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성경주석]1:18-2:23,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유다인 약혼자는 혼인에서 엄밀한 뜻의 결혼한 사람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1.부정을 저지른 약혼자는 부정을 저지른 아내처럼 돌로 쳐 죽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2.약혼자를 잃은 여자는 과부와 똑같이 여겼다. 3.약혼자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이혼장을 써 주어야 했다. 4.약혼 시절에 잉태한 아들은 적자로 보았다. 19.요셉은 마리아를 나자렛의 회당에 고발하든가 아니면 두 증인을 세우고 이혼장을 써 주고 인연을 끊든가,두 가지 길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회당에 고발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될 것이며 또 그녀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될 것이다.법대로 사는 사람(올바른 사람,의인,여러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인 요셉으로서는 이를 실천할 수가 없었다. 2장 1.수많은 역사 문헌에 따라 그것은 750년 직전 곧 749년경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베들레헴(베들레엠,그리스어)은 히브리어로"빵의 집"이라는 뜻이다.메디안인과 페르시아인이 말하는 "박사"는 사제계급에 속하며 동시에 천문학자이기도 하고 정치에 관여하고 있었다.그 이름은 가스팔,멜키올,발다살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신자들의 머리에 깊이 새겨져 있었으나 이것은 근거없는 추측이다. 3."유다인의 왕"이라고 듣기만 하여도 이 늙은 이두매아인은 전율하였다.헤로데 왕은 왕위에 집착하고 있었다.왕좌를 노리는 자가 있다면 사형도 서슴지 않았고 죽기 5일 전에도 자기 아들 안티파델을 죽일 정도였다. 11.유다인은 깊은 존경을 나타낼 때 여러 가지 모습으로 엎드렸다.무릎을 꿇거나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 엎드리기도 하였다.박사들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어 예배한 것 같다. 14.헬리오폴리스의 남방 가까운 지점인 마따리에가 성가정의 피난처로서 지정되어 있다.그 곳에는"처녀의 나무"라고 부르는 거대한 단풍나무가 사람들의 숭앙을 받고 있다.그러나 성가정이 마따리에로 피했다는 이야기는 13세기 이후의 것이다.고프트교회의 오랜 전통은 중앙 에집트인 앗슘나인 부근의 코스캄 수도권 소재지를 그 피난처로 지정하고 있다....에집트에 머문 기간은 몇 주간,길어야 한 두달이었다고 생각된다. 16.3개월 된 아이들만 죽여도 충분하였을 터인데도 만일에 대비하여 두 살아래의 어린이를 모두 희생의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사위를 목매어 죽이고 아들 알렉산드로와 아리스도프로를 죽이고 아내 마리암므를 교살하고 자신이 죽기 5일 전에 맏아들 안티파델을 죽이고 또 자기 장례식에서 사람들의 눈물을 흘리게 하려고 예리코의 원형 극장에서 자기가 죽은 직후 유명한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던 이 저주받아 마땅한 괴물에게 죄없는 몇몇의 피가 무엇이 대수로웠을까?역사가 요세푸스가 이 살인 사건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역사에 기곡으로 남기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지금껏 그가 저지른 것으로 이보다 더 잔인한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18.라마는 예루살렘 북방으로 2시간 에프라임 종족과의 경계선 베냐민 종족의 영역에 있다.이 곳에는 예루살렘 멸망 후 느부갓네살이 바빌론에 추방한 유다인의 포로가 한 때 모여 있었다.당시 유다의 비참한 모습을 선명한 비극적 색채로 묘사했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 라헬이 자기 무덤에서 나와 불쌍한 자식들에게 절망적인 오열을 토한 모습에 비유하였다.유다 역사의 가장 오래 책에 따르면 라헬의 무덤은 베들레헴 부근에 있었다(창35:19-20). 22.헤로데는 아르켈라오에게 왕의 칭호를 주었으나 로마가 이것을 승인하지 않고 분국왕이라 하였다.그러나 분국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실제로 유다를 다스릴 수 있었다....그도 폭군이었기 때문에 요셉은 아들 예수의 생명을 염려한 나머지 갈릴레아로 갔다.갈리레아는 헤로데의 또 다른 아들인 안티파스가 다스리고 있었지만 그는 아르켈라오만큼 폭군은 아니었다. 23.나자렛이란 "싹이 트는 고을"이란 뜻이다.예수님께서는 다윗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나는 새싹이었으므로 예언자로부터"네젤"(싹)이라 지칭되었다.또 하나의 해석에서 나자렛은 한낱 한촌寒村에 지나지 않았다.예언자는 야훼의 종이 경멸의 표적이 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라"고 했다.
헤르만 리델보스
"가만히"라는 말이 꼭 "비밀로"를 의미하지 않는다.이 말은 오히려'법정에 가지 않고'와 동등한 말이다.
2장 4."서기관"으로 번역된 희랍어는 원래 성경에 정통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그 말은 단순히 글을 잘 쓰는 사람을 지칭했고 그러므로 그 단어는 광범위하게"학자"를 뜻하게 되었다.그러나 유대인 학자는 거의 성경 연구에만 주력했기 때문에 그 단어는 점차적으로"서기관"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5.히브리어 본문과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일례로 마지막 부분의"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는 구절은 미가 5:1,2에 등장하지 않는다.이러한 메시야 사역에 대한 묘사는 이스라엘 12지파가 다윗에게 그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한 사무엘하 5:2에서 취한 취한 것임이 분명하다.그러나 미가5:1,2과 사무엘 5:2의 내용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다윗의 왕직은 메시야의 고귀한 소명의 전형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하 5:2에 묘사된 것은 미가 5:2과 같은 메시야의 본문과 쉽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역으로 말해서 장차 오실 다스리는 자의 출생지로 베들레헴을 언급한 것은 옛적에 역시 베들레헴 출신이었던 대왕 다윗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16."두 살부터 그 아래"는 3살 이하를 의미한다.이것으로부터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2장의 사건들은 예수님의 탄생 바로 직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헤롯이 학살 대상자의 한계를 높게 잡은 것은 확실하게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헤롯은 그 한계를 그가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로 잡았다.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피신하셨을 때 나이가 2살쯤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마태오복음 성서주해]4:1-11,5:21-42,6장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5.예루살렘을 이렇게 부른 것은 오래 전 이사야와 다니엘 시대부터인데 요한의 묵시록에서도 볼 수 있다.옛 화폐 세겔에는 "거룩한 예루살렘"이라고 새겨져 있다.현대의 아라비아인도 아직 예루살렘을"거룩한 도읍"이라고 말하고 있다. 7.예수님께서는 상대방이 인용한 성서 구절"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기6:16)에 대해 올바른 해석을 가르치셨다.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신뢰하라고 명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편에서 억지로 기적을 강요한다고 하는 오만은 결코 하느님께서 반갑게 받아 주실 이 만무하다(출 17:1-7).5장 22."미친 놈(모로스)"이라고 하는 말은 유다인들은 '불경한 자',죄인',반역자' 등의 뜻으로 썼다.분노 중에도 죄가 되지 않는 분노가 있다.예수님 자신도 때때로 노하셨으며 적에 대하여"(흐)라카"보다 심한 "모레(모로스)"라는 말까지도 사용한 일이 있다(마르코 3:5;마태오 7:26,12:34,39,16:23,21:15-35,25:2-3,8).바울로도 그러하였다.(갈3:1),야고보도 그러하였다(야고보 2:20). 25."형리"는 탈무드에 나오는 "핫산"이다.이것은 집달리이기도 하며 서기이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편태를 가하는 형 집행인이기도 하고 때로는 지방 감옥의 간수이기도 하였다. 33.구율법(출20:7;신5:11;레19:12;민30:3)은 진리에 반대되는 혹은 약속을 이행할 각오없이 하는 맹세를 금하고 있다.하느님을 거짓 맹세의 증인으로 부르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존경을 거스르기 때문이다.이 죄를 피하기 위하여 일부 이스라엘 사람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라 어느 피조물 예를들어 하는,땅,자기의 머리,제단,율법,자기 아들등을 가리켜서 맹세하는 관습을 가지게 되었다.이 맹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포함한 것이 아니므로 지키지 않아도 좋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예수님께서는 우선 이기적인 악의가 있는 교활한 이 생각을 꾸짖으셨다.피조물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며 하느님의 소유이다.예수님께서는 피조물을 내세운 맹세도 금하셨다."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며 "땅"은 하느님의 발판이다.예루살렘은 그 크신 하느님의 도성인 것이다. 37.긍정과 부정은 진리와 허위,의무와 자유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다.이렇게 될 때에 이상적인 아름다운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맹세가 나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으나"악에서 나오는"것이라고 하셨다.맹세가 있는 것은 사람들사이에 불성실과 불신이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것은 유감된 일이다.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으로 구율법을 개혁하고 장차 이르러야 할 이상의 정상을 보여 주셨다.그리스도의 제자는 이 이상을 실행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불성실한 의심많은 세상에서 할 수 없이 맹세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이르렀을 때에는 진리를 존중하고 의무의 이행을 각오하고 맹세해야 할 것이다. 39.정당방위를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단지 제자들에게 복수심을 피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온유하게 대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41."오리"는 그리스인의 밀리온,로마인의 millum으로 1,478미터에 해당한다.직역하면"1천"이다.좌우 두 걸음을 한 걸음으로 하는 로마식의 1천보의 뜻이며 1,482미터이다. 6장2.유다에서는 일정한 단체가 매 토요일마다 회당에서 예식이 끝난 다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부금을 거두었다.그리고 기부를 한 사람의 이름이 공표되었다.유다인은 가난한 사람의 은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더할 나위없는 영광으로 여기고 있었다. 기부한 금액이 많을 때에는 회당에서 회당장이라는 명에있는 좌석에 앉게 된다는 특전까지도 있었다.이것은 문자 그대로"위선자들이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부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5.신심가信心家인 유다인들에게는 하루에 두 차례,아침의 희생시간(9시경)과 오후의 희생시간(3시경)에 반드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2세기 경부터는 그 밖에 저녁 기도라는 또 하나의 기도가 규정되었다.저녁 기도 시간이 되면 집에 있거나 노상에 있거나 침대에 있거나 반드시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기도하였다.현제도 회교도는 옛날의 유다인과 마찬가지로 기도시간을 엄수하고 어떠한 장소에 있거나 외투를 땅바닥에 깔고 신발을 벗고 성도 메카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고 있다. 5. "서서" 유다인은 항상 서서 기도하였으므로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서서"라는 자세가 아니라,거기에 나타나 있는 가장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루가 18:10-14 참조). 7.이것은 이방인적인 기도를 금하는 타이름이다."빈 말을 되풀이 한다" 소아시아인 특히 이교도들은 기도하는 말에 일종의 신통력이 있다고 생각하였다.그렇기 때문에 자신도 알 수 없는 기묘한 문구를 큰 소리로 빨리 외우면 외울수록 신神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였다.하나의 실례는 회교다.회교도들은 알라의 신외에 신은 없다"라는 말을 쉬지 않고 되풀이 한다.엣싸나라는 가장 열성적인 회교도는 하루에 13,600번이나 이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10. 라틴 교부들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는 이 둘째 소망을 주님의 재림 즉 종말론적으로 해석하였으나....그리스도인 신자인 현재의 우리도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미 건설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하고 기도하고 있다.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전 인류의 마음을 통치하실 때까지 이 소망을 계속하여도 좋기 때문이다.
헤르만 리델보스
"이끌리어"로 번역된 희랍어 동사가 암시하는 바에 의하면 이 광야는 예수님께서 계셨던 곳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아마도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을 찿기 위하여 요단 계곡에서 주변의 메마른 구릉으로 올라가셨음 직하다.디아볼로스라는 이름은 맨 처음 구약의 희랍어역인 셉투아진트(70인경)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단어는 희랍어의 "사탄"곧 '적대자'를 번역한 것이다...."성전 꼭대기"(즉 성전 지붕의 첨탑)..게다가 그러한 산이 이 지역에 있다손 치더라도 세상의 만국을 단번에 보는 것은 마귀의 특별한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분면하다.짐작건대 마귀가 예수님께 전 세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초자연적으로 주님의 감각 기관 또는 마음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도리 밖에는 없다.여하튼 이것을 세상의 만국을 개관 그것도 실제적으로 개관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는 난점이 있다.더욱이 누가복음의 진술에 따르면(4:5)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세상의 만국을 눈깜짝할 사이에 본다는 것은 물론 감각기관 능력밖의 일이다.....두번째 가능성은 ...마귀는 그의 특별한 능력을 사용하여 아주 짧은 시간에 예수님을 공중으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겼다는 것이다....마귀는 그에게 이 만국을 처분할 권세가 있음을 암시하였고(콘스탄틴 대제 이후로 상황이 역전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논박하지 않으셨다.사실 사단은 잠시 동안 이 세상의 불법적인 지배자로 있다(눅 4:6;엡2:2;6:12).5장 39.이것은 짐작건대 손등으로 때린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그럴 경우에야 오른편 뺨이 맞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럴 경우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뺨을 때린 것이 특별히 모독행위로 간주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여기서 일어난 불의는 상해의 문제가 아니라 수치의 문제이다. 6장2.그리고는 그것을 또한 '거리',즉 가난한자들의 구역에서 분명하게 알렸다(이'거리'는 희랍어로'좁은 거리' 또는 '뒷골목'을 의미한다).
[마태오복음 성서주해] 10:16-27,11:12,12:30,13:24-50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16. 뱀은 교활하다는 정평이 있다.어떠한 위험일지라도 교묘하게 피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몸을 사린다.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몸을 사린다.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이리 속에 들어간 선교사는 스스로 이리의 입으로 들어가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된다.뱀과 같이 자기를 보호하고 슬기로워야 한다.그러나 그것만으로 모자란다.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은 그와 어울릴 수 있는 덕을 지니는 사람이어야 한다.사도들은 선교를 할 때에 신중과 단순함의 덕을 아울러 가질 필요가 있다.죄없는 생활을 하며 음모를 꾸미지 않고 악한 자의 의심을 받지 않는 정직한 생활을 하는 것은 불화와 논쟁만을 일삼는 사람들가운데서도 평화를 잃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조건이다.거기에 신중함이 곁들인다면 소박함을 지킬 수 있고 악인의 함정을 피할 수 있으며 부당한 고소를 물리칠 수 있다.라그랑즈는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 재미있는 심리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비둘기는 순진한 걸음걸이를 하며 언제 잡아도 괜찮다는 듯이 보이지만 이쪽에서 막상 잡으려하면 훌쩍 날아가 버리고 만다.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도'순진하라.그러나 비둘기와 같이'라는 의미인지 모른다.피로네에 따르면 꿩,비들기로 상징되는 로고스(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 예지의 상징을 비둘기로 표현하고 잇다. 17.예루살렘에 있던 71인의 최고의회를 비롯하여 최고 120명의 유다인이 사는 지방마다 23명으로 구성된 의회가 있었다.이곳에는 종교적인 범죄를 재판하고 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18.여기서는 이미 유다인 재판소가 아니라 팔레스티나의 국경을 넘어 이방인의 재판소를 말하고 있다. 20.많은 순교자의 기록 중에는 연약한 처녀들이나 천진한 어린아이들까지도 초자연적인 지혜의 답변을 하여 재판관들을 당황케 한 이야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23.아마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암시하고 있었던 듯 싶다. 27.이스라엘인의 두 가지 관습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안식일이나 축제일의 의식이 진행되는 사이에 설교를 하는"다르산"(설교자)은 큰 소리로 직접 군중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말하고 싶은 일들을 "아모라"혹은 "토르구망"이라는 중계자에게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하면 나중에 그 중계자가 큰 소리로 군중에게 그 말을 전했다(스트락크&빌레르벡크).또 하나의 관습은 금요일 저녁에"핫산"이 근처에서 제일 높은 지붕에 올라가서 나팔을 불어 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이 시작되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알렸다.예수님께서는 秘敎비교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다만 "어둠"즉 갈릴레아 한 구석에서 적은 수의 제자들을 가르치셨다.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아모라"나"핫산"과 같이"밝은 곳으로 드러내고","지붕 위에서"전 인류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다.11장12.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께 유산으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하늘 나라는 폭력으로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유다인들이 유산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안심하고 잠자고 있는 동안에 폭력을 가진 자가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의"도둑"이 그것을 빼앗아 갈 것이다.이 행복한 "도둑"이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개보다 더 멸시하고 있던"세리","죄인","창녀"들이다.그들은 일단 타락하였지만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다.하느님의 나라를 얻기 위하여 폭력,희생심,이탈심이 필요하다는 관념은 루가서에서도 강조되고 있다(루가16:14-16). 30. 유다인에게 부과된 율법은 목을 졸라 매는 멍에이며 어깨를 짓누루는 짐이었다.이와 같이 사람을 짓누르는 무쇠의 멍에도 있는가 하면 또 아무런 압박도 가하지 않고 고통을 주지 않는 멍에도 있다.바리사이파 사람의 견딜 수 없는 짐에 대응하여 예수님의 가벼운 짐이 있다.이보다 고마운 스승이 있을 것인가? 13장25.곧 밤중이다.종이 게을러서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과일 밭을 지키는 습관은 있지만 씨를 뿌린 밭을 밤중까지 지키는 습관은 없었다."가라지"(린네오가 말한 Lolium temulentum,독보리)는 이삭이 필 때까지 다른 밀과 구별하기 어렵다. 26.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오래 산 비베라는 성서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이삭이 여물 때까지는 어떠한 경험자라도 가라지와 밀을 구별하기가 어렵다.여물게 되면 어린이들이라도 가라지의 가볍게 하늘거리는 열매와 밀을 곧 알아 볼 수가 있다." 27-29.비베는 또 이렇게 말한다."수확할 때를 기다리지 않고 미리 가라지를 뽑아내려고 하다가는 좋은 밀을 밟아버릴 뿐 아니라,좋은 밀도 함께 뽑아버리게 될 것이다.뿌리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자라면 밀이 가라지보다 약간 크기 때문에 낫으로 먼저 밀을 잘라 버린다.그렇게 하면 나중에 가라지를 뽑아 내어 한데 모아 양치는 아이들을 시켜 밭에서 태워 버리게 한다." 47-50. 교회의 그물에는 선인과 악인이 함께 들어 있으며 그 구별은 세상 마칠 때에 이루어진다.선인과 악인 불문하고 세례를 받은 자는 모두 교회의 회원이다.프로테스탄트 일부 교인들이 교회는 성인들만의 단체라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헤르만 리델보스
30.고대 유대주의의 구원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계속 각 사람의 죄와 선행을 기록하신다고 한다.죄의 숫자가 선행의 숫자보다 하나라도 많으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그러나 아무도 자기의 기록이 어떠한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 책에 가능한 한 많은 선행을 기록해두라는 충고를 받았던 것이다.그러나 그러한 율법을 성취하려느 집요한 노력은 마음의 평안을 주지 못하였다.구원은 자기가 얻어야만 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가 행한 선행의 수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라고 가르치는 어느 것이 되었든지 그 신자들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만든다.(미 6:6,7;롬8:15) 13장 28.고대 근동에서는 오늘날보다 곡식을 듬성듬성하게 심었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는 일이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마태복음 성경주석]18:21-35,25:1-14,27:8,32,51,52,28장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21."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이 일곱이란는 수를 유다인은 성스러운 수,완전한 수라고 말하고 있었다.베드로는 일곱 번만 용서하는일도 몹시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으리라.라삐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면 된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요셉 바아르 유다의 말을 빌린다면 세 번까지 용서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22.계산해 보면 490번이 된다.그러나 이것도 상징적인 수이지 계산할 필요가 없다. 24.로마 금돈의 명칭이다.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200세겔(1세겔=30드라크마)이다.성전에서는 유다의 화폐만이 통용되었는데 그밖의 때로는 그리스나 로마의 화폐도 쓰이고 있었다.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였을 때 받은 은전은 세겔(1세겔=4 드라크마)이었다.그리스 화폐는 다음과 같다.오보로스는 드라크마의 6분의1,디드라크마는 2드라크마이다.스타테르는 4드라크마(은 세겔과 같은 값이다)로서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므나는 100드라크마,달란트는 6,000드라크마이다.달란트는 또한 무게에 대한 단위이기도 했는데 42.533 킬로그램에 해당한다.로마의 화폐는 데나리온이 그리스의 드라크마에 해당되며 앗사리온은 데나리온의16분의 1(내지 10분의1),코드란트(코드란테스)는 앗사리온의 4분의1,레프타 또는 미누툼(불가타역)은 코드란트의 4분의 1이다. 25장 이 비유의 변칙적인 곳:1세기의 유다인 사이에는 혼인 잔치에 앞서 며칠 간의 축하기간이 있었다.이 기간에 신랑은 젊은 친구들과 함께 또 신부는 가까이 지내던 처녀들과 함께 저마다 집에서 축하하였다.결혼식이 있는 그 날에 비로소 이 두 그룹이 대면하게 되어 있었다.날이 저물면 신랑은 등불을 든 친구와 함께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십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게 되어 있었다.신부는 혼례의상을 입고 젊은 처녀들과 함께 신랑이 맞으러 오기를 기다렸다.신랑이 오면 환영의 노래를 부르며 열을 지어 신랑의 집으로 간다.거기서 혼인잔치가 벌어진다.이 비유를 보면 표면적으로는 당시의 습관과 다른 것 같다.등장하는 처녀들은 길 한가운데 어느 곳에서 기다렸던 것같고 십부는 함께 오지 않았다.신부의 집에서 혼인잔치가 열린 것 같으며 신랑이 오자 문이 닫히고 안에서 잔치가 벌어진다.예수님께서는 왜 당시의 관습과 다른 혼인잔치를 예로 드셨을까? 언제나 볼 수 있는 가르침에 따르게 하려 했다고 생각할 이유도 찿아 볼 수 없는 것 같다. 결혼식의 관습을 생략하고 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14.앗시라아와 에집트의 옛 문헌을 보면 자유민이나 종이나 해방노예에게 재산을 맡기는 예가 많은데 그것은 주인의 재산을 활용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맡은 사람은 주인에게 맡은 액수와 일정한 이자를 돌려 주게 되어 있었다.27장 8.확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전승에 의하면 이곳은 게헨나의 골짜기에 있었다. 32. T자형 그리스식 십자가가 아니고 +자형의 라틴식 십자가인 것 같다."죄목표"가 십자가에 붙어 있었으니 라틴식 십자가의 가름대 위에 달려 있는 기둥 꼭대기에 붙였으리라고 생각된다.기둥은 4미터쯤 되고 가름대가 2미터절반 쯤 되면 그 무게가 전부 100킬로그램 쯤 되었을 것이다. 51.마태오는 이 사건에 대하여"땅이 흔들리며"라 하여 지진이 있었다고 했다.지진은 좁은 지역에서 일어난 현상이었으리라.기원 4세기이 예루살렘의 치릴로는 갈바리아 산위에 갈라진 틈이 이 지진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하였다.지금도 볼 수 있는 이 신비로운 갈라진 틈은 폭 15센티 길이 2미터나 되는 것으로 세로로 갈라져 있다. 52.여기서 해석학자들은 간결한 복음서의 텍스트를 존중해야 할 것이며 쓸데없는 덧붙임을 삼가하여야 한다.다시 살아난 성인이란 아담,노아,아브라함,세례자 요한,양부 요셉,노인 스므온,여자 예언자 안나 등이라고 주장하는 해석은 신빙성이 없다.....현대의 해석학자는 이 소생이 참된 부활이 아니고 거룩한 산에서 모세가 나타난 것과 같은 나타남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였다.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왜 그런가? 텍스트는"나타났다"고 말하지 않고"다시 살아났다"고 말하기 때문이다.앞서 말한 바와 같이 텍스트를 너무 파헤치는 것은 이 경우 하나의 사도 邪道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28장 부활에 대한 주의사항:요한서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두 번 무덤에 갔는데 두 번째에 예수님을 보게 된다. 루가서에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사도들을 떠나 예루살렘을 나왔을 때 여자들이 천사들을 만난 일을 벌써 알고 있었는데 그녀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하지 않는다(루가 24:23).이상 두 복음서를 잃으면 마태오는 시간적으로 다른 사건을 결합시켜 기술한 것으로 생각된다.따라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세 공관복음 사가가 쓴 것같이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부인들과 같이 아침 일찍 무덤으로 갔다.그러나 요한이 쓴 기록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만 이 무덤에 이르자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천사를 보기 전에 성으로 달려가 사건 전말을 알렸다.이 때부터 막달라 마리아는 요한이 기록한 대로 다른 부인들과 헤어져 단독 행동을 하였다.루가서를 보면 부인들은 구세주를 뵙기에 앞서 천사들을 만나고 있으므로 한 번 무덤에 가서 천사들과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보았던 것은 아닌 것 같다.막달라 마리아가 앞서고 경건한 부인들이 아침 일찍 무덤에 갔고 막달라 마리아가 성안으로 달려간 후에 다른 부인들은 무덤 옆에 머물렀다.그 때 부인들은 천사들의 말을 듣고 일행은 사도들에게 그것을 전하러 갔다.그리고 나서 다시 거룩한 무덤으로 돌아왔다.이 두번째 방문에서 돌아오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9절에 있는"그런데 뜻밖에도"라고 한 것은 두 가지 사건을 시간적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 아니고 단순한 접속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구나벤 바우엘은 말하고 있다. 19. 중요한 이 말씀은 모든 고사본,고번역에 실려 있다.삼위일체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리스도 혈통의 한 가족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이 거룩한 삼위격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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