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리꼬 바르바로
디모테오 전서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는 거의 같은 시기에 쓴 것이다.65년 경에 마케도니아에서 썼으리라고 생각된다....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로마의 감옥에서 쓴 것이다. 1장4절-"꾸며낸 이야기"는 현실과 맞지 않는 것 곧 역사와 진리에 어긋난 것을 의미한다....."하느님의 계획"이라고 한 말은 그리스말 오이코노미아의 번역이다....여기서 사람의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라기 보다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너그러운 태도를 가리키고 그래서 이 말은 "분배"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5절-맑은 양심-고운 양심,200주년;선한 양심,개역 한글. 10절-"건전한 교설"-건전한 가르침(정통의 사도적 가르침),200주년;바른 교훈(건전한 교훈),개역한글.-이라는 말은 목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주 나오지만(2딤 4,3;딛 1,9. 2,1).신약성서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는다.그런데 바울로와 같은 시대의 어떤 저자는 이성에 맞는 지혜,현명한 가르침을 가리키기 위하여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퓔론,디로의 막시무스). 바울로도 이 말을 거기서 취했을런지도 모른다. 20절-바울로가 이렇게 심하게 비난한 것을 보면 구리 세공 알렉산드로인지도 모른다.바울로는 에페소를 떠나기 전에 이 두사람에게 대하여 해야 할 처분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이 두사람은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말하는 파문이 아니고 육신 면의 악(병)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던 사탄에게 맡긴다는 의미로 결국 사탄이 이 두 악한 신자의 몸에 해를 주지만 그대로 버려둔다는 말이다.그러나 이것도 둘을 맑은 양심으로 되돌아오게 하려고 하는 구원을 위한 교정수단이었다. 2장 12절-"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3장 6-9절에 더 분명하게 지시되어 있는 것처럼 교활한 거짓 교사에 좌우되어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고 있는 여성을 가리키고 있다. 3장 2절-테르툴리아노 이후 이 말은 감독인 사람에게는 재혼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왔다.바울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7장 39절에서 재혼을 허락하고 있다(1딤 5,14 참조).그러나 동시에 그런 것은 이상적인 것은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다.헤르마스의 목자도 재혼을 인정하지만 권하지는 않았다.또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바울로가 이 말로써 감독의 결혼을 의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리고 실천하기 어려운 이 독신 생활을 당시 갓 신자가 된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감독에게 결혼을 허용하면서도 아내가 죽은 후 재혼을 금하였던 것 같다. 3절-"난폭하지 않고"(딛 1,7)라는 말이 이것을 분명하게 해준다.이 낱말을 싸움건다는 뜻으로 부드럽게 풀이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리스말에서는 폭력으로 남을 때리는 사람을 의미한다. 8절-근엄하고-품위가 있고,200주년;정중하고,개역한글. 10절"먼저 시험을 받아야 하고" 이 표현을 보고 보조자를 위한 특별한 수련기간이 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시험이란 이런 일에 뽑히는 사람에게 흠이 있는가 없는가 알아 본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11절-근엄해야-정숙해야,개역한글;품위가 있고,200주년...여러모로 생각해보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16장1절에 나오는 페베와 같은 여신도들의 물질적인 원조를 돌보아주던 여성 보조자가 아닌가 생각된다.페베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디아코노스라고 하였다.그러나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봉사하는 자"로서 남성에게나 여성에게나 다 쓸 수 있는 말이다. 16절-"성령이 그 본성을 입증하셨으며"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있었던 영의 나타나심을 암시하거나 혹은 부활 후에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에 들어 가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천사들이 그분을 보았으며"...그리스도의 하늘에 있어서의 승리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4장 5절-결혼의 금지에는 물질이 본질적으로 악이기 때문에 그것을 늘이는 것이 문책받을 일이라고 가르친 그노시스파의 싹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아직 엄밀한 뜻의 엔크라티즘(폐쇄적 금욕주의)이라 할 수 없다.왜냐하면 신약성서 거의를 부정하고 있던 이 극단의 금욕주의는 2세기가 되어서야 크게 번진 것이기 때문이다.이 이단설에 대하여 바울로는 여기에서 비칠뿐 오히려 음식의 금지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고 있다. 7절-속된 이야기-저속한,200주년;망령되고 허탄한 신화,개역한글;망령되고 저속한 신화,ICC. 5장 16절-곧 이런 여신도들은 몇몇 과부들을 모아 보호하거나 돌보았던 것 같다.과부들이 이렇게 모여 산 것은 물질적이거나 생활상의 이유 때문만은 아니 것 같다.곧 아직은 정식 수도단체라 하기 어려웠지만 그 싹이었다.바울로는 이 신도들에게 이 사업을 이어가도록 간청한다.그리고 그런 청을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의지할 때가 없는 과부에 대한 교회의 원조사업이 쉽게 이루어 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따라서 이런 집단은 교회가 과부로서 인정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6장 20절-"속된 잡담"-속된 헛된 소리,200주년;망령되고 헛된 말,개역한글."거짓된 지식에서 나오는 반대이론"-거짓된 지식의 반론,개역한글;사이비 반론,200주년.
디모테오 후서
1장4절,여기서 말한 눈물이란 스승에 대한 제자의 사모의 표시일 뿐 아니라 무엇인가 괴로웠던 사건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드로아스에서 있었던 체포를 암시하였는지 모른다(4,13).그 때 디모테오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끌려가는 스승을 보고 디모테오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6절-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4장 14절과 거의 같은 권고를 되풀이이지만 "원로들이 그대에게 안수하며"대신에 "내가 그대에게 안수하였을 때"로 되어 있다.이 예식은 50년 경 바울로가 리스트라에 머물러 있을 때 이루어졌을 것이다.그 도시의 권위있는 신자들은 디모테오에 대하여 좋은 평판을 하였고 그 후에 바울로는 디모테오를 자기 일행에 끼게 하였다.이 권위있는 신자는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4장14절에서 말한 "원로들"이며 디모테오의 신품성사는 그 교회의 원로들과 교회의 창설자인 바울로가 함께 하였을 것인데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단 첫째 편지의 경우(4,14)는 공식적인 면에서 말한 것이며 거기에 대하여 여기서는 실질적이고 개인적인 면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나의 안수"라고 하였다.18절-배경은 에페소를 수도로 삼은 아시아주이지만 4장1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드로아스도 포함된다.이 지방에서는 바울로에게 몹시 괴로운 사건이 일어났다.그러나 디모테오도 알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암시할 뿐 자세하게 말하고 있지 않는다....."오네시포로의 가족" 또는 "오네시포로의 집안"이라는 말투를 쓰고 있다.이것은 오네시포로가 그동안에 이미 죽었다는 뜻으로 취해야 할 것인지 확정할 수가 없다. 18절에 나타나 있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빈 소망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하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2장22절-청춘의 욕정-청년의 정욕,개역한글. 23절-유치한-몰상식한 200주년;무식한,개역한글. 3장6절-"죄에 빠져 있는 아낙네들"...경박한 여자를 멸시하는 말이다.이러한 여자들은 마음이 변하기 쉽고 꼬투리를 잡아 스승을 바꾸어 치고 침착하지 못하며 여러가지 가르침에 귀를 귀울이나 항상 방황한다.분별이 없고 호기심만이 강한 여자는 벌써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 14장 35절,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2장 12절에 등장하고 있다.마침 초대교회의 시기에는 특히 지식면에서 부인들 가운데서 해방의 기운이 커가고 있었다. 8절-유다측에는 이 둘에 대한 전설이 있다. 11절-안티오키아와 이고니온과 리스트라에서 일어난 사건은 사도행전으로 자세히 알 수 있고(13,50.14,2.19).이것은 바울로의 첫 번째 전도여행 때인 46년과 49년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사도행전의 기술에 따르면 바울로가 처음 디모테오를 리스트라에서 알게 되었는데 바울로가 여기에 온 것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와 이고니온에서 전도한 뒤였다. 4장10절-"데마"는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14절과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24절에서 로마에 있는 바울로 측근의 한 사람으로 나타나지만 뒤에"이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바울로 곁을 떠나 갔다.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데마가 믿음을 버렸다고 할 수 없다.그러나 골로사이인에게 보낸 편지 4장14절의 암시에서는 상당히 냉냉한 느낌이 있는데 부정할 수는 없다. 13절-양피지는 구약성서였을 것이다. 16절"내가 처음으로 재판정에 나갔을 때"란 말은 63년 초 황제의 재판 전에 이루어진 재판을 암시했을 까닭이 없다.그때는 무죄로 풀려났고 그 후 디모테오와 몇 차례 만났으며 이미 디모테오가 알고 있는 것을 여기서 다시 쓸 필요가 없다.또 최초의 옥중생활이라면"모두가 버리고 다 가버렸습니다"라고 할 수 없다. 왜? 디모테오를 포함하여 그때에는 많은 사람이 곁에 있었으며 바울로를 버리지 않았다.그렇다고 한다면 이 "처음으로 재판정에 나갔을 때"란 두번째 옥중생활을 의미하고 로마 황제가 한 최초의 제2심을 암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디도서
1장2절-[시간이 시작하기 전에 하느님의 목적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확정지은 것이 시간안에 이루어졌음을 언급하는 것이다.ICC] 12절-바울로는 그 증명으로서 "그들 중의 한 사람".어느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였다.이방인인 이 작가를 예언자라고 부르는 것은 좀 이상한 느낌이 있으나 단지 시인이라고 한 뜻이었을 것이다.바울로가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시인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예로니모에 따르면 그레데의 에피메니데스(기원 전 6세기)였다고 한다.이에 대하여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로스와 테오도레토스는 적어도 이 시구 앞부분은 가리마코스(기원 전 3세기)에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13절-"유다인의 꾸며낸 이야기"란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가 없으나(딤1,4) 족보와 천사들에 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진리를 저버린 인간의 명령"(골2.8,22) 16절-밉살스럽고 완고해서-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한자,개역;흉측하고 순종하지 않는자,200주년.3장13절-제나를 법률가라고 하였다.율법학자 곧 유다 율법의 법률가가 아니라 로마법의 전문가인 것 같다.
히브리서
로마에 대한 유다인의 국수주의가 폭발한 것은 66년 경이었다.이 편지가 집필된 것은 그보다 좀 앞선 곧 64-65년 경이었다.한편 책의 내용이 저자를 사도시대로 암시하기 때문에 집필 시기를 80년에서 90년사이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이탈리아의 어디에서 쓴 것이라 할 것이다. 1장4절-유다인의 사고방식에서는 조상들의 영광의 하나는 그들이 천사들의 보호 밑에 놓여 있고 또 그런 천사들과 사귀고 있다는 데 있었다(예를 들면 창18.2,32.2;출14.19 등).그리고 천사들의 개입으로 율법 받은 일을 자랑삼고 있었다(출 33.2;행7.38-53;갈3.19). 6절-신명기의 이 구절은 하느님께 대한 엄밀한 뜻의 예배를 요구하고 있고 그리고 이 말이 아들에게 응용되거 있는 것으로 보아 아들이 아버지와 공통으로 오직 하나인 참 신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4장4절-창2장2절 인용. 5절-시편 95편 11절 인용. 7절-시편 95편 7-8절 인용.9장 19절-박하묶음,히솝-우슬초 11장 1절-보증:실상.확증:증거,근거(한글개역,200주년) 5절-집회서(44.16,49.14)에서는 에녹이 특별히 받은 은혜를 암시하고 있다.그리고 바울로가 쓴 이 편지에는 "하느님께서 데려가시기 전부터"라고 하여 죽음이 그에게서 배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한다.이 곳에서 바울로는 그리스도 이전 및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에 있었던 유다의 전통을 나타내고 있었다(유다 고사 1.3.4 및 예루살렘 타르꿈 1).그러나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믿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에녹의 신비스러운 삶을 다룰 때 유다의 라삐들은 그 "데려 가시고"란 말을 예사로운 죽음의 의미로 해석하기 시작하였다.12장 23절-여기서는 그 특권이 영적인 세계로 높여져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고 있다.곧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사람들이다.어느 주해자는(그 중에서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 이 장자를 사도들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사도들이 이런 칭호에 합당하다고 하는 것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지만 여기서는 이 낱말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고 모든 신자가 같은 특권을 누리고 있다.그러나 시민의 권리를 누리는 데에는"하늘에 등록된다"는 것이 필요하다...."완전히 올바른 사람들의 영혼(한글 개역,영)"...이 영혼들은 구약과 신약의 죽은 사람들(베드로전서 3장19절과 4장 6절 비교하라)이며 벌써 인생의 종점에 이르러 하느님과의 일치의 완성을 보고 있다(10.14,11.39-40) . 27절-다시 한번 천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뒤흔들릴 때"피조물들을 ....없애 버린다" 곧 구약시대의 제도가 폐지되고 그 대신에"흔들리지 않는 것은 그대로 남아 있다" 곧 구약 시대의 연속을 가리키고 있다.예수님께서는 이미 비유로 새로운 포도주는 새로운 가죽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태오 9.17).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든가 세상의 종말에 있을 우주적인 동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히브리서
만일"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는 12.4의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이 말은 그 편지를 받은 공동체가 어느 정도의 박해를 받았지만 아직 신앙을 위해서 죽으라는 요구는 받지 않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여기에 예루살렘 교회는 제외되는 것 같다.만일 본 서신이 로마에 보내진 것 이라면 본서의 기록 연대는 A.D64년의 박해 이전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10.32 이하의 비교적 작은 박해는 A.D 49년년경 로마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12장 4절의 말이["피흘리기까지"가 실제로 피를 흘리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비유이고 또한 이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별로 자연스러운 방법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면연구범위는 굉장히 넓어진다.이렇게되면 수신자는 도미티안 시대[AD 81-96]에 있던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으며 10.32 이하의 사건은 A.D 64년의 것일 수도 있다.이 주석에서 임시로 채택한 견해는 A.D 64년 로마에서 박해가 일어나기 전에 본서가 기록되었으나 그다지 오래전은 아니라는 것이다. 1장4절-"보다 나은" 또는"더 좋은"[한글 개역:"...보다 얼마큼 뛰어남은"]이란 이 비교급 형용사는[better] 그리스도와 그의 새로운 제사를 그의 이전의 것과 대조하기 위해서 히브리서에서 13번 사용되어 있다.여기서는 그가 천사들보다 뛰어나다는 그의 우월성이 강조되어 있고 또 그것은 잇따른 구약 성경의 인용문에서 두 가지 특별한 이유로 諒述양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첫째, 아들에 의해서 전달된 하나님의 마지막 메시지는 율법에 수반된 것이나 천사들이 전달한 것보다 훨씬 더 권위있는 제재규정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2.2 이하] 둘째,아들이 중보자로서 다스릴 새로운 세계는 천사들에게 다스리라고 여러 나라에 할당한 낡은 세계보다는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2.5].천사들보다 더 뛰어난 아들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데는 일반적인 이유도 있을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것은 이 히브리인들에게 경고하고 있는"여러 가지 다른 교훈"[13.9] 이 골로새 교인들 가운데 소개된 천사 숭배 교리를 포함했을 경우를 전제조건으로 한다.하지만 이런 가정을 확실하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11장1절-히포스타시스[한글개역:"실상"]라는 말은 본 서신에서 이미 두 번이나 나왔다.1.3절에서 성자는 바로 하나님의 히포스타시스의 형상[한글개역,"그 본체의 형상"] 이라고 언급되어 있고,3.14에서는 신자들이 그들의 히포스타시스[한글개역,확실한 것] 로 시작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라고 언급되어 있다.전자에서는 이것이 "본체" 또는 [단순히 표면상 보기와는 반대로] "실질적 본질"이라는 객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고 후자에서는 "자신" 또는 "확신"이라는 주관적안 의미를 지니고 있다.여기서는 이 말을 3.14절에서와 동일한 주관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여기서는 이것이 앞서 말한 "확신"과 상당히 유사한 의미에서 신념[한글개역,"증거"]을 뜻한다.육체적인 시각은 보이는 것에 대한 확신과 증거를 만들어내지만 믿음은 사람들로 하여금[27절에서 모세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하는 기관이다.필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이지 않는 것을 붙잡는 것"과 결부시키고 있다.
국제성서주석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장4절-족보가 신화[꾸며낸 이야기]와 함께 언급되었기 때문에,그것들이 이 본문에서는 아브라함 자손들에 대한 유다적 증명이나 이스라엘의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증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키텔은 포로기 이후 유다교에 성경의 인물들에 대한 족보적 사변이 생겨났으므로 인해서 어떤 상황에서는 성경의 설명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이단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논의들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논의들 가운데서 시험에 빠졌었다는 사실은 바바 바트라[Baba Batra 91]에 의해 드러나고 있는데,거기에 보면 구약에 나오는 남자들을 나은 모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진술이 나온다."그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미님[이단자들]들에게 대답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목회서신에서는 전체 논쟁이 보여 주고 있는 바와 같이,성서 해석의 범위안에서 생겨난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지주의화해가고 있는 유다교가 문제가 되고 있다.구약의 족보적 연속을 신화적으로 이해하는 영지주의적 해석과 더구나 연속된 지배자들과 세대들에 대한 신화적 사변은 영지주의의 신학을 위해서는 아주 기본적인 것이지만 목회서신의 저자가 대표하고 있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신앙에는 치명적이다.
디도에 보낸 편지
1장12절-다음에 나오는 인용문의 저작자인 시인 에피메니데스는 아마도 그의 증거의 정확성 때문에 우리 저자를 예언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그러나 저자가 에피메니데스의 성격을 설명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키케로는 이 에피메니데스를"정신적 흥분이나 자유롭고 제약이 없는 어떤 감정의 영향아래서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자들 중의 하나로 계산하고 잇다.이 경우 우리는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음과 같은 본문을 비교해 볼 수 있다."에피메니데스가 말한 바와 같이 점쟁이들에 의해서도 이미 알려진 과거,....그러나 그는 미래를 점치지 않았고 다만 과거의 애매한 것들만을 점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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