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영화세상

2010년 4월 10일 토요일

JAMES,PETER,GOOD NEWS

페데리꼬 바르바로

야고보서

야고보의 편지는 45년에서 50년사이에 갈릴레아의 북방에 있는 팔레스티나를 벗어난 바깥 지방에 이룩된 여러 교회에 보낸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가 있다.야고보는 예루살렘을 떠난 일이 없는 것 같으므로 이 편지는 확실히 예루살렘에서 보낸 것이라고 생각된다.1장9절-가난한 사람을 이렇게 높여 주시는 것은 이 세상의 신분이 바뀌고 마치 욥과 같이 물질적으로 혜택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또 뒤의 12절에 있는 것같이 직접으로 미래의 세계에서 받을 보상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그것은 오히려 참 지혜가 이 세상의 시련을 이용하여 이루는 윤리적 완덕 곧 산상수훈에 나오는 참된 행복의 정신을 말한다.발써 옛날의 유대인들은 메시아는 보잘 것 없는 자를 높이시고 시달린 사람들을 위로하신다고 말하고 있다."하느님 아버지는 변함이 없으시고 우리를 외면하심으로써"라고 한 번역은 "변화의 그림자조차 없으신"이라고 번역해야 더 좋을 것 같다."변화"란 그리스말은 주로 천문학에서 쓰는 말로 천체의 회전 또는 그런 운동을 가리키는데 그 빆에 온갖 변화를 말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다."그림자"란 뜻으로 보면 하느님의 빛에는 온갖 변화가 없으시다.혹은 어떤 변화에서 오는 그림자도 없으시다는 뜻이다.저자가 지닌 천문학적 말투를 따라 말한다면 어떤 천체의 변화로 말미암아 그림자가 생기고 빛이 닿지 않는 것을 말한다.3장5절-엄청나게 허풍을 떱니다,자랑만은 대단합니다,200주년;큰일을 한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개역한글.15절-이기적인 야심,야망,200주년;다툼,한글개역;희랍어,당쟁. 4장9절-"죄인들은 손을 씻고"예배에 앞서서 유다인은 곧잘 손을 씻었다(출30.19-21;레16.4).그러나 이런 말투는 옛날부터 자주 윤리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욥 17.9;시24.4;이사야1.15-16).바울로도 기도할 때에 드는 손을 깨끗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1 딤 2.8). 손 곧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깨끗할 뿐 아니라 마음도 그 의향도 깨끗해야만 한다.이러한 도덕면의 각오가 있다면 그리스도와 세속사이에 갈라져 있는 "두마음"은 사라질 것이다. 5장7절-비에 대한 이 암시는 그야말로 팔레스티나적이다.땅이 얕아 여름 햇볕에 타버리고 동쪽의 뜨거운 바람에 매말라 버린다.그래서 가을비가 내려 그 땅을 축여주지 않는다면 파종조차 하기 어렵다.그러나 가을비만이 아니라 이른 봄에도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수확이 위태로워진다.하지만 농부는 그 비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자신의 파종과 수확의 운명을 마련하시는 하늘의 은혜를 기다릴 뿐이다.농사의 성과를 주로 나일강에 의존하고 있는 에집트에서는 야고보의 이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어서 어느 텍스트에서는 농부가 빠른 수확과 늦은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격으로 되어 있다. 12절-사회의 무질서에서 온 싸움이나 분규의 와중에서 유다인은 경솔하게 맹세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맹세의 이 악용은 예수님께서 타이르셨을 뿐 아니라 탈무드에서도 말하고 있다.그것에 대한 반론은 퓔론에게서도 엣센파 사람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일상생활에서도 맹세를 하지 않아도 될 많큼 사회에서 진리가 존중되어야 한다."예 할 것은 예","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는 것으로 충분할 만큼 원할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14절-옛날 특히 무더운 나라에서는 기름의 약효가 널리 알려져 잇었다.한편 셈 사람들은 성소 혹은 예배의 도구를 축성할 때 흔히 기름을 사용하고 있었다.그래서 야곱은 베델의 돌에 기름을 발랐다.그리고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환자의 치유는 약보다는 하느님께 기대되고 있었기 때문에 기름의 종교적의미가 환자에게 기름으 바르는데로 옮아가고 있었음을 잘 알 수가 있다.극히 소박한 약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표시가 되기에 알맞았던 것이다.....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는"(병자)성사는 마르코의 글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암시되고 야고보에 의하여 신자들에게 공표되고 권고되었던 것이다"라고 정의하였다.15절-앓게 된다는 것은 반드시 죄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죄가 있다면 그것도 용서받는다는 것이다.작은 죄밖에 없는 사람의 상태를 여기서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3.2) 저자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대죄인 것 같다.위와같기 대문에 신학은 여기서 할 수 있다면 환자에게 죄를 고해할 의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병자성사만이 지닌 하나의 효과는 대죄를 사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트리엔트 공의회는 이 14절과 15절이 병자성사를 말하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이 성사의 집전자는 사제라고 정의하였다.

베드로 전서

베드로는 바빌론이라고 부르고 있는 로마에서 쓰고 있다....언제 쓴 편지인가? 64년 7월 네로의 박해가 시작되기 전이리라....이 편지는 63년 6월에서 64년 6월 사이에 쓴 것이라 할 수 있다.1장 10절-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메시아의 오심이 언제 쯤인가 알려고 탐구하였으나 그 연구에 있어서"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지도하고 계셨다.보울드는 예언자를 이끌고 있었던 성령이 그리스도 자신을 이끄시는 성령이라는 뜻으로 취하였지만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현존이고 이 영원히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옛날의 계약의 중심지이시며(1고린토 10.4-9;유다1.5) 또 자신의 성령으로 예언자에게 神感신감을 주신다.2장2절-그러한 몹쓸 악 대신 새로 태어난 신자는"갓난 아이처럼"가르침이란 젖을 마셔야 한다.새로 태어난다는 비유는 계속된다.그리스도인은 믿음과 세례로 다시 태어났으나 하늘의 영광에 이르기까지는 계속 자기 성장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따라서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자라듯이 영적 생활에 있어서 믿음의 정신은 순수한 복음이라는 깨끗한 젖을 갈망하고 마시면서 자라야만 한다.9절-민족:족속,개역한글,겨레:나라,개역한글. 3장19절-영혼:영,개역한글[4.6,"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히브리서12.32,"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과비교하라.].죽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은혜와 수난의 은혜를"갇혀있는 영혼들에게도"가지고 가신다."갇혀 있다"는 말은 묵시록 1장 7절에 있는 고성소(셰올)의 감옥을 가리킨다.이 어두움의 늪에는 유다서 1장6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악한 천사가 사슬에 매여 있다.그러나 이 이상스러운 고성소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거처가 있고 제도도 저마다 다르게 나타나 있었다.구약성서의 가장 새로운 문헌은 셰올 안에서도 의로운 사람의 거처와 죄인의 거처를 구별하고 있고(지혜3.1이하) 또 예수님께서 한족 거처에서 다른 거처로 옮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루가 16.26).신약성서에서는 의로운 사람의 짐이 아브라함의 품(루가 16.22) 새로운 낙원,하늘나라(루가 23.43)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그리스도께서 셰올에 가셨다고 한 이 선언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그리스말인 '케룩스'는 쓰라린 소식과 좋은 소식의 어느 어느 쪽 선포에도 사용할 수가 있다.그러나 여기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속죄의 결과를 다루고 있는 그 전후관계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가셨다는 것을 쉽게 추리할 수가 있다.[카톨릭,동방정교회,성공회,루터교,감리교는 견해가 동일하다]



베드로후서

1장 5-7-진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방종한 영지주의자와 달리 자기 훈련을 하는 사람들이다.여기에서 절제는 특별히 성적인 금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자기 훈련을 의미한다....인내는 아마도 절제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스스로를 훈련하는 사람은 인내할 수도 있다.그런 사람은 진실로 경건한 자이기도 하다.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경건은 제의적인 숭배나 경외심으로 가득찬 두려움이 아니라 경건한 삶이요,경건을 도덕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참조.3.10]그러나 이 경건은 공동체내에서 형제애로 나타나며 저자의 경우에도 이것은 형제애로 끝나지 않고 사랑으로 귀결된다.이 사랑은 본래 형제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듯 하다[참조,데살전 3.12,갈라6.10,마태5.43 이하].



국제성서주석

야고보서

5장14절-기도에 대한 이 지적을 통해"기름이 갖는 그 어떠한 마술적 효력도 여기에서 완전히 배제된다"[greeven].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기름바름은 따로 떨어져서는 안된다.이 상징적인 행위의 효력은 기도로부터 나온다.즉 기름바름은 기도로 시작되고 기도로 끝마쳐진다.

정명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베드로의 편지를 성 베드로 만년의 몇 달전에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그것은 이 편지에서 저자가 죽음이 임박한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베드로의 첫째 편지의 암시라고 생각되는 것도 63년 가을을 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한다.따라서 64년에서 67년사이 그 중에서도 아마 64년 전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그렇다면 쓴 곳은 로마라고 말할 수 있다.

베드로후서

1장5-7절-그리스도인은 모든 올바른 관계의 시작이 되는 믿음에 덕을 더해야 한다.그리스말 아레테는 오히려 곧바른 것 결백하고 정직하다는 뜻이지만 이것을 가지고 있다면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을 쉽게 얻게 한다.이 지식은 믿음의 정신이라고 하는 깨끗한 마음에 흔히 있는 실제적인 지식이다.이리하여 그리스도인은 거짓 교사에게서 오는 위험에 대하여 미리 보호받고 있다.그리스도인은 또한 초자연적인 진리를 바르게 평가하고 피조물을 이용함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절제"를 한다.그리스도교적 절제는 때로는 괴로운 것이기도 하지만 앞에서 말한 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인내" 힘있게 견디어내고 참을 수 있다.그리고 그 인내의 효과는 하느님을 섬길 때 가장 자유스럽고 가장 무사한 "경건"을 얻게 한다.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하느님의 계명은 형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1벧 1.22)"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십시오"형제에 대한 사랑은 아가페 곧 그리스도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고 또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큰 사랑을 낳게 하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모든 형제를 품게 되고 온 인류에 사랑으로 나타난다.후에 이냐시오가 말한 것 같이 믿음은 출발점이고 사랑은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종점이다.바울로에 있어서도 사랑은 모든 덕을 하나의 단단한 다발로 묶어 주는 것이다(골3.14;1고 13.1이하)



성서주석 48- 박창환 & 김경희

4장6절-3장19절에서는"전파하셨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라고 함으로써 그 전파의 내용이 밝아졌다.하나님은 공의로 남김없이 모든 인간을 심판하실 것이다.그러나 공의로울 뿐 아니라 자비로운 분이시기에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이전에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신 것으로 베드로는 믿고 있다.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은 자들이 사람인지라 복음을 믿고 사는 삶은 영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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