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영화세상

2010년 4월 10일 토요일

ROMANS,GOOD NEWS

[로마서 성경주석] 1장17절'믿음에서 믿음으로'에 대한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국제비평주석,로마서1(로고스 1994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은 많은 다른 방식들로 이해되어 왔다.

예컨데 다음과 같은 의미들로 이해된 것이다.

즉'구약성서의 믿음에까지'(테르툴리아누스,오리게네스)

'설교자들의 믿음으로 부터 청중의 믿음에까지'또는

'율법의 믿음으로부터 청중의 믿음에까지'(아우구스티누스),

'한 신조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다른 신조에 대한 믿음에까지'(아퀴나스),

'현재의 믿음으로부터 미래의 믿음에까지'(아퀴나스가 언급한 또다른 해석),

'말들의 믿음으로부터(우리가 지금 보고 있지 않은 것을 지금 믿는 경우,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의 신실성으로부터 인간의 믿음에까지'(암브로시아스터,바르트,맨슨),또는

믿음의 성장을 가리키는 말씀으로서(바르바로,칼빈,카톨릭의 일반적인 견해)...이해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1장18절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뉴 인터내셔널 성서주석,로마서(생명의 말씀사,1979년)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형벌적 정의(定義)이다.

그것은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결의이다.

사람 속의 분노는 상대방의 악에게 고통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은 성경에 편만되어 있는 진리와 일치하게

하나님의 심정의 침착하고도 정확한 목적에 적용된다.

하나님의 심정에 품고 있는 목적은

하나님의 물리적 또는 도덕적 통치상의 어떤 다른 법칙이 작용하는

동일한 일반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죄와 비극간의 관계를 확보하자는 것이다.(찰스핫지)

칼빈의 논평에서도 이것이 인정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견해도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2장8절,'당을 짓는 사람들'에 관한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국제비평주석,로마서(로고스 1994년)

RV에서 그것은'faction'(당파)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당파를 짓는 사람들에게'

(unto them that are factious)로 번역되어 있다.

바레트는 이 번역어가 '싸움'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정하기'때문에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AV의역'unto them that are contentious'(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로 번역]...

RV의 번역자들은 이 단어가 아리스토텔레스,pol 1302b4와1303d14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단어는 거기서 정치운동을 하러 돌아다니는 것,

즉 음모를 꾸미는 일을 가리켜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음모를 꾸미는 일은 당파를 만드는 일을 의미했다.

따라서 RV의 번역문은 이 단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법에 기초해서 작성될수 있는 것이다.만약 이것이 옳다면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진리에 불순종하고 자신을 불의에 내어주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반대하는 당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아리스텔레스에서 사용된 의미의

연장일 수도 있는 더욱 일반적인 의미,즉'자기추구의'또는

'이기심이 많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RV의 번역을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3장3-8절,21절의 표준적 성경번역 選 성경주해



3 그런데 어떤 유다인들이 신의를 저버렸다고 합시다.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신의를 저버리시겠습니까?

4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세상 모든 사람이 거짓말장이라 하더라도

하느님만은 언제나 진실하십니다.

성서에서도,"당신의 말씀에는 언제나 정의가 드러나고

재판을 받으시면 반드시 이기십니다."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5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느님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는 말이지

6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겠습니까?

7 또"나의 영광에 오히려 하나님의 진실을 더욱 드러내고

하느님의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죄인으로 단정함을 받아야 하느냐?"하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8 그뿐아니라"아예 선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하는 말이

나옴직도 합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인간을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공동번역개정판]

한글개역개정판은 5,7절의 '그러나'와 8절의 '또는 그러면'을 생략하고

21절에서'그러나'를 첨가한다면 문장이해가 쉽게될 것 같다.


[로마서 성경주석] 3장19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국제비평주석,로마서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하려 함이니라"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결과를 나타내는 부사절로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목적절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즉,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하나의 목적은 모두 사람의 입을...)....바울이 율법아래 있는 자들란 말로써 유대인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못된다.바울의 생각은 유대인들(자기 자신을 예외적인 인물들로서 간주할 이유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사람들)도 사실상 전혀 예외는 아니라는 증거와 더불어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아래에 놓여 있다는 증거가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만일 유대인들이 성서에 의해 죄아래 있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면(죄아래)있지 않은 이방인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로마서 성경주석] 4장13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아브라함이 세상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그나 그의 후손에게 주어진 것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의로움을 통해서였습니다".

[200주년신약성서주해의 본문,NAV]



"It was not through law that Abraham and his offspring recieved the promise that he wouid be heir of the world,

but the rightousness that comes by faith".[NIV]


[로마서 성경주석] 4장17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국제비평주석 로마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바울은 아브라함의 육신과 사라의 자궁을 되살려서 잉태케 해주신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문의 대를 잇는다는 견지에서 볼때 그들은 죽은 자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또 그는 창세기22장에 진술된 이삭의 생명을 살린 이야기를 생각했을 수도 있으며(참조 히11:19)예수의 부활사건을 배경에 깔고 있음은 매우 확실하다.

(참조.24절과25절)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라(새번역-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하나님>; 공동번역-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하느님>).이것은 하나님의무로부터의 창조를 가리키고 있음은 거의 확실하다.샌디와 헤들람은 네가지 제시된 해석들을 열거해 주고 있다.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1)'존재없는 것들을 마치 존재했던 것인양 명명하시는<하나님>;(2)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도록 부르시는<하나님>;(3)'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들에게 마치 그것들이 존재했던 것인양 직접 소환장을 바랭하시는<하나님>;(4)'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마치 존재했던 것인양(생명과 구원에로)부르시는<하나님>.샌디와 헤들람이 마지막(4)를 문맥과 상관없는 것으로서 기각시킨 것은 옳은 일이다.그러나 (1)이나(3)은 전혀 확실치 않다.샌디와 헤들람은 그 둘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들은(3)을 더선호하며'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에게<그당시 그가 소환장을 발행했던 것처럼>소환장을 발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이 단어들을 표현하고 있다].

페테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나이였는데,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와 같았던 두 사람에게 아들을 얻게 하셨다."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하느님께서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나라 사람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부르실 것을 암시하셨던 것이다.

200주년신약성서주해의 본문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존재하지 않은 것들을 존재로 부르시는 하느님"이라고 번역하고난외주로 마카베오후서 7:23,28-29;고린도전서1:28을 참조하라고 되어 있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0절의 표준적번역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의 본문



'우리가(하느님의)원수였을 때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화해를 얻었다면,

하물며 우리가 화해한 지금 그분의 생명에 의해 더욱더 확실히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성구에서 '당신'의 문자적의미는 물론'그분의'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여기서 '그' '그의'라는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예수님,예수께서,예수그리스도께서,예수님을 믿읍시다와

예수가,예수그리스도가,예수믿읍시다,예수를 믿읍시다라는 표현은

너무나 느낌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2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그러므로' 또는 '이러므로'의 표현은 공동번역개정판이나

카톨릭새번역같이 생략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러운 것 같다.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카톨릭 새번역의 주석]



가. 라틴계 교부들,그리고 루터도 아담이 죄를 지은 그 행의 안에 모든 인간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포함되었다고 본다.(그래서 대중라틴말성서는'아담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다.'라는 식으로까지 번역한다).

이러한 해석의 방향에서는,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죽음이라는 유산을

자기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고,또는 인류의 모든 죄가 이미 아담의

불순종안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이해하게 된다.

나. 일부 그리스계 교부,많은 카톨릭주석가,그리고 칼뱅을 비롯한

많은 프로스탄트 주석가들은,바오로가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지은 죄를 가리키고 있다고 판단한다.바로 이러한 죄를

통하여,아담이 이 세상에 끌어들인 죄의 위력이 죽음이라는 그 열매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아무튼 이 말마디는 12-18절의 문맥과 마찬가지로,아담의범죄와

각 사람의 개인적인 죄사이의 연대성을 전제로 한다.

(카톨릭 새번역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의 견해는 하나의 범주안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굳이 우선 순위를 택한다면,

개인적으로 라틴계 교부들과 루터의 견해를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3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페떼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

유다인의 입장에서 인류의 역사를 본 바울로는"율법을 주시기 전에도"곧 모세의 율법이 제정되기 전에도"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하고

말하지만,"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죄가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뿐"이다.곧 율법이 없어서 죄를 지우지 않은 것이라면, 어떠한 율법을 근거로 하여 죄가 인간에게 돌아 갔는지 마땅히 의문으로 생각될 것이다.주목해야 할 것은 죽음의 원인이 되는 "죄"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12절에서"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한 그 죄이다.그렇다면 아직,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율법을 근거로 하여

죄를 인간에게 돌렸던 것은 아니지만,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자연법(2:12)에 근거를 둔 것도 아니다.왜냐하면 자연법은 여러 가지

죄를 금하고 있다고 하지만-이것은 중요한 곳인데-위반하는 자를

죽음으로써 벌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새번역의 주석

일부학자들은 13-14절이 12절의"모두 죄를 지었으므로"라는 말을

설명한다고 여긴다.바오로는 법적 관점에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아담에서 모세까지 이르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죄인이기는

하였지만,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 각자에게 적용되는 무슨 법에

따라 죽음의 벌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때문이 아니라 아담의 죄때문에

죽음의 운명을 겪었다는 것이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5,16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카톨릭 새번역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다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6 그리고 이 선물의 경우도 그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경우와

다릅니다.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왔지만,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도 좋지만 문맥상'그렇지만'으로 번역하는 것이

좀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렇지만'은 '또(다른) 한편으로', '또한'으로

번역할수 있다고 본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9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9절은 18절을 확증하고 설명하는 귀절이다.이 사실은 19절의

문장 구문 및 내용으로 보아서도 분명하거니와 그것들이 관계하고 있는

방식으로 보아서도 분명하다.19절은 "왜냐하면"(for)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NASV: 19. For as through the man's disobedience the many were made sinners,even so through the obedience of the One     man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NIV: 19.For just as through the disobedience of the the one     man the many were made sinners,so also through the obedience of one     man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NAV:19. For just as through the disobedience of one     person the many were made sinners,so through the obedience of one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로마서 성경주석] 1장17절'믿음에서 믿음으로'에 대한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국제비평주석,로마서1(로고스 1994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은 많은 다른 방식들로 이해되어 왔다.

예컨데 다음과 같은 의미들로 이해된 것이다.

즉'구약성서의 믿음에까지'(테르툴리아누스,오리게네스)

'설교자들의 믿음으로 부터 청중의 믿음에까지'또는

'율법의 믿음으로부터 청중의 믿음에까지'(아우구스티누스),

'한 신조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다른 신조에 대한 믿음에까지'(아퀴나스),

'현재의 믿음으로부터 미래의 믿음에까지'(아퀴나스가 언급한 또다른 해석),

'말들의 믿음으로부터(우리가 지금 보고 있지 않은 것을 지금 믿는 경우,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의 신실성으로부터 인간의 믿음에까지'(암브로시아스터,바르트,맨슨),또는

믿음의 성장을 가리키는 말씀으로서(바르바로,칼빈,카톨릭의 일반적인 견해)...이해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1장18절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뉴 인터내셔널 성서주석,로마서(생명의 말씀사,1979년)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형벌적 정의(定義)이다.

그것은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결의이다.

사람 속의 분노는 상대방의 악에게 고통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은 성경에 편만되어 있는 진리와 일치하게

하나님의 심정의 침착하고도 정확한 목적에 적용된다.

하나님의 심정에 품고 있는 목적은

하나님의 물리적 또는 도덕적 통치상의 어떤 다른 법칙이 작용하는

동일한 일반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죄와 비극간의 관계를 확보하자는 것이다.(찰스핫지)

칼빈의 논평에서도 이것이 인정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견해도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2장8절,'당을 짓는 사람들'에 관한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국제비평주석,로마서(로고스 1994년)

RV에서 그것은'faction'(당파)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당파를 짓는 사람들에게'

(unto them that are factious)로 번역되어 있다.

바레트는 이 번역어가 '싸움'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정하기'때문에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AV의역'unto them that are contentious'(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로 번역]...

RV의 번역자들은 이 단어가 아리스토텔레스,pol 1302b4와1303d14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단어는 거기서 정치운동을 하러 돌아다니는 것,

즉 음모를 꾸미는 일을 가리켜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음모를 꾸미는 일은 당파를 만드는 일을 의미했다.

따라서 RV의 번역문은 이 단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법에 기초해서 작성될수 있는 것이다.만약 이것이 옳다면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진리에 불순종하고 자신을 불의에 내어주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반대하는 당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아리스텔레스에서 사용된 의미의

연장일 수도 있는 더욱 일반적인 의미,즉'자기추구의'또는

'이기심이 많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RV의 번역을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3장3-8절,21절의 표준적 성경번역 選 성경주해



3 그런데 어떤 유다인들이 신의를 저버렸다고 합시다.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신의를 저버리시겠습니까?

4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세상 모든 사람이 거짓말장이라 하더라도

하느님만은 언제나 진실하십니다.

성서에서도,"당신의 말씀에는 언제나 정의가 드러나고

재판을 받으시면 반드시 이기십니다."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5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느님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는 말이지

6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겠습니까?

7 또"나의 영광에 오히려 하나님의 진실을 더욱 드러내고

하느님의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죄인으로 단정함을 받아야 하느냐?"하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8 그뿐아니라"아예 선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하는 말이

나옴직도 합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인간을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공동번역개정판]

한글개역개정판은 5,7절의 '그러나'와 8절의 '또는 그러면'을 생략하고

21절에서'그러나'를 첨가한다면 문장이해가 쉽게될 것 같다.


[로마서 성경주석] 3장19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국제비평주석,로마서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하려 함이니라"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결과를 나타내는 부사절로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목적절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즉,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하나의 목적은 모두 사람의 입을...)....바울이 율법아래 있는 자들란 말로써 유대인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못된다.바울의 생각은 유대인들(자기 자신을 예외적인 인물들로서 간주할 이유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사람들)도 사실상 전혀 예외는 아니라는 증거와 더불어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아래에 놓여 있다는 증거가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만일 유대인들이 성서에 의해 죄아래 있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면(죄아래)있지 않은 이방인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로마서 성경주석] 4장13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아브라함이 세상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그나 그의 후손에게 주어진 것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의로움을 통해서였습니다".

[200주년신약성서주해의 본문,NAV]



"It was not through law that Abraham and his offspring recieved the promise that he wouid be heir of the world,

but the rightousness that comes by faith".[NIV]


[로마서 성경주석] 4장17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국제비평주석 로마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바울은 아브라함의 육신과 사라의 자궁을 되살려서 잉태케 해주신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문의 대를 잇는다는 견지에서 볼때 그들은 죽은 자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또 그는 창세기22장에 진술된 이삭의 생명을 살린 이야기를 생각했을 수도 있으며(참조 히11:19)예수의 부활사건을 배경에 깔고 있음은 매우 확실하다.

(참조.24절과25절)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라(새번역-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하나님>; 공동번역-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하느님>).이것은 하나님의무로부터의 창조를 가리키고 있음은 거의 확실하다.샌디와 헤들람은 네가지 제시된 해석들을 열거해 주고 있다.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1)'존재없는 것들을 마치 존재했던 것인양 명명하시는<하나님>;(2)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도록 부르시는<하나님>;(3)'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들에게 마치 그것들이 존재했던 것인양 직접 소환장을 바랭하시는<하나님>;(4)'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마치 존재했던 것인양(생명과 구원에로)부르시는<하나님>.샌디와 헤들람이 마지막(4)를 문맥과 상관없는 것으로서 기각시킨 것은 옳은 일이다.그러나 (1)이나(3)은 전혀 확실치 않다.샌디와 헤들람은 그 둘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들은(3)을 더선호하며'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에게<그당시 그가 소환장을 발행했던 것처럼>소환장을 발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이 단어들을 표현하고 있다].

페테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나이였는데,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와 같았던 두 사람에게 아들을 얻게 하셨다."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하느님께서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나라 사람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부르실 것을 암시하셨던 것이다.

200주년신약성서주해의 본문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존재하지 않은 것들을 존재로 부르시는 하느님"이라고 번역하고난외주로 마카베오후서 7:23,28-29;고린도전서1:28을 참조하라고 되어 있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0절의 표준적번역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의 본문



'우리가(하느님의)원수였을 때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화해를 얻었다면,

하물며 우리가 화해한 지금 그분의 생명에 의해 더욱더 확실히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성구에서 '당신'의 문자적의미는 물론'그분의'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여기서 '그' '그의'라는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예수님,예수께서,예수그리스도께서,예수님을 믿읍시다와

예수가,예수그리스도가,예수믿읍시다,예수를 믿읍시다라는 표현은

너무나 느낌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2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그러므로' 또는 '이러므로'의 표현은 공동번역개정판이나

카톨릭새번역같이 생략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러운 것 같다.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카톨릭 새번역의 주석]



가. 라틴계 교부들,그리고 루터도 아담이 죄를 지은 그 행의 안에 모든 인간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포함되었다고 본다.(그래서 대중라틴말성서는'아담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다.'라는 식으로까지 번역한다).

이러한 해석의 방향에서는,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죽음이라는 유산을

자기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고,또는 인류의 모든 죄가 이미 아담의

불순종안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이해하게 된다.

나. 일부 그리스계 교부,많은 카톨릭주석가,그리고 칼뱅을 비롯한

많은 프로스탄트 주석가들은,바오로가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지은 죄를 가리키고 있다고 판단한다.바로 이러한 죄를

통하여,아담이 이 세상에 끌어들인 죄의 위력이 죽음이라는 그 열매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아무튼 이 말마디는 12-18절의 문맥과 마찬가지로,아담의범죄와

각 사람의 개인적인 죄사이의 연대성을 전제로 한다.

(카톨릭 새번역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의 견해는 하나의 범주안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굳이 우선 순위를 택한다면,

개인적으로 라틴계 교부들과 루터의 견해를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3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페떼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

유다인의 입장에서 인류의 역사를 본 바울로는"율법을 주시기 전에도"곧 모세의 율법이 제정되기 전에도"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하고

말하지만,"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죄가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뿐"이다.곧 율법이 없어서 죄를 지우지 않은 것이라면, 어떠한 율법을 근거로 하여 죄가 인간에게 돌아 갔는지 마땅히 의문으로 생각될 것이다.주목해야 할 것은 죽음의 원인이 되는 "죄"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12절에서"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한 그 죄이다.그렇다면 아직,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율법을 근거로 하여

죄를 인간에게 돌렸던 것은 아니지만,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자연법(2:12)에 근거를 둔 것도 아니다.왜냐하면 자연법은 여러 가지

죄를 금하고 있다고 하지만-이것은 중요한 곳인데-위반하는 자를

죽음으로써 벌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새번역의 주석

일부학자들은 13-14절이 12절의"모두 죄를 지었으므로"라는 말을

설명한다고 여긴다.바오로는 법적 관점에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아담에서 모세까지 이르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죄인이기는

하였지만,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 각자에게 적용되는 무슨 법에

따라 죽음의 벌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때문이 아니라 아담의 죄때문에

죽음의 운명을 겪었다는 것이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5,16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카톨릭 새번역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다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6 그리고 이 선물의 경우도 그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경우와

다릅니다.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왔지만,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도 좋지만 문맥상'그렇지만'으로 번역하는 것이

좀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렇지만'은 '또(다른) 한편으로', '또한'으로

번역할수 있다고 본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9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9절은 18절을 확증하고 설명하는 귀절이다.이 사실은 19절의

문장 구문 및 내용으로 보아서도 분명하거니와 그것들이 관계하고 있는

방식으로 보아서도 분명하다.19절은 "왜냐하면"(for)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NASV: 19. For as through the man's disobedience the many were made sinners,even so through the obedience of the One     man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NIV: 19.For just as through the disobedience of the the one     man the many were made sinners,so also through the obedience of one     man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NAV:19. For just as through the disobedience of one     person the many were made sinners,so through the obedience of one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로마서 성경주석] 11장9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국제비평주석

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원래의 비유적 표현은 다양하게 해석되었는 데 예를 들면,축연이 베풀어졌을 때 만일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이 갑자기 위험물 가까이에 있을 때 그들의 발을 얽히게 할 수 있는 유목민들에 의해 땅에 깔려진(짐승의)가죽과 의복과 관련하여 해석되었으며,음식을 준비한 사람들이 특정한 개인들로 하여금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안되도록 그들을 위해 준비된 독이 든 요리와 관련하여 해석하였다. 그러한 단어들에 관한 바울의 사용을 고려하여 볼 때 샌데이와 헤들람이 제안한 것과 같은 그러한 설명의 해석('자신들이 믿는 율법과 율법서가 타락의 원인이 되었으며,또한 그런 것들이 자신들을 걸리게한 그물과 수렵용 망으로 되어버린 유대인들과 마찬가지이다')...과 같은 설명의 해석을 바울의 것으로 보기보다는 신적 완악함을 암시하는 일반적 방식으로 그러한 단어들을 바울이 단순하게 이해하였다고 추정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이러한 교회는 첨단과학수사를 통하여 반드시 척결되야 한다.

[로마서 성경주석]11장11,12,15절의 표준적인 번역과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11 그래서 나는 묻습니다.그들은 쓰러지기 위해 걸려넘어졌다는 말입니까?(21)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오히려 그들의 범행때문에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왔습니다.이는 그들을 질투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2 그러나 그들의 범행이 세상의 부가 되고,그들의 감손이(24) 이방인들의 부(가 되었다면)그들이 선택받은 이들의 충만한 수에 다다르는 것은 얼마나 더 대단하겠습니까? 15 그 이유로는 그들의 배척이 세상의 화해(를 뜻했다면)그들의 받아들임은 죽은 자들로부터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32)

(21)하느님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다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다면 그들을 저버리셨는가?하느님은 그들이 결정적으로 파멸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그들은 하느님의 선택에서 결정적으로 제외되지 않았다.하느님은 그들의 잘못을 신비스럽게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24)"감손"이라는 그리스어는"적다,약하다,열등하다,패배하다"를 뜻한다.이 말은 "배척"(15절)이라는 말과 병행되고 "충만한 수"(25절)와"온 이스라엘"(26절)에 대조된다.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다인들은 불신앙 때문에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수에서 탈락된 자들이다. (32)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 들이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몇이라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바울로의 기대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받아들여 이러한 새 생활을 주실 것을 가리킨다.


[로마서 성경주석] 11장26절의 "온 이스라엘"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이 귀절에서 말하고 있는"이스라엘"에게는 본장 전체를 통해 이 말에 속하던 의미를 그대로 적용해야지, 만약 그것과 다른 의미를 적용한다는 것은 주석적으로 불가능하다.이 사실은 본 서신의 이 부분에 나타난 문맥이나 유사한 문맥 양자로 보아서 분명한 일이다.앞의 주석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간의 대조를 말해왔던 것이다.그런데 이 귀절에 와서는 이스라엘을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가? 바울이 말한 것은 인종적으로 본 이스라엘이다.이 이스라엘 속에는 이방인은 포함될 수 없다.이 점에 있어서 앞의 귀절은 불합리하지 않은 것이다.26절은 상호 유비적 또는 상호관련적 진술이기 때문에,"이스라엘"의 의미는 25절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여기 '이스라엘'을 25절의'이스라엘'과 다른 의미로 주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F.F.Bruce").칼빈이 한 것처럼 갈라디아서 6:16절에 호소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이 문단에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사이의 대조가 계속 있었다.갈라디아서 6:16절의 문맥에서는 그러한 대조가 없다.]....25절의 주요논제는 이스라엘의 완악이 그치고 그들이 회복될 것이라는 점이다.이것은 12절에서는 이스라엘의"충만함",15절에서는"받아들이는 것".23,24절에서는 또다시 접붙임이라고 부르는 여러 사실들을 다른 표현으로 확증하고 주장하는 것이다."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최절정적 진술을 이상에서 말하는 대로 분명한 사실 이외에 달리 해석한다는 것은 주석상의 무리이다.....그것은 종말에 가서 모든 이스라엘이 다 회심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다음과 같은 유추로 보아서도 이런 주장은 반대되고 있다.이스라엘의 배교,그들의 범죄,그들의 실패,버림,완악은 전체적인 것이 아니었다.언제나 남은 자는 있었다.가지 모두가 꺾이움을 당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완악은 부분적이었다.마찬가지로 회복과 구원도 모든 이스라엘을 모두 다 포함시킬 필요는 없다."온 이스라엘"은 다수를 가리킨다.그것은 이 장 전체를 따라 나타나고 있는 형태와 일치되는 전체로서의 국민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모든은 그 말의 적절한 의미에서 다루어야만 한다.'전체로서의 이스라엘,한 국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이다.그것은 필연적으로 모든 개개 이스라엘을 포함하는 것으로 본 것은 아니다. Cf.왕상12:1....대하12:1....단9:11."(샌데이와 헤들람)]


[로마서 성서주해] 12장1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200주년 신약성서주석은 '이성적'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예배니라.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사도는"몸"이라는 말을 온 인격을 대표하는 데에 쓰고 있으며 따라서 그 의미는"너희 온 인격을 드려라"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어 온 터이다.....희랍철학에서는 몸에 대한 과소평가가 있었다.윤리적 이상은 몸과 몸의 타락적 세력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몸에 대한 이와같은 견해는 성경의 전반적인 증거와 모순된다.몸은 처음부터 인간의 인격 속에 하나의 완전한 요소이다(참고.창2:7,21-23).몸의 분해는 죄의 삯이며,그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다(참고.창2:17;3:19;롬5:12)구속의 완성은 몸의 부활을 기다린다(참고.롬8:23;고전15:54-56;빌3:21).그러므로 성화도 몸을 그것의 범위대로 가져와야만 한다.이런 종류의 권고를 해야 할 필요성은 몸에 대한 과소평가 때문임은 물론이거니와,몸과 밀접히 관련된 몸의 방종이 너무나 유행하고 득세하여 윤리적 요구의 평가에서 매우 동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산"이란 말이 이 제사의 영구성을 반영하고 있다.그것은 계속적인 헌신이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여기 사용된 말은 신약에서 보통"신령항"(Spiritual)이란 말로 해석되는 그런 용어가 아니다.합당한 또는 합리적이란 말이 보다 문자적 의미이다. 즉 그것은 성령의 지시에 따라 드린 제사이다.(참고.벧전2:5).그러나 바울이 다른 곳에서는 결코 사용하지 아니했고,오직 신약에서 기타 한 곳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이 분명한 용어를 쓰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노라고 했다.(벧전2:2).여기서 말한 예배는 경배적 예배이다.사도는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특징짓는다.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정신과 이성과 지성을 열거하고 있다는사실로 보아 하나님께 합당한 성질을 이끌어 오고 있는 예배이기 때문이다.이 예배는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것과는 대조적인 합리적인 예배이다.우리의 신체적 기능속의 상당수는 우리의 결의를 지원하지 않는다.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경배적 예배는 지적인 결의를 강요한다.우리가"합리적"이란 말에서 유도해 낼 수 있는 교훈은 이런 것이니,곧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전적으로 의식적,지성적 그리고 성별된 헌신으로 바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결코 성서적 의미에서 본"신령한"이란 말을 우리 몸에 대해서는 쓸 수 없다는 사실이다.더우기,이런 표현은 기계적인 형식주의와는 정면으로 반대된다.그리하여 예배는 H.P.Liddon이 말한 것 같이"유대교와 이교도 종파의 외부형식적 예식과는"대조를 이룬다.어떤 경우이든간에,문제의 이 용어는 우리의 몸과 몸이 드리는 예배가 특이하게도 합리적 반응적인 존재자들인 우리들과 어떻게 관련되고 있느냐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성서주해] 12장3-8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믿음"이란 말은 믿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서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즉 복음의 진리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참고.갈1:23; 딤전5:8; 유다서 3절).이것은 개개 신자들에게 어느 정도로 주어진 물건으로 생각되어질 수는 없다.그런즉 여기"믿음"은 신자에 의해 역사되어지는 믿음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믿음의 분량"은 마치 믿음이 부분으로 나뉘어질 수 있어서 몫으로 측량이나 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믿음의 분량"은 믿음이 그리스도의 교회안에서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기능들의 관점에서 역사되어지고 있는 각이各異한 국면을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바울이 사도직분에 관해 언급하지 아니한 이유는 명백하다.로마에는 사도가 없었기 때문이다...."섬기는 일"이란 말은 물질적 필요와 관련해서 자비의 봉사라는 보다 한정된 의미에서 사용되기도 한다(참고.행6:1;11:29;12:25;고후8:4;9:1,12,13).더우기 이 서신에서(15:31)그 말은 바울 자신이 예루살렘에 선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그것은 15:25-27절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그대로다. 이 말은 포괄적인 사용은 바울이 "직임은 여러 가지다"라고 말하고 있는 고린도 전서12:5절에서도 분명하다....집사직에 대한 것이라는 견해를 배격해도 될 만한 아무런 결정적인 이유도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이것이 바로 그와 같은 은사라고 생각될진대,집사들이 스스로 이런 섬기는 일에 권고를 받게 되는 좋은 이유가 있다고 할 것 이다....그 다음에 언급된 은사는 求濟구제하는 일이다.구제를 하되 성실함으로 하라는 것이다.이 말은 때로는 관대하게 구제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참고.고후8:2;9:11,13)....여기서의 구제는 사적私的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교회의 헌금에서 주는 것은 아니다...."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여기서 지시되고 있는 사람은 교회내에서의 치리治理와 감독의 책임을 맡은 사람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참고.살전5:12;딤전5:17).뒷 문단에서는"장로들"이라고 했다.고린도 전서12:28절에서는 이 직분이 다른 명칭, 즉 "다스리는것"으로 되어 있다...."긍휼"이란 말의 사용에는 궁핍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직접적 개인적 섬김에 대한 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앞에서 말한 구제는 지금의 긍휼의 사역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이 경우의 미덕은 즐거움으로 이행해야 하는 미덕인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봉사"(섬기는 일)란 말은 여러 경우에 적용되었다:식탁봉사(사도6,2),헌금(15,25.31),헌금관리(1고린16,15;2고린8'4),바울로의 사도적 직무(11,13;1고린12,5;2고린4,1;11,8). "지도자"(다스리는 자)는 교회공동체를 지도하는 사람(1데살5,12-13;1디모5,17참조)으로서 신자들을 훈계하는 직책을 맡는다. 8절에서는 그들을 보호하고 보살피는 사람인 것 같다(16,2참조).


[로마서 성서주해] 12장11,16,20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11 열성에 식지말고 영에 열렬하며 주님을 섬기시오.16 서로 사이좋게 살고(직역하면"서로 같은 것을 생각하라")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시오.분수에 넘치게 현명하다고 자처하지 마시오. 20 오히려"당신의 원수가 굶주리면 그를 먹여 주시오.그가 목말라하면 그에게 마실 것을 주시오.사실 당신이 이렇게 함으로써 불타는 숯을 그의 머리위에 쌓아올릴 것입니다.

"불타는 숯"은 하느님의 심판이나 죄인의 가책과 회개할 용의를 상징한다.원수를 악으로 대적하지 말고 자비를 베풀라고 권고하는 20절에서는 이 말이 회개할 용의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한다.

가톨릭 새번역

11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15) 16 서로 뜻을 같이 하십시오.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20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위에 놓는 셈입니다."(23)

(15) "마음이"와 "성령"의"성"은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일부 수사본들에는"주님을"대신에"시간을"로 되어 있는데,일부 주석가들은 이 말을'적절한 기회를 잘 살피십시오.'라는 뜻으로 이해한다.(에페5:16참조) (23)잠언25,21-22절을 인용한 것이다.바오로가 이 본문을 인용한 의도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첫째는,피해자의 선의로 가해자의 악의가 더 두드러짐으로써,그에 대한 하느님의 벌을 더 무겁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첫째 것과 반대로 피해자 쪽의 사랑을 보고 그야말로 괴로울 정도로 놀란 악인이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둘째 해석이 문맥에 더 잘 맞는 것으로 여겨진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Klassen의 결론은 이와 같다."숯불은 수치,양심의 가책 또는 형벌을 가리킨다는 너무도 널리 해석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이런 해석은 ,본문의 모든 지지를 결여하고 있다.애굽문헌과 속담에 의하면'숯불'은 사랑의 행위의 결과로서 생겨난 마음의 변화를 생동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국제비평주석

"머리 위에 핀 숯"이란 표현은 또한 2에스드라서16:53에도 나타난다.그 기원에 대한 그럴듯한 제안은 이것이 머리에 잿더미 위에 타는 숯을 담은 접시를 얹고 다님으로써 자신의 죄과를 깨끗이 했던 이집트의 의식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S.Morenz;W.Klassen;L.Ramaroson; S.Baltina)



페데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주해

타고 있는 불을 머리에 쌓아 놓는다는 것은 불과 기름을 성벽위로 던지는 옛날의 전략(플라비우스 요세푸스,<유다 전쟁>3:27,3.271-275) 에서 취한 예일 것이다.그리이스 교회의 교부들(금구 성 요한,데오도래투스,데오필라투스)는 적에 대한 무거운 벌이라는 뜻으라 하였다.아우구스띠노는 자주 그런 의견을 반박하였다.아우구스띠노의 생각이 좋을 것같다.신도들이 적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이나, 그것은 심한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적들에 대한 하느님의 크신 복수를 청하는 애덕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좋을 것이다.혜택을 입은 적敵은 마음의 가책을 느끼고,그런 가책은 겉으로도 나타날 것이다.사랑의 불에 탔다면 적은 은혜를 받고 회개할 것이다.요컨대 사랑은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데 그 사명이 있다.

Commentary Critical and Explanatory on the Whole Bible-jamieson,robert

(compare Mt5:44;Ro12;20).As metals are melted by heaping coals upon them,so is the heart softened by kindness.


[로마서 성서주해] 13장11-12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셩경주석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왔다는 신약적 개념과 관련해서 이런 전망을 취한다는 것은 필요하다.그것은 예언적인 전망이 가까움이지,우리가 셈하는 연대기적 시간의 계산의 가까움은 아니다.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계시함에 있어서,그리스도의 죽음,그의 부활 및 승천,오순절의 성령의 부어주심과 서로 관계가 있는 그다음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은 영광가운데서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이것은 신앙의 지평선 위에 매여달려 있는 사건이다.현재와 이 획기적 구속 사건간의 유사한 성질을 지닌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그러기에 그날이 바로 오늘과 같다고 사도가 기록했을 때에는 틀린 말이 아니다....."밤"은 "이 세대"와 동일시됨이 틀림이 없으며,따라서 밤은 그의 강림에 선행하는 이 세상의 역사의 전기간과 동일시되고 있기 때문이다.사도는 이 세상의 역사의 과정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사실,곧 역사의 결말이 시급하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고 추론을 내릴 만한 그럴듯한 이유를 우리는 지니고 있다.다른 곳에서 바울은 지난 과거를"만세와 만대"라 했다(골1:26).그는 현재를"말세"와 동일시했다(고전10:11).그리고 히브리서9:26절에서는"세상 끝"이라고 했다.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밤은 깊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 정도만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해야 할 말이다.


[로마서 성서주해] 14장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팔레스티나의 유다인들은 채소(2사무17,28참조)고기,술(다니1,8.12-16;유딧8,6;10,5;12,1-2;에스14,17참조),안식일이나 축일 규정을 세심하게 지켰다(즈가7,5;8,19참조).루가18:12를 보면 경건한 바리사이들은 한 주간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을 했다."믿음에 약한 이들"은 그리스도께 개종한 뒤에도 위의 규정들을 세심하게 지킨 로마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강한 이"들은 이 규정에 대해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믿음에 약한 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의심하는 자를 뜻하지 않는다.그분이 성취하신 하신 자유,즉 불결하거나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 유다계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그들은 신앙에 의해서 의로움에 다다랐는데도 이 자유를 행사하기를 주저했다는 뜻으로 믿음에 약했다는 뜻이다....안식일이나 단식일이나 축일을 다른 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관습에 대해 각자가 망설이지 말고(14,22-23)분명한 태도를 정해야 한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너희가 받되"라는 말은 강한 자들에게 직결되고 있기 때문에,만일 연약한 자들의 의심하는 바가 분석과 논평의 주제가 될 경우 연약한 자들에게 떨어질 노怒함을 피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부딪힐 것이란 어떤 사람이 혹 부딪히게 되는 '길 위에 놓인 장애물'이다.거칠 것이란 문자적으로 '덫'을 가리킨다...."너희의 선한 것"..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어 왔다.가령,복음,기독교 신앙고백,하나님의 천국 등이다.그러나 강한 신자가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누리고 있는 자유보다 문맥에 더 잘 어울리는 견해는 없다....주석가들 사이의 견해차이는"의와 화평"의 의미애 대해서다.혹자는 주장하기를 이런 용어들은 법정적 의미라고 하는 바,의는 칭의의 의를 가리키고(참고,1:17;3:21,22;10:3,6),평강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강을 가리킨다는 것이다(참고5:1).[칼빈,필립비,핫지] 다른 혹자는 주장하기를 이런 용어들은 윤리적으로 이해한다 하여,신자들에 의해 성취된 의와 또 신자들에 의해 촉진되고 보존되는 평강을 가리킨다고 한다.[마이어,가뎃,샌데이와 헤들람,바렛] 신자들이 지키고 있는 모든 옳음과조화가 하나님의 화평에 기초하고 있음은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지만,두번째 견해를 두둔해서 할 말이 더 많다.

[로마서 성서주해] 15장19-20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그리스어,일뤼리콘)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200주년 신약성서,완결했습니다).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일루리곤은 아드리아의 동부 해변이니,대강 말한다면 지금의 남부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를 포함하는 곳이다.따라서 마케도니아 북부와 아가야의 서북쪽이다(200주년신약성서주해:기원전11년 로마제국의 황제령이 되었지만 6~9년 원주민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티베리우스 황제가 그곳을 다시 정복했다.일리리쿰은 그 후 판논니아와 달마시아로 불렀다)....그는 사도행전 20:1,2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여행 중,일루리곤에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혹은 그가 고린도에서 체류하는 동안 이 지역 안으로 전도여행을 했는지도 모른다.(참고18:1,18;20:3)..."편만히 전하였노라"는...그가 복음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참고 골1:25),그가 복음을 제시하던 거리낌없는 충만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행20:20,27).바울은 자기 임무를 이행했고,또 위에서 밝힌 지역안에서 그의 사역의 계획도 완성했다."편만히 전하였노라"는 말은 그가 그 지역 안의 모든 곳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는 의미는 아니다."그가 위대한 사도의 의무라고 생각한 것은 그가 교회를 세우고 그렇게 놓여진 터위에 다른 사람이 세우도록 맡겨두는 일이었던 것이다(고전3:7,10)"그리고 그의 기능이라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 그는 말하기를 그가"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다"고 했다(23절).


[로마서 성서주해] 로마서 15장22-33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22 이러한 이유로40 나는 여러분에게 가지 못하도록 여러 차례 방해를 받았습니다. 23 그러나 지금 나는 이 지역에서 더 이상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 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24 내가 스페인으로 갈 때(여러분에게 가려고 합니다).실상 나는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보고 먼저 여러분과 얼마 동안 사귀다가 그곳으로 (가는 여행에) 여러분의 배웅을 받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25 그러나 지금 나는 성도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납니다. 26 실상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인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다소의 기부를 하기로 기꺼이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27 그들은 과연 (그렇게 하기로) 기꺼이 결정했고 그들에게 빚진 이들입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들에 한몫을 차지하게 되었다면 그들은 또한 물질적인 것들로 그들에게 봉사해야할49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28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다 마치고 그들에게 이 결실을 봉인해서50 전해주고 나면 여러분에게 들렸다가 스페인으로 떠날 것입니다. 29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도착할 때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져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30 [형제 여러분],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또한 영의 사랑에 의해서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나를 위해 하느님께 드리는 여러분의 기도중에 나와 함께 싸워 주시오. 31 그것은 내가 유다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구출되고,예루살렘에서 나의 봉사가 성도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입니다. 32 또한 그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기쁘게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분과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기 위함입니다. 33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아멘.

40 바울로가 동부 지중해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바빠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기 어려웠다. 49 "봉사하다"는 경신례 용어이다(민수8,22;16,9;18,22.23;2역대11,14 참조). 이 말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헌금이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뜻을 가짐을 암시한다. 50 봉인은 소유권을 가리키는 공적표지다....바울로는 그들이 헌금을 받아 들이지 않을까 걱정했다.이것은 그와 예루살렘 교회의 관계가 확고부동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바울로가 그 이유를 명시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추리할 수밖에 없다:예루살렘 교회안에 헌금으로 입증될 그리스도인 두 집단 사이의 일치를 방해하는 적대 세력이 헌금을 거절하도록 부추길 위험이 있었던 것같다.이 세력은 이를테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울로의 사도직을 반대한 거짓 형제들(갈라2,4참조)과 비슷한 자들이었을 것이다.바울로는 예루살렘의 형제들이 헌금을 받아들이도록 유다계 그리스도인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이 공동체가 자기 편을 들어 이방계 그리스도인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보여 주기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사도24,17을 보면 성도들이 헌금을 받아들인 것같다.

[로마서 성서주해] 16장18,25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국제비평주석

18 이같은 자들은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교활,한글개역개정판;200주년 신약성서,번지르르한;그럴 듯한,공동번역)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永世前부터 감취었다가

바렛은 그 언급을 '음식률에 마음을 빼았긴 것'으로 간주한다;그러나 이런 해석은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가고 약간의 현대 지지자들을 갖는 반면에 아주 그럴듯 하지는 않다....문자적으로 취해진다면 14:15~21절의 관점에서 훨씬 더 자연스러운 설명은 분명히 바울이'믿음이 연약한'형제들을 영적으로 파멸시키면서까지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14:1~15:13의'믿음 강한'이들의 이기적인 주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영세 전'에서 분명한 의미를 확증하기란 사실 어렵다.딤후 1:9;딛 1:2절에서는"before the world began"을 의미할 수 있다."times eternal"은 이 세계역사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게될 것이다.지금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times eternal"은 창조에서 그리스도의 강림까지 나아가는 시대를 지칭할 수있다....이것이 바울의 의미라면, 그땐 이런 사상이 될 것이니 곧 그 계획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가운데 감추어 있었으며 이 은혜는 영원부터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는 진리를 말해준다는 것이다.선택의 비밀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촉진되듯이(엡1:4),또한 이 비밀의 영광이 비록 감추어져 있긴 했지만 하나님에게는 감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원 전에 그의 계획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