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리꼬 바르바로
에페소에서 57년 봄에 집필하였다.1장 1-바울로는 자신에 대하여 엄밀한 뜻으로"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곧 희소식의 전달자로 소개한다.바울로는 선교사로서 신임받아야 할 명분을 주장한다.바울로가 35회나 쓰고 있는 "사도"라는 말은 "자신이 보낸다"라는 그리스말에서 온 것이다.곧 아포스톨로스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람,하느님을 대표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이다....소스테네는 사도행전 18장17절에 있는 회당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은 아니지만 바울로의 협력자로서 형제라는 말에 붙어 있는 관사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형제',고린토인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2- "하느님의 교회"[에클레시아=교회] 라는 말은 본시 통속적인 그리스말로서는 "전령의 소리이며 도시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하여 의논하기 위해 소집된 시민의 집회"라는 뜻이 있다.무엇인가 공동행동을 위하여 모이는 뽑힌 사람들의 모임,그리고 또 의식적 통일이라는 개념을 포함한 말이다.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주기적 집회,또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안에서 믿음으로 초청을 받은 모든 사람의 단체를 가리키는 데 잘 어울리는 말이다.70인역의 번역자는 히브리말인 '가하르'를 번역하기 위하여 이 말을 집회라는 뜻으로 썼고(신명기 9:10,18:16),특히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가르키기 위하여 약 100번이나 쓰고 있다(신명기 23:4;역대기 상 28:8;느헤미야 13:1;미가2:5)...특히 바울로는 60번은 쓰고 있다.처음 이 말은 그리스도 신도의 모든 공동체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 같다(마태오 16:18;사도행전 5:11).마침내 장소이름이 덧붙여지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예루살렘이라든가 다마스커스에 모여 있던 하느님의 교회(갈 1:13;필립비3:6)라는 식이었다....바울로가 위에서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어느 장소의 단체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그 자체에 대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이것에 따라서 에클레시아는 구약성서에서 200번이나 쓰이고 있는 시나고게(집회,회당)와 구별된다.왜냐하면 신약성서에서는 시나고게라는 말이 거의 언제나 장소적인 뜻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더욱 더 뚜렷이 유다교를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그런가 하면 에클레시아는 새로운 믿음의 사회적 보편적 면을 가리키고 이 집회에 속하는 사람을 보통"형제"(5:11,6:6,8,7:12,14-15)라고 말하였다.금구 성 요한의 말에 따르면 바울로가 여기서 "하느님의 교회"라는 말투를 쓴 것은 교회가 이 사람 저 사람의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또 고린토의 공동체에 스며든 당파심을 치려 한 것이었다고 한다. 14~16-바울로가 스스로 세례를 준 이 그리스보는 그의 회개로 말미암아 복음이 고린토에서 승리를 거둔 저 회당장과 같은 인물임에 틀림없다.(사도행전 18:8) "가이오"는 바울로가 머물렀던 집주인으로서 다소 알려진 사람이며 그 집에서 종교집회를 가지는 일도 있었다.(롬16:23) 스테파나와 그의 가족은 아카이아의 수도에서 새 믿음으로 회개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16:15-18) 몸이 약하고 분주했던 바울로는 새로운 신도의 세례를 자신의 협력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협력자 중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 사람은 마케도니아에서 돌아온 디모테오와 실라였다(행 18:5). 22-유다인은 하느님의 간섭을 증명하는 "기적"을 구한다.(마태오 12:38 이하;루가 11:29 이하).곧 그들은 잘못을 저지를까 하는 두려움없이 믿고 싶어했다.또 자신들의 영광으로 삼는 소피아(지혜)에 도취하고 있던 그리스사람은 확실한 논법에만 의지하고 인텔리계급에 있어서매력있는 철학을 품지않는 종교는 멸시해 왔다.그러나 이 두 가지야말로 세상의 것이어서 그리스도교적 믿음에는 맞지 않고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다. 2장3-'이 세상 임금'의 성곽이었던 고린토에는 무엇인가 성공을 얻기 위한 인간적인 수단이 하나도 없었고 조금 전에 아테네에서 온 슬픔 더우기 협력자들도 이 때에는 없었고 또 바울로의 건강상태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불안을 설명할 수 있다.후에 그리스도의 영상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고(행 18:9).사람의 나약함이 하느님의 힘으로 변하였다(4~5). 4~5-그리스인이 얼마나 지식을 숭배하고 있었는가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성에 대한 찬사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에게 증정했던 '윤리'속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곧 행복한 것인 하느님의 활동은 순수하게 지적인 것이며 인간활동에 있어 무엇보다 행복한 것은 이 하느님의 활동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하였다.또 플라톤에 따르면 사람과 하느님은 "이성"을 공유하기 때문에 친척과 같은 관계에 있다.知子지자는 개념의 길을 통하여 하느님께 가까이 가 하느님이 된다.하느님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고 인간 자신이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7-천지창조이전(200주년 신약성서,현세 이전,그리스어 萬世前만세전). 11-마음(그리스어,영). 14-16"영적인 사람"프네우마디코스(프뉴마디코스)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자신의 생각이 그리스도 자신의 생각이 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에 대해서도 바르게 판단한다.(16) 사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믿음의 선교를 반갑게 맞아들이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다(갈 3:5,14). 이 하느님의 성령은 또한 그리스도의 성령이기 때문에 이것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살고 그리스도와 똑같이 인간적인 것 신적인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16;필2:5).이 영(프네우마)은 우리 인간의 영역생활 전체에 대한 힘의 원리로 간주할 수 있다.4장 9-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옥좌에 앉아"(마19:28),곧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이 세상에는 인간 쓰레기처럼 사람을 다스리는 왕의 자리가 아니라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투기장에서 맹수와 싸우도록 마련되었다.이것은 벌써 사형판결을 받은 노예에 대하여 로마의 관습이 마련하고 있는 운명이다.투기장에서 싸우도록 마련되어 있는 죄수처럼 사도들은 모든 이성을 가진 피조물의 구경거리가 되었다.시련 속에 있는 그들의 용감성을 감탄하면서 보고 있는 착한 천사와 착한 사람들(히10:33) 그리고 아우구스티노의 말대로 그들의 괴로움을 기뻐하는 악한 천사에게도 구경거리가 되었다(욥 1:7;에페소 6:11-12). 17-생활 원칙[200주년 道理,그리스어 신앙의 길]. 21-이 채찍은 당시의 스포츠 경기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경기 심판자는 채찍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채찍이 단지 심판관의 표시만이 아니라 경기장에서 규칙을 거스린 사람들을 때리는 데도 사용되었다. 5장5-사탄에게 넘긴다는 말은 몹시 알기 어려운 말투이지만 의미는 이 죄인이 성도의 교회에서 배척되고 거기서 누리던 뒷받침도 잃고 온갖 보호를 잃어 간접적으로 사탄의 다스림안에 떨어진다(1 디모테오 1:20)는 것이다.그리고 이 사탄은 그 죄인에게 악마의 짓거리로 삼았던(욥 2:7;루가 13:16; 2고린토 12:7) 여러가지 육신의 병이라든가 괴로움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6장18-음행이 특별히 나쁜 것은 그리스도인의 몸의 구실과 사명에 무섭게 대립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곧 그리스도인에게서 매춘부와의 관계가 가장 무서운 죄악이 되는 까닭은 축성된 이 몸이 구세주께 가지고 있는 일치의 관계를 끊기 때문이다.음행으로 말미암은 육체의 일치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일치에 대립한다.그리스도와의 영적 일치로 말미암아 몸은 靈化영화된다.그렇기 때문에 또다시 육체적인 죄의 일치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기의 몸에 대한 죄이다. 19-고린토에 있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에서는 "포르네이아(음행)"가 여신에 대한 축성인 것처럼 생각되고 있었다.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그 반대이어서 음행이야말로 하느님화化 되었던 자기의 신성함을 잃는 것이다.7장 9-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좋다.곧 육욕에 지기보다는 결혼하는 편이좋다.육욕은 일종의 해로운 열이다.그리고 이 육욕의 공격을 받은 사람은 이것에 져서 은총의 윤택을 잃지 않는다면 뜨거워 지기는 하겠지만 불타지는 않는다." 11-"헤어졌다"란 이혼이 아니고 별거를 말한다.주님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동거를 포기한 아내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이가를 말한다.그러한 여인은 남편과 화해하든가 혹은 혼자 살아야 한다.별거하고 있는 부부라도 하느님 앞에서의 결혼 인연은 살아있다.그러한 까닭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이혼한 여자를 얻지 말라고 명하셨다(루가 16:18).이 절의 후반은 남녀가 이 일에 있어서 똑같은 권리나 의무를 가지며 완전히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9장 25- 그리스의 여러 가지 큰 경기에서 주는 상은 물질적인 상이 아니었다.피디아 경기에서는 월계관,올림픽 경기에서는 올리브관,그리고 고린토 경기에서는 소나무 관이었다.이러한 관은 지협경기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는 죽은 사람의 기념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성도들의" 눈앞에 이 세상에서 겪은 모든 시련과 인내에 대한 보상으로서(1 데살로니카 2:19;2디모테오 4:8;야고보 1:12;묵시록 2:10) 영원한 월계관이라는 미래의 영광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26-권투선수는 길이 2미터쯤 되는 소가죽의 띠를 주먹에 감아 그것을 될 수 있는 한 조여 매었다.때로는 가죽안에 납이나 못같은 것을 넣어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히기까지 하였다.당시의 권투선수 그림을 보면 눈이 부어오르고 코가 뭉그러지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10장 2-물론 씻는다는 것이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의 표시인 것과 같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의 예속에서 해방되었고 하느님의 축복의 보증을 받았다.이 은혜를 받는 것은 하느님과 백성사이에 중개자였던 모세에 대한 복종과 신뢰때문이었다.이것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도가 세례를 받을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처럼(6:11;롬6:3;갈 3:27) 모세와 한 몸이 되었다. 8.-이 수는 퓔론,요세푸스 및 라삐들에 이해 증명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기록이 있었다고는 말 할 수 없다.이 두 기록의 차이는 바울로가 여기서 페스트로 죽은 사람,혹은 그 날에 죽은 23,000명만을 쓰고서 우두머리들에게 살해된 1,000 명을 쓰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필사인의 잘못이든가 또는 사도 자신이 어림셈으로 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0-"살육의 천사" 하느님의 복수를 행하는 천사이며 바울로는 코라와 그 무리에게 내린 벌(민 17:12)을 천사가 내린 벌로 보고 있다.(출 12:23;사무엘 하 24:16;역대기 하 32:21;행 12:23;히 11:28 참조). 11장 5~6.이러한 풍습은 모두 여성의 심중한 마음가짐과 고상한 품위의 정신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그렇기 때문에 어떤 교회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처녀들에게 베일을 씌어 주는 의식이 있었다(테르툴리아노,예로니모).그래서 고대세계에서는 여자가 베일을 쓰는 것이 그 종속적인 신분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관습이었다.여종과 창녀만은 베일을 쓸 수가 없었다.이것은 왜 바울로가 당시의 관습을 그렇게도 고집스럽게 지켰던가 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30-성체에 대한 고린토인의 불경과 알맞은 준비의 부족은 교회안에 여러가지 병과 사망의 이유가 되었다."여러분 중에 몸이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또 죽은 자도 적지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이것은 하느님께서 징계로서 주의와 보속을 위하여 주시는 시간적인 벌이다.(집 18:20-21;마카베오 하 6:12-17) 이것은 또한 바울로가 한 경고가 공허하고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12장 8~10- [첫째]"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은 가르침의 선물에 속한다."지혜의 말씀"이라는 선물을 받고 있는 사람은 믿음에 대한 가장 고귀한 진리,하느님의 심오한 진리,은총의 신적인 생명 등을 전할 능력을 가진다. 이에 대하여 지식의 말씀의 선물을 받은 사람은 믿으의 초보적인 진리 예를 들면 구원에 대한 수단 등을 말 할 수가 있다...."성령의 활동인지 가려내는 힘"이란 선물의 기원을 분별할 수 있는 선물로 가짜 예언자와 가짜 교사가 유별나게 많았던 시대에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었다. 27~30-"사도"는 12 사람만 가르키는 말이 아니고 바르바나,실라,디모테오와 같이 새로운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고 혹은 거기에 세운 교회의 발전에 힘쓰고 있는 선교사를 포함한다.하나의 선물을 이름지을 때에 신약에서는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다."사도"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은 좀 이상스러운 느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도의 여성명사는 70역인에서 선물 또는 봉사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울러 생각한다면 그 수수께기가 풀린다."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간략하게 예언자라고도 번역하는데 교회의 창립자의 사업을 이어가는 사람을 가리킨다.(행 11:27-30,13:1-12)."가르치는 사람" 곧 교사인데 교회에서 전도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로마 12:7; 1 디모테오 4:13-16,5:17;디도 2:7).이상의 세 가지 직분은 가르치며 이끄는 교회의 중심적 지도층이었다. 13장 1~3- 아쯔로에 따르면 여기 나온 말은 울려 퍼지는 꽹과리(심벌즈)의 소리를 생각나게 하는 의음적疑音的인 그리스말이 사용되고 있다.그리고 황홀상태를 일으키기 위하여 꽹과리를 쓰고 있던 특히 키베레스(cybele,또한dionysus,corybantes) 여신의 의식 등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5~6-"무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말인 이 동사는 예例의 개방적인 부인들처럼(11:2-16).예절을 거스리고 또 무례한 짓을 한다는(롬 1:27) 그런 뜻이며 뉘앙스로서는 심중성의 모자람,형제간의 사귐에 있어서 거치른 행동,곧 노골적이고 야비한 짓거라라고 하는 데에 중점을 둔 말이다.사랑은 이와같은 태도를 피하고 이웃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어떻게 해야 할 것이가를 직감하고 무슨 일에 있어서나 온유하게 행동하고 고귀한 품위를 보존한다.이것은 명예에 대한 감각과 병행된다.참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예의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8~12-고린토인은 금속(놋,금,은)의 거울 제조로 유명하였다.그러나 이런 거울은 아무리 닦는다 하더라도 희미하게밖에 모습을 비춰주지 못한다.마찬가지로 하느님을 그 업적을 통해서 보는 길외에는 알 수가 없다(로마 1:20).이것은 추리적인 인식이라고 하며 막연한 지식이기 때문에 언제나 수수께끼가 남는다.그러나 하늘에서는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된다.곧 정확하게 그리고 자신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에게 사랑받는 그 정도에 알맞게 하느님을 알게 된다.(아쯔로) 14장 28-"보통 교인[개역한글:알지못하는 자;ICC:방언 은사받지 못한 자,알지못하는 자;200주년:초심자]이나 믿지 않은 사람들"."보통 교인"은 고린토교회의 이와 같은 관습을 알지못한 다른 교회의 신도이거나 혹은 고린토의 신도로 이러한 모임에 참석한 일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 33-35.바울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회당의 관습을 나타내고 있지만 동시에 그리스의 사회에서도 그러하였다.그리스에서도 여자는 집안에서 살림을 하고 공생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1세기 경이 되면서 그리스 여성은 점점 해방되고 있지만 경솔한 고린토인들은 특히 극단으로 달리기 쉬웠기 때문에 바울로가 새삼스럽게 주의를 주었던 것이다. 15장8~10-바울로는 자기를 팔삭동이라고 말하고 있다.이 말은 잉태된 지 8개월만에 태어난 미숙한 태아에 대하여 하는 말이었다.곧 바울로는 어머니의 태내(유다교)에서 힘을 주어 태어나게 된 아기라는 상징으로서 자신은 정상이 아니라 돌발적으로 그리스도교 안에 태어난 사실을 말하였다.다시 살아난 그리스도께 대한 증인들의 차례로 보면 바울로는 이를테면 나중에 끼어든 사람이다.열두사람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생활을 보았고 정상적인 증인으로 태어난 셈이었다.그것과 달리 바울로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있으실 때는 그분의 제자가 아니었고 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본 일도 없고 따라서 사도 혹은 증인이라고 하는 구실에서 말한다면 예외적인 팔삭동이와 같은 존재이다. 28.이 세상의 때가 끝나면 하느님께서는"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이다."곧 그 때에는 하느님과 사람사이에 중개가 필요없다. 29-이에 대하여 제시한 해석은 40가지 이상이 되지만 두 가지만은 주목할 만하다[카톨릭,동방정교회,성공회,루터교,감리교의 해석은 거의 같다]어떤 구도자들은 (모두가 모두는 아니었다) 세례를 받을 때그리스도교에 들어오기 전에 죽은 친척이든가 친구에게 이 속죄의식의 성과를 얻게 하고 싶어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아쯔로) 현재 어떤 해석자는 이를테면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받은 세례를 엄밀한 뜻의 세례와는 다른 여러가지 기도를 포함한 죽은 이를 위한 무엇인가 특별한 예절이라고 생각하였다.마카베오서에서도 마카베오의 유다는 전사한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을 예루살렘 성전에 맡겼다.성서에서는 이러한 행동을 칭찬하였다(마카베오 하 12:43).그리고 지금도 전례로 행하고 있는 사도赦禱 예절(고별식)이라는 예도 들 수가 있다.어쨋거나 고린토사람들이 그러한 예식을 행하고 있다는 것은 죽은 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성 토마스 아퀴나스) 16장 2-"일요일마다"곧 유다인의 안식일(토요일)다음 날인데 이 날은 그리스도교의 모임(집회)이 있는 날이며(행 20:7),주의 날(지금의 주일.일요일=묵시록 1:10;디다케 14:1,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이라고 부른 날이다.이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며 안식일을 대신하게 된 날이었다.특히 이 날에는 애찬(미사)이 이루어지고 이 미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와 유다교가 뚜렸하게 분리되었다. 5-9-바울로는 마케도니아를 거쳐 고린토에 갈 작정이었다(3)그러나 후에 새로운 사정이 생겨 이 계획을 바꾸었던 것 같다."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라는 히브리식 말투는(고린토 후 2:12;골로사이 4:3) 에페소의 배경이 된 지방 곧 지방총독의 관할하에 있던 아시아주에 복음을 전 할 기회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그렇지만 "적대하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이란 말은 에페소에서 오래 머물게 된 이유가 아닌가도 생각된다.
국제성서주석
2장16절-누가 주를 가르칠 만큼 주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영적인 그리스도인들]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여기서 "마음"이란 말은 이사야 40장 13절 때문에 "영"대신에 쓰인 것이다.그러나 이 말은 이사야 40장13절을 똑같이 따르는 것이 아니다.히브리어성서에는"영"으로 되어 있다.70인역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더냐?..."[로마서11장 34절과 비교하라].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의 깊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참조,10절]. 4장17절-바울로의"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생활방식"은 도덕적인 표준들을 말하는 것인데,이러한 도덕적인 표준들은 가르침의 내용이 될 수 있는 어느정도 인정받는 행동 유형들로 [비교 7.17,12,31,14.33 데후2.15] 표현되었다."방식"[way]이란 말은 바울로의 유대교적이고 라삐적인 배경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참조.halakah(역주;유다교 관례법규)라는 말].그 말[방식]은 그리스어로는 도덕적인 의미가 거의 없다.이 귀절은 고린토교회가 새로운 것에 애착을 느끼고 독창성을 강요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6장9-"불탄다는 것"은 실제로 음탕한 행동들을 발산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이 단계에서 결혼하는 것이 차라리 간음하는 것보다 나음을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비록 그러한 욕망에 굴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적으로 그러한 욕망에 불탄다는 것을 뜻한다. 11절-그리스도교적 법틀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법적 방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또 바울로가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도 않았음을 시사한다.별거한다고 해서 별거 중인 배우자들를 교회에서 제명하지는 않는다.그들은 여전히 친교를 나누는 일원이며 친교의 훈련을 받는다.문제의 여자에 대해서 이 귀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그녀의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두 번째 결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페데리꼬 바르바로
디도의 뒤를 이어 디모테오도 이 곳에서 합류하였고 마케도니아에서 보낸 57년의 초여름과 가을 사이에 이 편지를 썼다.58년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어느 고사본과 페싯토에서는 편지를 쓴 장소를 더 정확하게 필립비였다고 말하고 있다.1장 8절-바울로가 이 환난을 고린토인에게 말하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해방된 자신의 감사를 그들과 함께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바울로가 암시하고 있는 아시아에서 겪은 이 환난은 에페소에서 은세공장이들의 폭동으로 나타났던 적대행위와 그것에 따른 위험전체를 가키는 것 같다.그 일 때문에 바울로는 어쩔 수 없이 에페소를 떠났다. 24절-바울로는 고린토인을 폭군처럼 지배하여 그들의 믿음을 멋대로 다룰 의도는 꿈에도 없었고 오직 그들을 영적으로 발전하도록 도와주고 무엇보다 믿음에서 솟아나온(필1,25) 미래의 행복을 보증하는 기쁨을 얻어주고 싶어 했다(롬15,13;갈5,22).바울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발전이란 보다 큰 기쁨의 충만이었다.2장13-눈물을 흘리며 쓴 편지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하여 57년 디도를 거기에(아시아의 무시야 지역) 보낸다.그리고 돌아 올 때에는 육로를 따라 마케도니아오 건너와 트로아스에 머물라고 명하였다.바울로는 거기서 디도와 만날 작정이었다.그런데 그 해 봄에 에페소에서 일어난 은장이들의 소동때문에 바울로는 갑자기 어쩔 수 없이 그 도시를 떠났다.북으로 올라가 트로아스에서 디도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만날 수 없었다. 17절-바울로는 고린토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떤 선교사들을 생각하고 있다.그 사람들은 거짓 가르침으로 복음의 가르침의 순수함을 더럽히고 그리고 타산적인 목적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이러한 사람들은 불행히도 많이 있었다.자신은 이러한 사람들과 다르며 하느님의 말씀을 파는 사람이 아니다.여기서 바울로는 집회서 26장 20절 이사야서 1장 22절에 근거를 두고 있다.3장3절-"먹"이라는 것은 그을음(검은 재)에서 만든 까만 잉크인데 이것의 사용에 대해서는 몹시 오래전부터 파피루스 등으로 된 증명이 있다. 4장 7절-"질그릇"이라는 비유는 애가 4장 2절에서 따온 것 같은데 영혼의 집인 몸을 가리키는 고전적인 비유이다.그러나 흙으로 만든 그릇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깨지기 쉬운 천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특히 인간 본질의 비참함,나약함을 가리킨다(롬 9,20-21;2딤 2,20). 8절-"찌부러지지 않고",이 사상뒤에는 씨름의 술어가 엿보인다.쓰러지고 아래에 깔릴지라도 아직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시리아말 번역에서는"찌부러지지 않고"를 "숨이 막히지 않고"라고 번역하였다.이러한 씨름에서는 상대편을 목졸라 죽이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뜻일 것이다."절망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그리스 로마의 씨름은 상대편의 두 어깨를 땅에 짓누름으로써 승패가 난다.씨름꾼에게는 상대편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손과 다리를 잡아 비튼다.적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열심히 몸을 피하지만 잡히는 데 따라서는 어쩔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궁지에 쫓긴 일이 있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16절-사실 죽음의 끊임없는 파괴작용은 "외적 인간"(7절의 질그릇과 같다)곧 몸의 생활을 파먹지만 하느님의 성령은 "내적 인간"을 "나날이 새로워지게"해 주신다(롬 12,2;골3,10;딛3,5) 5장1절-이 장막집은 "지상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흙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창 2,7) 사람을 지상에 매어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그것과 달리 "영원한 집:(마르코 14,58;골2,11;히 9,24)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하늘 나라에 세우셨고 또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온갖 변화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6장 15절-팔레스티나의 유다교에서 벨리아르라고 햐는 것은 사람을 죄로 이끌어가는 악령과 같은 것이다.그래서 벨리아르 자식들이라고 하면 죄인,악인,곧 "어둠의 자식들"을 말한다.유다의 여러가지 외전에서는 벨리아르를 악령의 두목으로 여기고 하느님께 반역한 자들의 지도자라고 한다. 7장 5절-"밖으로는 싸움을 겪었고 안으로는 두려움에 싸여 있습니다"(2,13 참조).바울로가 여기서 암시하고 있는 57년의 봄,그 계절은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외로움에 찬 폭풍이 휘몰아친 해였다.치명적인 위험과 위협을 받으며 에페소를 도망쳤다(1고 15,32)--이것은 은장이의 소동은 끝났으나--그 때 바울로는 어느 때보다도"나는 매일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 눌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11,28)라고 고백할 만큼 큰 근심에 싸여 있었다.그래서 바울로는"밖으로의 싸움"이라고 한 말 외에 "안으로의 두려움"이라고 말하였다. 6절-필립비 혹은 데살로니카에서 디도를 만난 것은 한 줄기 빛을 주었다.디도로부터 고린토교회에 대한 기다리던 소식을 받았기 때문이다. 13절-디도가 고린토를 향하여 떠났을 때 그들이 어떻게 맞아줄지 상당히 염려하고 있었다.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있었으나 고린토교회의 모든 신자들은 (2,6) 성실과 순명을 가지고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그래서 디도는 자신의 사명을 무사히 다하였고 근심을 말끔히 씻고 지금은 기뻐한다. 8장 7절-푼수대로만-힘이 닿는데까지,200주년 신약성서. 21절-의연금-헌금,200주년;연보,개역한글. 10장1절-"여러분과 대면하고 있을 때에는 유순하지만 떨어져 있을 때에는 강경하다"이것은 반대자들이 바울로에게 한 말이었던 같다.그들은 바울로가 저항할 수 있는 사람들 앞에 오면 온유하여 움추리고 있으나 멀리 떠나 있는 경우에는 무서울 것이 무엇이냐면서 우쭐거리고 있다고 말하였다. 5절-"잘못된 이론"..이 그리스말의 참 의미는 적의 계략을 가리킨다.그러나 여기서는 유다인이나 이방인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저항하기위해 사용한 "잘못된 이론"이 한 마디로 궤변을 말한다. 10절-저 집요한 반대자는 모금을 기회로 하여 바울로의 청렴을 상처입힐 새로운 비방을 퍼뜨리고 거기에다 바울로의 기질에 대하여 겁이 많다.등등 험담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말하고 알았다."그는 약하기 짝이 없고"이 말은 160년 경에 나온 <바울로와 테클라의 행전>에 근거를 두고 오래 전 어느 해석자는 바울로가 키가 작고 머리가 벗겨지고 갈지자 걸음을 걸었다고 묘사했다.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신체상의 용모가 아니고 언행의 태도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묘사는 억지춘향격인 추리에 지나지 않는다.여기서는 오히려 바울로의 심리적 태도,별로 신통치못한 말재주(11,6)를 암시하고 있다.바울로는 신자 한사람 한 사람에게 마치 어머니처럼 온화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에(1고 9,12-22).이 유순한 태도를 나약한으로 본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주장을 과대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1장4절-"어떤 사람"이라고 한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유다파 사람을 가리킨다.이 침입자들은 바울로가 한 선교와는 다른 예수님,다른 성령,다른 복음을 전하였다. 8절-노동으로 번 것만으로는 생계유지에 충분하지 못하였다.그래서 바울로는"다른 교회들이 주는 삮을 가지고"충당하였다.다른 교회란 마케도니아 교회를 가리키지만 말은 다소 과장법을 취하고 다소 야유를 띠고 있다.사실 고린토와 달리 바울로는 마케도니아교회에서 어느 만큼 경제적 도움을 받고 있었다(2고 11,9). 23절-이 수고는 선교할 때 한 노동의 고생,생계를 꾸리기 위한 노력을 가리킨다.반대자들은 그런 노동을 하지않았다. 이 편지 이전에 있었던 바울로의 감옥생활은 필립비에서 한(행 16,23)것만이 알려져 있다.후에 바울로는 예루살렘,가이사리아 그리고 로마에서 2 번 투옥되었다.그러나 로마의 클레멘스는 1세기 말에 바울로가 7 번 감옥에 투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우리로서는 다른 경우의 사정은 알 수가 없으나 아마도 세 번째 전도여행 때 에페소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된다. 24절-신명기에서는 몽둥이로 40번이상 때리지 못하게 금하였다(25,3).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잘못하여 이 수를 초과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나를 줄여 39 번 때리도록 정하였다. 26절-당시의 여행 특히 바울로가 지나 다닌 소아시아의 산악지대의 여행이란 참으로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그래서 마르코도 이런 모함적 여행을 두려워하여 몸을 피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다(행 13,13).로마의 치안이 미치지 못하였던 이 지대에는 도적이 많았고 생명의 위험이 컸다.타키투스는 35년에 다울루스 지방에 토착민의 반란이 있었으며 그 진압을 위하여 시리아 군단이 파견되었다고 기록하였다.그리고 51-53년에 걸쳐 바울로는 마침 고린토에 있었다.고마게네왕 안티오커스는 또 하나의 반란을 평정하였다.육지 쪽은 그러한 양상이었으나 바울로의 여행은 참으로 육지의 여행보다 더 큰 위험이 따랐다.해적에 대항한 싸움은 그리스 로마 역사가가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주제의 하나이다.길리기아,팜필리아,리기아는 마침 이러한 해적지의 근거지였다. 32-33절-바울로가 다마스커스에서 도망친 것은 39년 경의 일이며 당시 다마스커스는 나바데 왕 아레다의 지배하에 있었고 총독이라고 하였으나 경찰의 장관과 같은 사람이다.유다인은 이 총독으로부터 바울로의 체포허가를 받았다(행9,24).이런 책략을 알게된 바울로는 성벽에서 광주리에 담겨져 도시를 빠져 나갔다.옛 도시의 발굴작업으로 말미암아 증명되고 있는 것처럼 집의 들창문이 경사진 성벽에 있었으므로 그것을 이용하여 도망쳤다. 12장2절-이 영상은 지금의 편지를 쓸 때부터 헤아려 14년 전의 일이다.곧 43년 경 일이었는데 당시 바울로는 회개한지 7년이 되었고 다르소에서 사사로운 생활을 하거나 혹은 안티오키아 교회에 옮겨갔을 초기의 일이었다(행13,2). 13장 7절-낙제생-자격없는자,200주년;버림받은자,개역한글.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장24절-그의 동기는 자신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었다.그의 본래의 동기를 성취시킨다는 것은 슬픔과 매를 가지고 그들에게 나아감을 의미할 것이다[참조 고전4.21].그러나 그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방문을 연기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회개를 하고 사태를 수습할 좀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이러한 것은 연약의 표시는 아니다....사도는 분명히 자신의 진술을 아무리 좋게 이야기된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고린도에서 나쁘게 나타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잘못 해석될 소지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의식하였으므로 그가 가지 않은 이유는 고린도 교인을 아끼기 위해서라고 말한 다음 즉시 이러한 설명에 대한 그의 비방자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품위를 손상시키는 악용에 대해 대처할 필요를 느낀다.이들 비방자들은 그가 그들을 아끼기를 원한다는 말로부터 그가 그들의 신앙에 대한 주권 또는 전제권을 행사하려고 한다고 추론할 것이었다.즉 용서하는 그는 또한 자신의 임의적인 결정에 따라서 처벌하고 처리하는 주인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신앙적인 면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주관하려는 뜻은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4장7절-바울은 등잔보다는 흙으로 만든 항아리나 단지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가장 귀중한 보배들을 천하고 무가치한 용기에 숨겨 두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로마의 승전 행진에 있어서도 금과 은을 질그릇에 넣어 운반하는 것이 관례였다.그리하여 플루타크는 B.C.167년 마케도니아 전투에서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에서 3천명의 남자들이 은화가 담긴 750개의 질그릇을 운반하는 마차를 호위하는 경위를 묘사하고 있다.그런데 각 질그릇에는 3천 달란트 가치의 보화가 들어 있었고 네 명이 들어서 운반할 수 있었다고 한다.바울은 이미 로마가 슬리를 거두고 행하는 승전 행진의 장관으로부터 생생한 비유를 빌려 오기를 즐겨하였음을 보여 주었다[2.14,고전4.9을 보라].그리고 본문에서의 그의 의도는 그리스도 곧 자신의 부요함을 자신의 인간 추종자들의 보잘것없는 질그릇에 맡긴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제안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10장10절-본문에서 바울은 몸으로 대할 때라는 언급은 비꼬는 말일 수는 있을지라도 그의 육체적인 모습을 가리키기 위해 의도되었을 것 같지 않다.그보다는 이 비난은 도덕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고 따라서 어떤 육체적인 장애를 조롱한 것보다,그가 주장한 권위에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이 세상의 겉모습에 따라 사물을 판단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바울의 대적자들은 온유함을 연약함으로,관용을 비겁으로,상냥함을 우유부단으로 해석하였다[참조,1절,11.21].최소한 그들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게 부추겼다.또한 그들은 바울의 "언변"을 헐뜯으려 하였다.인간의 지혜 및 웅변 자체를 위한 웅변에 대한 헬라인들의 존경은 고린도에 있는 그의 중상자로 하여금 비교적 용아하게 공중앞에서 말할 때의 바울의 비전문적인 태도를 비난하게 하였다.즉 그의 언변은 현학적衒學的인 웅변가의 세련된 언어구시와 기교에 의한 언변과는 달리 윤색이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바울은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귀만을 매료시키는 겉치례에는 관심이 없었고 구원의 진리를 전달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그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웅변가의 기교와 책략을 단호하게 기피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고전 2.1-5,11.6]. 청중의 주의를 흩뜨리거나 자신의 메시지의 힘있는 진리를 흐리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안에서" 서도록 하는 것이다. 12장2절- 14년 전 즉 A.D 44년경에 일어났다.하늘의 단계들을 말하는 7층천에 대한 신앙은 랍비들의 가르침 및 조로아스터교에서 발견된다.그러나 이 개념이 바울 시대에 지배적이었느냐 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여러 증거들을 감안할 때 가장 타당한 결론은 구약과 신약에 퍼져 있는 하늘들에 대한 개념[비록 바울은 삼층천과 낙원만을 말하고 있기는 하나 바울의 저작까지 포함하여]은 칠층천의 개념이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같은 하늘의 수효에 대하여 언급한 곳은 없다.게다가 이레니우스가 오래전에 지적하였듯이 바울은 "자신이 삼층천에 올라갔다는 것은 대단하고 굉장한 것으로 기술하였다."만일 그가 올라간 하늘 위에 네 개의 하늘들이 더 남아 있었다면 그는 결코 그런 식으로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4절-"낙원"과 "세째 하늘"이 동의어라는 것은 데오도레트,어거스틴,어퀴나스,에스티우스,하지,바흐만,빈디쉬,태스커,그리고 대부분의 현재 주석가들,그리고 또한 스웨트와 찰스의 견해이다.외경 "모세의 묵시록"과 때로는 랍비 문헌에서 이 두 장소를 나타내는 용어는 서로 구별 없이 사용된다.이 구절에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기 전에 성경 및 기독교의 기원,최초의 몇 세기 동안 "낙원"이라는 용어에 부여된 의미를 고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이 용어 자체는 "울타리로 둘러막은 땅"을 의미하며 그 까닭에 즐거운 정원 또는 공원을 의미하며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구약성경 70인역에서는 이 용어가 "에덴 동산"이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 유의하여야 한다.신약에서 이 용어는 세 번만 나타난다.:[1]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는 강도에게 확신시켜주시는 누가복음 23.43,"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2] 현재 우리가 다루는 본문. [3] 요한계시록 2.7,"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현재 우리가 다루는 본문과 요한계시록 2.7은"하늘의"낙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후자에 언급된 생명나무는,인간이 죄 때문에 잃어버렸던 본래의 낙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인류에게 모든 축복이 회복될 하늘 낙원을 연결시켜 주고 있음이 분명하다[참조,계 22.1 이하].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후서 12.4의 낙원이 요한계시록 2.7의 낙원과 동일한 낙원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그렇다면 누가복음 23.43의 낙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리스도가 회개한 도적에게 말씀하신 낙원이 본문의 낙원과 요한계시록 2.7절의 낙원과 동일하다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 주님이 하데스로 내려 가셨다면 그것은 그의 나팔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의인들의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하여,그리고 그들을 십자가에서의 그의 정복을 통하여 그들을 위하여 확보된 하늘 낙원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였다. 회개한 도적이 죽는 날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게 된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죽음 후에 신자들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임재를 누리게 되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빌 1.23,물론 이 문맥에서 "올라가다" "내려가다"와 같은 용어들은 지리적 용어라기보다는 비문법적인 상징적 용어임을 기억해야 한다.
국제성서주석
6장15절-벨리알이 히브리어 "쓸모없는 자식들",즉 "악한 사람들"을 번역한 것인데 이 히브리어는 가끔 사용되는 말이며 음역되기 보다는 대개는 번역되었다.벨리알은 [변형들과 함께] 성서이후의 유다 교회에서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발전되었다.사해사본들에서는 벨리알이라는 말이 악마의 왕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예가 상당히 많이 나타나고 있음은 사실이다. 벨리알은 결국에는 사탄과 동일시되었고,후기 묵시문학[이사야의 승천]에서는 이 두 이름이 서로 바뀌어 사용될 수 있었다.따라서 벨리알은 신약성서에서는 단순히 사탄의 동의어가 되었다. 10장1절-아마도 바울로은 질병에 시달렸던 것 같다.그러나 여기서 "약한"의 의미는 "인상적이지 않은"이다.그의 경쟁자들과는 달리 그는 위압적인 행동이나 혹은 말로 자신을 교회에 드러낼 줄 몰랐다. 혹은 그것을 알았다고 해도 그는 그러한 술수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이것은 영감을 받은 말이나 혹은 인상적인 말을 함으로써,환상의 영기靈氣를 보임으로써,그리고 사도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부과함으로써 성령의 증거와 사도됨의 증거를 보여야한다는 사람들에게서 바울로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다.바울로는 자신을 종이라고 말했으며[4,5] 보수를 요구하지도,받지도 않았다[11.7~11,12.13:비교 고전9.12,18].그리고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인간의 지혜를 포기했다[고전 2.1~5]. 고린토 사람들과 바울로의 교회에 침입한 경쟁적인 사도들에게 있어서는 위압적인 성격이나 멋진 말을 할 줄 아는 것이 일반적으로 매우 중요한 평가기준이었다. 12장2~3-'그리고 이 사람들이 나를데려다가 둘째 하늘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내게 지상의 어둠보다 훨씬 더 어두운 어둠을 보여 주었다....'[제2에녹서 vii.I : 8장에서 에녹은 계속해서 세째 하늘로 가며,9장에서는 네째 하늘로,18장에서는 다섯째 하늘로,그리고 계속해서 열째 하늘로 간다].'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나를 데려다가 첫째 하늘로 인도했다.그리고 내게...을 보여주었다'[제3바룩서 ii.2,이렇게 계속해서 다섯째 하늘에까지 인도된다].....바울로가 여기서"세번째"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가 단지 세 개[다섯이나 일곱,열,혹은 다른 어떤 수의 하늘이 있다고 믿지 않고] 의 하늘이 있다고 믿었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비록 그의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세 개의 하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말이다....'셋이라는 숫자는 가장 높고 가장 완전한 것을 나타내는 완전수로 쓰였다'는 칼빈의 견해가 옳을 것이다....제2에녹서 8장에서는 낙원이 세째 하늘에 있는 것으로 말한다.모세의 묵시록 37장 5절에서는 하느님은 미카엘에게 말한다.'그 [죽은 아담]를 세번째 하늘의 낙원으로 들어 올리라.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심판할 그 두려운 날까지 그를 거기에 내버려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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