우리가 셈하는 연대기적 시간의 계산의 가까움은 아니다.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계시함에 있어서,그리스도의 죽음,그의 부활 및 승천,오순절의 성령의 부어주심과 서로 관계가 있는 그다음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은 영광가운데서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이것은 신앙의 지평선 위에 매여달려 있는 사건이다.현재와 이 획기적 구속 사건간의 유사한 성질을 지닌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그러기에 그날이 바로 오늘과 같다고 사도가 기록했을 때에는 틀린 말이 아니다....."밤"은 "이 세대"와 동일시됨이 틀림이 없으며,따라서 밤은 그의 강림에 선행하는 이 세상의 역사의 전기간과 동일시되고 있기 때문이다.사도는 이 세상의 역사의 과정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사실,곧 역사의 결말이 시급하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고 추론을 내릴 만한 그럴듯한 이유를 우리는 지니고 있다.다른 곳에서 바울은 지난 과거를"만세와 만대"라 했다(골1:26).그는 현재를"말세"와 동일시했다(고전10:11).그리고 히브리서9:26절에서는"세상 끝"이라고 했다.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밤은 깊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 정도만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해야 할 말이다.
[로마서 성서주해] 14장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팔레스티나의 유다인들은 채소(2사무17,28참조)고기,술(다니1,8.12-16;유딧8,6;10,5;12,1-2;에스14,17참조),안식일이나 축일 규정을 세심하게 지켰다(즈가7,5;8,19참조).루가18:12를 보면 경건한 바리사이들은 한 주간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을 했다."믿음에 약한 이들"은 그리스도께 개종한 뒤에도 위의 규정들을 세심하게 지킨 로마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강한 이"들은 이 규정에 대해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믿음에 약한 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의심하는 자를 뜻하지 않는다.그분이 성취하신 하신 자유,즉 불결하거나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 유다계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그들은 신앙에 의해서 의로움에 다다랐는데도 이 자유를 행사하기를 주저했다는 뜻으로 믿음에 약했다는 뜻이다....안식일이나 단식일이나 축일을 다른 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관습에 대해 각자가 망설이지 말고(14,22-23)분명한 태도를 정해야 한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너희가 받되"라는 말은 강한 자들에게 직결되고 있기 때문에,만일 연약한 자들의 의심하는 바가 분석과 논평의 주제가 될 경우 연약한 자들에게 떨어질 노怒함을 피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부딪힐 것이란 어떤 사람이 혹 부딪히게 되는 '길 위에 놓인 장애물'이다.거칠 것이란 문자적으로 '덫'을 가리킨다...."너희의 선한 것"..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어 왔다.가령,복음,기독교 신앙고백,하나님의 천국 등이다.그러나 강한 신자가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누리고 있는 자유보다 문맥에 더 잘 어울리는 견해는 없다....주석가들 사이의 견해차이는"의와 화평"의 의미애 대해서다.혹자는 주장하기를 이런 용어들은 법정적 의미라고 하는 바,의는 칭의의 의를 가리키고(참고,1:17;3:21,22;10:3,6),평강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강을 가리킨다는 것이다(참고5:1).[칼빈,필립비,핫지] 다른 혹자는 주장하기를 이런 용어들은 윤리적으로 이해한다 하여,신자들에 의해 성취된 의와 또 신자들에 의해 촉진되고 보존되는 평강을 가리킨다고 한다.[마이어,가뎃,샌데이와 헤들람,바렛] 신자들이 지키고 있는 모든 옳음과조화가 하나님의 화평에 기초하고 있음은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지만,두번째 견해를 두둔해서 할 말이 더 많다.
[로마서 성서주해] 15장19-20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그리스어,일뤼리콘)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200주년 신약성서,완결했습니다).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일루리곤은 아드리아의 동부 해변이니,대강 말한다면 지금의 남부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를 포함하는 곳이다.따라서 마케도니아 북부와 아가야의 서북쪽이다(200주년신약성서주해:기원전11년 로마제국의 황제령이 되었지만 6~9년 원주민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티베리우스 황제가 그곳을 다시 정복했다.일리리쿰은 그 후 판논니아와 달마시아로 불렀다)....그는 사도행전 20:1,2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여행 중,일루리곤에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혹은 그가 고린도에서 체류하는 동안 이 지역 안으로 전도여행을 했는지도 모른다.(참고18:1,18;20:3)..."편만히 전하였노라"는...그가 복음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참고 골1:25),그가 복음을 제시하던 거리낌없는 충만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행20:20,27).바울은 자기 임무를 이행했고,또 위에서 밝힌 지역안에서 그의 사역의 계획도 완성했다."편만히 전하였노라"는 말은 그가 그 지역 안의 모든 곳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는 의미는 아니다."그가 위대한 사도의 의무라고 생각한 것은 그가 교회를 세우고 그렇게 놓여진 터위에 다른 사람이 세우도록 맡겨두는 일이었던 것이다(고전3:7,10)"그리고 그의 기능이라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 그는 말하기를 그가"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다"고 했다(23절).
[로마서 성서주해] 로마서 15장22-33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22 이러한 이유로40 나는 여러분에게 가지 못하도록 여러 차례 방해를 받았습니다. 23 그러나 지금 나는 이 지역에서 더 이상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 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24 내가 스페인으로 갈 때(여러분에게 가려고 합니다).실상 나는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보고 먼저 여러분과 얼마 동안 사귀다가 그곳으로 (가는 여행에) 여러분의 배웅을 받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25 그러나 지금 나는 성도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납니다. 26 실상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인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다소의 기부를 하기로 기꺼이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27 그들은 과연 (그렇게 하기로) 기꺼이 결정했고 그들에게 빚진 이들입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들에 한몫을 차지하게 되었다면 그들은 또한 물질적인 것들로 그들에게 봉사해야할49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28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다 마치고 그들에게 이 결실을 봉인해서50 전해주고 나면 여러분에게 들렸다가 스페인으로 떠날 것입니다. 29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도착할 때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져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30 [형제 여러분],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또한 영의 사랑에 의해서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나를 위해 하느님께 드리는 여러분의 기도중에 나와 함께 싸워 주시오. 31 그것은 내가 유다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구출되고,예루살렘에서 나의 봉사가 성도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입니다. 32 또한 그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기쁘게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분과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기 위함입니다. 33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아멘.
40 바울로가 동부 지중해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바빠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기 어려웠다. 49 "봉사하다"는 경신례 용어이다(민수8,22;16,9;18,22.23;2역대11,14 참조). 이 말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헌금이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뜻을 가짐을 암시한다. 50 봉인은 소유권을 가리키는 공적표지다....바울로는 그들이 헌금을 받아 들이지 않을까 걱정했다.이것은 그와 예루살렘 교회의 관계가 확고부동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바울로가 그 이유를 명시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추리할 수밖에 없다:예루살렘 교회안에 헌금으로 입증될 그리스도인 두 집단 사이의 일치를 방해하는 적대 세력이 헌금을 거절하도록 부추길 위험이 있었던 것같다.이 세력은 이를테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울로의 사도직을 반대한 거짓 형제들(갈라2,4참조)과 비슷한 자들이었을 것이다.바울로는 예루살렘의 형제들이 헌금을 받아들이도록 유다계 그리스도인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이 공동체가 자기 편을 들어 이방계 그리스도인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보여 주기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사도24,17을 보면 성도들이 헌금을 받아들인 것같다.
[로마서 성서주해] 16장18,25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국제비평주석
18 이같은 자들은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교활,한글개역개정판;200주년 신약성서,번지르르한;그럴 듯한,공동번역)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永世前부터 감취었다가
바렛은 그 언급을 '음식률에 마음을 빼았긴 것'으로 간주한다;그러나 이런 해석은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가고 약간의 현대 지지자들을 갖는 반면에 아주 그럴듯 하지는 않다....문자적으로 취해진다면 14:15~21절의 관점에서 훨씬 더 자연스러운 설명은 분명히 바울이'믿음이 연약한'형제들을 영적으로 파멸시키면서까지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14:1~15:13의'믿음 강한'이들의 이기적인 주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영세 전'에서 분명한 의미를 확증하기란 사실 어렵다.딤후 1:9;딛 1:2절에서는"before the world began"을 의미할 수 있다."times eternal"은 이 세계역사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게될 것이다.지금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times eternal"은 창조에서 그리스도의 강림까지 나아가는 시대를 지칭할 수있다....이것이 바울의 의미라면, 그땐 이런 사상이 될 것이니 곧 그 계획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가운데 감추어 있었으며 이 은혜는 영원부터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는 진리를 말해준다는 것이다.선택의 비밀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촉진되듯이(엡1:4),또한 이 비밀의 영광이 비록 감추어져 있긴 했지만 하나님에게는 감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원 전에 그의 계획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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