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리꼬 바르바로
1. "한 처음".거의 모든 성서학자는 이 말씀이 창세기에 있는 첫말씀,"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창1:1)의 명백한 암시라고 인정하고 있으나 사도 요한은 우주 창조의 먼 순간을 벌써 초월하고 영원으로부터 영원과 함께"말씀"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벌써 말씀이 계셨다는 곧 "말씀"은 역사적 변천의 지배아래에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영원히 변함없으시고 한없이 완전하신 존재와 실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따라서"말씀"은 우주 창조 전에 모든 시간을 넘어 언제나 영원히 존재와 실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따라서"말씀"은 우주 창조 전에 모든 시간을 넘어 언제나 영원히 존재하고 계셨던 것이다.(삼위일체론에 따라 해석할 때 "한 처음"이 '영원부터'를 의미한다.) 51.그들은 언젠가 예수님께서 초자연적 자격을 깨닫게 할 것이다.예수님께서는 그 약속을 창세기에 있는 이야기(28:10-17)에서 암시하고 있는 영상적인 말씀으로 나타내셨다.메소포타미아를 떠날 때 노하고 있던 형제 앞에서 야곱은 베델에서 꿈에 하늘에 닿는 신비스러운 사다리에서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자고 있던 야곱보다 제자들은 장차 자기네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하늘이 열려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하늘과 사귀시고 연락을 하고 계셨다.예수님의 전생애에 걸쳐 이런 기적이 실현될 것이다."사람의 아들"(다니엘 7:13-14).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부르신 이름이 여기에 처음 나타난다.이것은 제자들을 메시아에 대한 초자연적 이해로 이끄시는 데 정녕 알맞는 말이었다. 2장 1.복음사가가 갈릴래아 가나라고 한 것은 시도와 띠로 부근에 있는 다른 가나와 구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이곳은 나자렛에서 북방 8키로 지점에 있었다.대충 지금의'게프르 겐나'와 같은 곳이다.3-4.팔레스티나에서 결혼 축하연이 한 주일이나 계속되었다는 관습을 생각하면 이런 경우 잔치에 내놓는 포도주가 상당히 많은 양이었을 것이다.이 한주일사이에 뜻밖의 손님이 올 가능성도 있었다.그래서 많은 포도주를 여유 있게 준비하지 않으면 잔치 도중에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이것은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할 주인에게는 커다란 수치였다....텍스트에 충실하게 번역한다면 "여인"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곧 어머니를 "여인"하고 부르셨는데 이 말투에는 언짢아하시는 느낌을 짙게 풍기고 있다.한 젊은 유다인이 어머니를 향해 어머님하고 불러야 하리라고 여겨지는데 이 특별히 장엄한 기회에 있어서 존엄과 깊은 인품에 대한 존경의 뜻이 풍기는 호칭인"여인"이라고 부른는 편이 더 어울렸던 것일까? 이 말에서는 깊은 애정이 였보인다.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똑같은 표현을 쓰셨다(19:26).그리스인과 소아시아인들은 가장 친밀한 사람을 부를 때 여인이라는 말을 썼다.'마담'이라는 뜻이다(호메로스&일리아드 3:204;꾸세노폰&치롭 8:3)..틀림없이 거절의 표시이기는 했으나 어머니께 갖추어야 할 애정과 존경이 모두 들어 있었고 더우기 그분 말씀에다 음성의 음조,얼굴 표정이 틀림없이 나타나 있었을 것이다.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거절의 의미를 나타 내셨다."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드러내어 말씀하신 말씀하신 것처럼(루가 2:49)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다하시기 위하여 인간적인 모든 애정,혹은 목적에 따를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만 따라야 하셨던 것이다(4:34).어느 교부들(아우구스띠노,그레고리오,이레네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때는 영광에 들어 가신 "때"라고 하였다.그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청을 모두 들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신비적인 뜻이라기보다는 메시아로서 외적인 활동이 실현되는 "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6. 당시 돌항아리는 율법 상의 부정을 타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이 명하는 정결 예식에서는돌항아리에 물을 담아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여기에 기록된 돌항아리도 마침 그런 일을 위해 곧 손발 접시따위를 씻는 데 쓰이고 있었다.이 돌항아리는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80리터들이에서 120리터들이 까지 있었다.그집에 정결 예식용 항아리가 이상스럽게 많았던 셈인데 혼인 예식이 일주일이나 걸리는 축하연의 필요에 따라 설명이 된다.이런 특별한 경우에는 이웃에서도 빌려 왔을 것이다...가나는 해발 250미터쯤이고 가파르나움은 해면 밑 200미터쯤 되는 곳인데 거리는 약 20키로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에서 가파르나움으로 가는 길은 심한 내리막 길이었다. 3장 22.예수님께서는 그 도성에서 나오셨으나 너무 멀리 가지 않으시고 팔레스티나의 중심인 유다에 머무르셨다.약 2달 동안 유다에 머무르셨다고 생각된다. 23.이 이곳은 벌써 4세기 경부터 에우세비우스와 예로니모가 사마리아의 시도 폴리스에서 약 8키로 지점에 있는 지금의 베이삼과 같은 곳으로 여겨 왔다.이 곳은 샘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4장 4-5.엄밀한 뜻으로 팔레스티나는 당시 세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곧 북은 갈릴래아,남은 유다,사마리아는 이 두 나라 사이에 있었다.갈릴래아에는 히브리인과 함께 많은 이방인이 섞여 살고 있었으나 유다에는 이방인이 매우 적었다.사마리아 인구는 거의 이방인이었으나 그들 중에는 기원 전 7세기경 아시리아인에게 몰려 이 곳으로 옮겨온 히브리인 이주민의 자손도 살고 있었다.예수님께서는 나그네로서 가리짐 산 남동쪽 구약의 존경할 만한 추억을 지닌 마네의 아름다운 평야를 지나가고 계셨다.거기에는 예로부터 조상들의 잦은 순례의 근거지가 된 세겜(창 12:6,33:18,35:4,37:12;여호수아 24:25;판관기 9:6),요셉의 밭과 무덤(창 48:22;여호수아 24:32),야곱의 우물이 있었다."시카르".세례우티데스 시대부터 옛 세겜의 위치는 북방 1,500미터 지점에 떨어져 있는 비교적 현대적인 도시,곧 플라비아 네아포리,지금의 나프르자라고 해 왔다.그러나 최근 델 바라다에서 한 발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시대의 옛 세겜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아람말인 시코라는 복음서에서 시카르가 되었다.거기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곳에 지금도 십자군이 세운 성당안에 야곱의 우물이 있다. 7."한 사마리아 여자".사마리아라는 고을은 "오무리"가 세운 곳으로 이스라엘의 수도이기도 했던 지금의 "세바스띠에",세겜에서 12키로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그래서 이 여자는 사마리아 고을 사람이 아니라 사마리아 나라 사람임을 알 수 있다....우물은 매우 깊은데 39미터쯤 되는 것도 있었다.그리고 팔레스티나의 옛 우물에는 양수기가 없었기 때문에 긴 밧줄이 달린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야 했다.가까이 사는 주민의 친절을 믿고 나그네는 긴 밧줄이 달린 두레박을 갖고 다니지 않았다.나그네가 청하는 물을 거부한다는 것은 큰 죄라고 보았다.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물을 청하셨는데 그것은 그 지방관습을 따르신 것이었다.그러나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교제는 최소한도로 제한되어 있었다.이 유다와 사마리아의 깊은 적대감정 내지 반감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이 적대감정은 바빌론의 유배에서 돌아 와 즈르바벨의 동료가 성전을 개축할 때 사마리아인의 협력을 거부하면서부터 더욱 격심해졌다(에즈라 4:1-5).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한 마낫세라는 사제가 예루살렘의 성전과 대립되는 사제직과 성전을 가리짐산에 세운다는 극단적인 행동에 이르렀을 때 적대 감정은 최고조에 달했다(유다고사XI 8:2).마침내 유다인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같이 보았고 또한 그렇게 다루게 되었다.집회서(50:25-26)는 사마리아를 증오하는 민족이라 하였고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다.그래서 사마리아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복수하기를 잊지 않았다(유다고사 VIII2:2.XX6:1). 20.마낫세(B.C.400년경)의 분열이 이루어진 이후 사마리아인은 예배를 가리짐산에서 드리고 있었다.거기에 서있는 성전은 기원 전 129년경 요한 이루까노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사람들은 지금도 거기서 의식이나 기도를 하고 있었다.지금도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마리아인이 거기서 과월절을 지키고 있다. 35.마네의 평야에서는 수확이 6월 후에 이루어진다.그렇다면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추방시키신 과월절로부터 2달이 지난 셈이다. 46.아첨에 능란한 왕이라는 말을 듣던 헤로데 안티파스의 작은 궁전에 속한 무관 혹은 관리였을 것이다.어느 해석학자는 이 고관을 마나엔(행 13:1),혹은 자기의 재산을 가지고 최초의 사도들의 모임을 도와주고 있던 여자들 가운데의 한 사람 요안나의 남편,곧 헤로데의 신하(루가 8:3) '쿠자'와 같은 인물이었다고 하였다.후자의 경우를 확실하다고 하기에는 지금껏 뚜렷한 증명이 없지만 진실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51.가나에서 3시간 반쯤 지나 길은 갈릴래아 평야 끝에 이르고 티베리아 호수 낮은 지역(700미터쯤)으로 가던 고관은 거기서 종들을 만났다.그들은 좋은 소식을 알리려고 서둘러 마중 나왔던 것이다.어린이는 벌써 병에서 해방되어 있었다.열은 오후 1시경 떨어졌다....가나에서 가파르나움까지는 7시간쯤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복음사가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서둘러 돌아온 고관은 같은 날 오후 늦게야 집에 이를 수 있었다....저녁 6시부터 다음 날이 시작되기 때문에 어린이가 나은 것도 어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데리꼬 바르바로
5장2."베짜다".호겔과 쁘라는 베데스타라고 읽지만 이것은 지지하기 어렵다."못"은 현재의 풀(수영장)과 같은 것이었다.성녀 안나라는 지금의 성당에서 서북쪽으로 30미터쯤의 거리에 있고 지금은 대부분이 발굴되어서"다섯 행각"이 있는데 그것은 요한이 기록한 것과 똑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이 못은 길이 120미터,폭 60미터의 자리를 차지하고 둘레에는 기둥으로 구획된 회랑이 둘러 싸고 있었다."양의 문 곁에는".양의 문은 그 못으로부터 그렇게 멀지않은 동북쪽 한 구석에 있었다.요한은 이 못에 베짜타(새로운 집)이라는 아람말의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성전의 북쪽에 지은 새로운 구역의 이름이었다.이 구역은 옛 거리와 깊은 도랑으로 나뉘고 있었다(유다전기 V 4:2). 5.실제로 보면 그 병은 중풍이었음을 알 수 있다. 7장 51.고소된 자에게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문제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벌한다는 것은 확실히 율법의 정신을 거스르는 것이었다.그러나 몹시 분노하고 있기 때문에 바른 정신을 잃은 사람들과 토론을 하는 것은 시간의 낭비이다.그들은 니고데모에게 모욕을 퍼부울 뿐 편견에 찬 논법을 가지고 이야기를 끊어 버린다."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란 말이요?" 이것은 모욕이다.이러한 경우 예수님을 변호하려고 생각하는 자는 제 나라의 영광에 취해 있는 갈릴래아 사람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라고 한 어리석은 주장도 거짓말이었다.예언자 요나는 실로 갈릴래아 사람이었다(열왕기 하 14:25).그러나 이러한 논의를 차치하고라도 지금까지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있어서도 그러하리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야의 영광이 이방인의 갈릴래아에도(이사야 9:1) 미칠 것이라고 말하여 마침 그 반대가 되는 일을 암시하고 있었다.끝으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태생이 아니시었다. 8장 6. 무엇인가를 땅에 쓰신 예수님의 이 동작은 아무 말도 들으려고 하지않고 자기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이러한 뜻없는 것을 쓰신 예수님께서는 이와같은 문제를 법률상 해결 할 권리가 자기에게 없다고 암암리에 대답하려고 하신 것 같다.그러한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재판소가 있으므로 그 곳에 물으면 좋으리라.유다인의 율법학자들도 자기네에게 향해 오는 델리케이트한 문제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고 싶을 때에는 땅에 무엇인가 쓰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10장 1.실제적인 시골 생활에 대한 묘사이다.밤이 되면 그 때까지 풀을 뜯어 먹기 위하여 산에 흩어져 있던 양들이 맹수와 도적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돌담으로 쌓은 양우리로 들어 간다.이 양우리를 지키는 목자들은 모두 그 안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막이나 혹은 그다지 멀지 않은 집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찌기 다시 그 곳으로 돌아 온다.산으로 가기 전에 양을 우리에서 끌어내기 위하여 소리를 지른다.때로는 목자가 뒤에서 양을 몰기도 하고 또 때로는 양떼 앞에 서서 목장을 향하기도 한다.때때로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 먹을 풀이 있는 평야로 양을 데리고 가기도 한다. 3.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 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이 말씀은 양에 대한 목자의 특별한 애정을 보여 준다.오늘날에도 팔레스티나의 목자들은 무리들 속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는 양에게 이름을 붙이는 습관이 있다.11장 1."라자로"(라자로스,에르아자르[하느님께서 도우신다]의 생략형) 이 옛 마을을 가리키는 우물과 집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여기에서 동방 200-300미터 되는 곳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세운 라자리온(현재의 에르 라자리에)라는 집의 한 모서리의 흔적이 있다.하부 시티 마리암이라는 예루살렘의 문에서 올리브산을 따라 에르 라자리에(베다니아)까지는 3키로쯤으로 걸어서 약 반 시간 걸린다.전통이 라자로의 무덤이라고 일컫고 있는 땅 옆에 하나의 비잔틴식 성당과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서 있다. 18"오리".15스타디온 19.장레는 한 주 동안 계속되었다(집회서 22:12).그런 관습은 오랜 옛날부터 내려온 것이었다(마카베오 하 10:1-9). 38.히브리인들에게는 시신을 자연동굴 또는 인공으로 바위에 판 동굴 속에 묻는 습관이 있었다.대개 무덤은 두 서너 단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출입구를 돌로 막아 놓았는데 무덤이 깊을 경우 돌을 뉘어 두었다. 21장 19. 다른 사람이 허리띠를 묶어 주고 원하지 않는 데로 데려간다는 것은 끈으로 십자가에 묶이고 사형 집행장에 끌려 가 사형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5장 2."커퍼 두루마리"(the copper scroll)가 쿰란 동굴에서 발견되었고 그것에 의하면"Beth Eshdatain"이라고 판독되는 문절이 나오고 있고 그것에 따르면"베데스타"가 거의 확실하지 않은가 여겨진다...이 주랑이 사방에 네모꼴로 서 있고 그리고 두 개의 못 중간 경계선에 또 하나의 주랑,이렇게 다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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