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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10일 토요일

JOHN 1,2,3 GOOD NEWS

페데리꼬 바르바로

요한1서

이 첫째편지는 묵시록의 저술(90-96년)과 요한의 죽음사이의 기간으로 잡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5장16절-이"죽을 죄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죄인은 벌써 은총의 생명을 잃고 있기 때문에 대죄를 짓고 있으나 그러나 어떤 대죄라도 여기서 말하는 "죽을 죄"는 아닌 것 같다."옳지 못한 죄는 모두 죄입니다.그러나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이르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곧 여기서 말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죄란 성화 은총을 잃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잃는 것을 말한다.곧 생명의 샘이신 하느님의 아들과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며 벌써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으며 세례를 받아 일단 벗어난 죽음의 상태로 되돌아간(3.14;유다 1.12) 가르침을 버린 그리스도의 적을 말한다. 21절-우상이란 하느님 아닌 것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대상이다.사람의 행,불행을 좌우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시다.그러나 그 행,불행이 하느님 아닌 어떤 존재에게 달려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우상숭배자가 된다.현대 사회를 이른바 황금만능주의,물신주의라고도 하지만 그 숭배자가 얼마나 많은가! 사도 요한의 경고는 현대인에게 뜻있는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요한2서

1장9절-먼저 사도들이 전통의 가르침을 지켜야 할 것이다.더 완전한 계시라든가 더 뛰어난 그노시스때문이라고 구실로 그 가르침에 앞서 나가려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시지 않는 자"이다. 곧 하느님과의 일치를 잃었음을 나타낸다.

요한3서

이 가이오가 사도행전이나 바울로의 편지에 나오는 같은 이름을 가진 그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가이오라는 이름은 그 당시 흔한 이름이었다.그 대신 "사도령使徒令"이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베르가모의 주교로 삼고 그리고 데메드리오는 필라델피아의 주교였다고 말할 때 확실히 이 가이오를 암시하고 있다.그러나 이 공문서는 그렇게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9절-그리스말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디오드레페는 수석만을 노리는 질투심이 강한 사람이다"가 된다.여기서 디오드레페가 주교의 자리를 노리다가 그런 자격이 없다고 거절달했거나 혹은 주교였는데 어머니의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었는지는 모른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실제로 디오드레페의 이 행동에서 보면 그는 이미 주교였던 것 같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전하듯이 에페소 가까운 도시에 요한이 세운 주교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유세비우스 교회사)

유다서

기술연대는 유다의 편지를 앞세우든가 혹은 베드로의 둘째편지를 앞세우든가 함으로서 62-64년 혹은 64-70년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이 편지를 어디에서 쎃는지 명백하지 않다.그러나 교회에 대한 방문을 가까운 시일에 예정할 수 없다는 것을 보면 편지받은 교회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서 썼다고 생각할 수 있다.8절-이레네오와 에피파네오에 다르면 이런 사람들은 방종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이단자이며 천사들에게 그런 타락한 행위가 있었다는 구실 밑에 자기네의 수호자처럼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위에서 말한 방종한 생활은 특히 2세기 전반의 이단자 가르포쿠라데스에게 돌리고 이 사람의 그노시스는 시몬이라든가 니콜라이파의 오류 등과 연결되고 있다.그렇다고 한다면 이 편지가 말하는 음행자는 2세기의 방종한 그노시스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어쨋거나 이러한 사람들의 방종한 태도는 세계의 질서와 도덕의 파수꾼인(고전11.10) 천사들에 대한 신자들의 존경과 대립한다.9절-대천사 미카엘도 타락한 천사인 악마와 "논쟁할 대""모욕적인 언사로 단죄하지 않고"곧 조심스러움을 보여 주었다.그렇다면 앞서 든 천사들에 대한 음행자들의 태도는 더욱 나쁘다. 16절-위의 인용은 에녹서 1장 9절이다.적어도 해석자는 거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국제성서주석

요한의 첫째 편지

5장16절-레위기4.2이하,5.1이하,민수15.22 이하에 의하면 고의적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그 죄는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거나 혹은 하나님이 죽음으로 그 죄를 형벌하신다.....우리는 우선 올바른 믿음으로부터의 이탈,그리고 거짓 교훈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특히 2.22,4.3,5.12].그리고 그 점은 21절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그러나 죄에 관해 이미 발전된 사상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면,편집자가 일반적으로는 히브리서 10장26절의 "고의적으로 짓는 죄"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제멋대로 범하는 것을,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간음이나 살인처럼 나중에 가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여겨지게 된 중죄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주석가들의 다양한 노력이 지시해 주고 있는 바와 같이,어떤 한 가지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21절-"우상들"을 뜻하는 것 같지 않다.왜냐하면 그 경우 권면의 의미는 이교도 제사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요한1서 전체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경고와 또한 20절에 나타난 믿음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오직 거짓 교훈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은 "거짓 신들"의 의미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고린도 전서 8.4,7과 데살로니카 전서 1.9절 등등에서는 "거짓 신들"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요한의 둘째 편지

1장 9절-여기서는 거짓 교사를 따르는 자를 가리켜"지나치게 나간 자"로,즉 "머물러 있지 않다"는 표현이 보여 주고 있는 바와 같이 합법적인 교훈밖으로 나간 자로 규정하고 있다.물론 이것은 영지주의자나 영지주의라 하는 그리스도인들처럼 보다 높은 지식을 추구하거나 혹은 그런 지식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 대해 말해질 수 있다.

JAMES,PETER,GOOD NEWS

페데리꼬 바르바로

야고보서

야고보의 편지는 45년에서 50년사이에 갈릴레아의 북방에 있는 팔레스티나를 벗어난 바깥 지방에 이룩된 여러 교회에 보낸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가 있다.야고보는 예루살렘을 떠난 일이 없는 것 같으므로 이 편지는 확실히 예루살렘에서 보낸 것이라고 생각된다.1장9절-가난한 사람을 이렇게 높여 주시는 것은 이 세상의 신분이 바뀌고 마치 욥과 같이 물질적으로 혜택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또 뒤의 12절에 있는 것같이 직접으로 미래의 세계에서 받을 보상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그것은 오히려 참 지혜가 이 세상의 시련을 이용하여 이루는 윤리적 완덕 곧 산상수훈에 나오는 참된 행복의 정신을 말한다.발써 옛날의 유대인들은 메시아는 보잘 것 없는 자를 높이시고 시달린 사람들을 위로하신다고 말하고 있다."하느님 아버지는 변함이 없으시고 우리를 외면하심으로써"라고 한 번역은 "변화의 그림자조차 없으신"이라고 번역해야 더 좋을 것 같다."변화"란 그리스말은 주로 천문학에서 쓰는 말로 천체의 회전 또는 그런 운동을 가리키는데 그 빆에 온갖 변화를 말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다."그림자"란 뜻으로 보면 하느님의 빛에는 온갖 변화가 없으시다.혹은 어떤 변화에서 오는 그림자도 없으시다는 뜻이다.저자가 지닌 천문학적 말투를 따라 말한다면 어떤 천체의 변화로 말미암아 그림자가 생기고 빛이 닿지 않는 것을 말한다.3장5절-엄청나게 허풍을 떱니다,자랑만은 대단합니다,200주년;큰일을 한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개역한글.15절-이기적인 야심,야망,200주년;다툼,한글개역;희랍어,당쟁. 4장9절-"죄인들은 손을 씻고"예배에 앞서서 유다인은 곧잘 손을 씻었다(출30.19-21;레16.4).그러나 이런 말투는 옛날부터 자주 윤리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욥 17.9;시24.4;이사야1.15-16).바울로도 기도할 때에 드는 손을 깨끗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1 딤 2.8). 손 곧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깨끗할 뿐 아니라 마음도 그 의향도 깨끗해야만 한다.이러한 도덕면의 각오가 있다면 그리스도와 세속사이에 갈라져 있는 "두마음"은 사라질 것이다. 5장7절-비에 대한 이 암시는 그야말로 팔레스티나적이다.땅이 얕아 여름 햇볕에 타버리고 동쪽의 뜨거운 바람에 매말라 버린다.그래서 가을비가 내려 그 땅을 축여주지 않는다면 파종조차 하기 어렵다.그러나 가을비만이 아니라 이른 봄에도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수확이 위태로워진다.하지만 농부는 그 비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자신의 파종과 수확의 운명을 마련하시는 하늘의 은혜를 기다릴 뿐이다.농사의 성과를 주로 나일강에 의존하고 있는 에집트에서는 야고보의 이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어서 어느 텍스트에서는 농부가 빠른 수확과 늦은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격으로 되어 있다. 12절-사회의 무질서에서 온 싸움이나 분규의 와중에서 유다인은 경솔하게 맹세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맹세의 이 악용은 예수님께서 타이르셨을 뿐 아니라 탈무드에서도 말하고 있다.그것에 대한 반론은 퓔론에게서도 엣센파 사람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일상생활에서도 맹세를 하지 않아도 될 많큼 사회에서 진리가 존중되어야 한다."예 할 것은 예","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는 것으로 충분할 만큼 원할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14절-옛날 특히 무더운 나라에서는 기름의 약효가 널리 알려져 잇었다.한편 셈 사람들은 성소 혹은 예배의 도구를 축성할 때 흔히 기름을 사용하고 있었다.그래서 야곱은 베델의 돌에 기름을 발랐다.그리고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환자의 치유는 약보다는 하느님께 기대되고 있었기 때문에 기름의 종교적의미가 환자에게 기름으 바르는데로 옮아가고 있었음을 잘 알 수가 있다.극히 소박한 약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표시가 되기에 알맞았던 것이다.....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는"(병자)성사는 마르코의 글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암시되고 야고보에 의하여 신자들에게 공표되고 권고되었던 것이다"라고 정의하였다.15절-앓게 된다는 것은 반드시 죄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죄가 있다면 그것도 용서받는다는 것이다.작은 죄밖에 없는 사람의 상태를 여기서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3.2) 저자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대죄인 것 같다.위와같기 대문에 신학은 여기서 할 수 있다면 환자에게 죄를 고해할 의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병자성사만이 지닌 하나의 효과는 대죄를 사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트리엔트 공의회는 이 14절과 15절이 병자성사를 말하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이 성사의 집전자는 사제라고 정의하였다.

베드로 전서

베드로는 바빌론이라고 부르고 있는 로마에서 쓰고 있다....언제 쓴 편지인가? 64년 7월 네로의 박해가 시작되기 전이리라....이 편지는 63년 6월에서 64년 6월 사이에 쓴 것이라 할 수 있다.1장 10절-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메시아의 오심이 언제 쯤인가 알려고 탐구하였으나 그 연구에 있어서"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지도하고 계셨다.보울드는 예언자를 이끌고 있었던 성령이 그리스도 자신을 이끄시는 성령이라는 뜻으로 취하였지만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현존이고 이 영원히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옛날의 계약의 중심지이시며(1고린토 10.4-9;유다1.5) 또 자신의 성령으로 예언자에게 神感신감을 주신다.2장2절-그러한 몹쓸 악 대신 새로 태어난 신자는"갓난 아이처럼"가르침이란 젖을 마셔야 한다.새로 태어난다는 비유는 계속된다.그리스도인은 믿음과 세례로 다시 태어났으나 하늘의 영광에 이르기까지는 계속 자기 성장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따라서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자라듯이 영적 생활에 있어서 믿음의 정신은 순수한 복음이라는 깨끗한 젖을 갈망하고 마시면서 자라야만 한다.9절-민족:족속,개역한글,겨레:나라,개역한글. 3장19절-영혼:영,개역한글[4.6,"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히브리서12.32,"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과비교하라.].죽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은혜와 수난의 은혜를"갇혀있는 영혼들에게도"가지고 가신다."갇혀 있다"는 말은 묵시록 1장 7절에 있는 고성소(셰올)의 감옥을 가리킨다.이 어두움의 늪에는 유다서 1장6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악한 천사가 사슬에 매여 있다.그러나 이 이상스러운 고성소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거처가 있고 제도도 저마다 다르게 나타나 있었다.구약성서의 가장 새로운 문헌은 셰올 안에서도 의로운 사람의 거처와 죄인의 거처를 구별하고 있고(지혜3.1이하) 또 예수님께서 한족 거처에서 다른 거처로 옮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루가 16.26).신약성서에서는 의로운 사람의 짐이 아브라함의 품(루가 16.22) 새로운 낙원,하늘나라(루가 23.43)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그리스도께서 셰올에 가셨다고 한 이 선언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그리스말인 '케룩스'는 쓰라린 소식과 좋은 소식의 어느 어느 쪽 선포에도 사용할 수가 있다.그러나 여기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속죄의 결과를 다루고 있는 그 전후관계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가셨다는 것을 쉽게 추리할 수가 있다.[카톨릭,동방정교회,성공회,루터교,감리교는 견해가 동일하다]



베드로후서

1장 5-7-진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방종한 영지주의자와 달리 자기 훈련을 하는 사람들이다.여기에서 절제는 특별히 성적인 금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자기 훈련을 의미한다....인내는 아마도 절제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스스로를 훈련하는 사람은 인내할 수도 있다.그런 사람은 진실로 경건한 자이기도 하다.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경건은 제의적인 숭배나 경외심으로 가득찬 두려움이 아니라 경건한 삶이요,경건을 도덕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참조.3.10]그러나 이 경건은 공동체내에서 형제애로 나타나며 저자의 경우에도 이것은 형제애로 끝나지 않고 사랑으로 귀결된다.이 사랑은 본래 형제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듯 하다[참조,데살전 3.12,갈라6.10,마태5.43 이하].



국제성서주석

야고보서

5장14절-기도에 대한 이 지적을 통해"기름이 갖는 그 어떠한 마술적 효력도 여기에서 완전히 배제된다"[greeven].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기름바름은 따로 떨어져서는 안된다.이 상징적인 행위의 효력은 기도로부터 나온다.즉 기름바름은 기도로 시작되고 기도로 끝마쳐진다.

정명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베드로의 편지를 성 베드로 만년의 몇 달전에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그것은 이 편지에서 저자가 죽음이 임박한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베드로의 첫째 편지의 암시라고 생각되는 것도 63년 가을을 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한다.따라서 64년에서 67년사이 그 중에서도 아마 64년 전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그렇다면 쓴 곳은 로마라고 말할 수 있다.

베드로후서

1장5-7절-그리스도인은 모든 올바른 관계의 시작이 되는 믿음에 덕을 더해야 한다.그리스말 아레테는 오히려 곧바른 것 결백하고 정직하다는 뜻이지만 이것을 가지고 있다면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을 쉽게 얻게 한다.이 지식은 믿음의 정신이라고 하는 깨끗한 마음에 흔히 있는 실제적인 지식이다.이리하여 그리스도인은 거짓 교사에게서 오는 위험에 대하여 미리 보호받고 있다.그리스도인은 또한 초자연적인 진리를 바르게 평가하고 피조물을 이용함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절제"를 한다.그리스도교적 절제는 때로는 괴로운 것이기도 하지만 앞에서 말한 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인내" 힘있게 견디어내고 참을 수 있다.그리고 그 인내의 효과는 하느님을 섬길 때 가장 자유스럽고 가장 무사한 "경건"을 얻게 한다.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하느님의 계명은 형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1벧 1.22)"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십시오"형제에 대한 사랑은 아가페 곧 그리스도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고 또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큰 사랑을 낳게 하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모든 형제를 품게 되고 온 인류에 사랑으로 나타난다.후에 이냐시오가 말한 것 같이 믿음은 출발점이고 사랑은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종점이다.바울로에 있어서도 사랑은 모든 덕을 하나의 단단한 다발로 묶어 주는 것이다(골3.14;1고 13.1이하)



성서주석 48- 박창환 & 김경희

4장6절-3장19절에서는"전파하셨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라고 함으로써 그 전파의 내용이 밝아졌다.하나님은 공의로 남김없이 모든 인간을 심판하실 것이다.그러나 공의로울 뿐 아니라 자비로운 분이시기에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이전에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신 것으로 베드로는 믿고 있다.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은 자들이 사람인지라 복음을 믿고 사는 삶은 영원한 것이다.

TIMOTHY,TITUS,HEBREWS,GOOD NEWS

페데리꼬 바르바로

디모테오 전서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는 거의 같은 시기에 쓴 것이다.65년 경에 마케도니아에서 썼으리라고 생각된다....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로마의 감옥에서 쓴 것이다. 1장4절-"꾸며낸 이야기"는 현실과 맞지 않는 것 곧 역사와 진리에 어긋난 것을 의미한다....."하느님의 계획"이라고 한 말은 그리스말 오이코노미아의 번역이다....여기서 사람의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라기 보다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너그러운 태도를 가리키고 그래서 이 말은 "분배"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5절-맑은 양심-고운 양심,200주년;선한 양심,개역 한글. 10절-"건전한 교설"-건전한 가르침(정통의 사도적 가르침),200주년;바른 교훈(건전한 교훈),개역한글.-이라는 말은 목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주 나오지만(2딤 4,3;딛 1,9. 2,1).신약성서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는다.그런데 바울로와 같은 시대의 어떤 저자는 이성에 맞는 지혜,현명한 가르침을 가리키기 위하여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퓔론,디로의 막시무스). 바울로도 이 말을 거기서 취했을런지도 모른다. 20절-바울로가 이렇게 심하게 비난한 것을 보면 구리 세공 알렉산드로인지도 모른다.바울로는 에페소를 떠나기 전에 이 두사람에게 대하여 해야 할 처분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이 두사람은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말하는 파문이 아니고 육신 면의 악(병)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던 사탄에게 맡긴다는 의미로 결국 사탄이 이 두 악한 신자의 몸에 해를 주지만 그대로 버려둔다는 말이다.그러나 이것도 둘을 맑은 양심으로 되돌아오게 하려고 하는 구원을 위한 교정수단이었다. 2장 12절-"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3장 6-9절에 더 분명하게 지시되어 있는 것처럼 교활한 거짓 교사에 좌우되어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고 있는 여성을 가리키고 있다. 3장 2절-테르툴리아노 이후 이 말은 감독인 사람에게는 재혼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왔다.바울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7장 39절에서 재혼을 허락하고 있다(1딤 5,14 참조).그러나 동시에 그런 것은 이상적인 것은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다.헤르마스의 목자도 재혼을 인정하지만 권하지는 않았다.또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바울로가 이 말로써 감독의 결혼을 의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리고 실천하기 어려운 이 독신 생활을 당시 갓 신자가 된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감독에게 결혼을 허용하면서도 아내가 죽은 후 재혼을 금하였던 것 같다. 3절-"난폭하지 않고"(딛 1,7)라는 말이 이것을 분명하게 해준다.이 낱말을 싸움건다는 뜻으로 부드럽게 풀이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리스말에서는 폭력으로 남을 때리는 사람을 의미한다. 8절-근엄하고-품위가 있고,200주년;정중하고,개역한글. 10절"먼저 시험을 받아야 하고" 이 표현을 보고 보조자를 위한 특별한 수련기간이 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시험이란 이런 일에 뽑히는 사람에게 흠이 있는가 없는가 알아 본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11절-근엄해야-정숙해야,개역한글;품위가 있고,200주년...여러모로 생각해보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16장1절에 나오는 페베와 같은 여신도들의 물질적인 원조를 돌보아주던 여성 보조자가 아닌가 생각된다.페베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디아코노스라고 하였다.그러나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봉사하는 자"로서 남성에게나 여성에게나 다 쓸 수 있는 말이다. 16절-"성령이 그 본성을 입증하셨으며"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있었던 영의 나타나심을 암시하거나 혹은 부활 후에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에 들어 가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천사들이 그분을 보았으며"...그리스도의 하늘에 있어서의 승리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4장 5절-결혼의 금지에는 물질이 본질적으로 악이기 때문에 그것을 늘이는 것이 문책받을 일이라고 가르친 그노시스파의 싹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아직 엄밀한 뜻의 엔크라티즘(폐쇄적 금욕주의)이라 할 수 없다.왜냐하면 신약성서 거의를 부정하고 있던 이 극단의 금욕주의는 2세기가 되어서야 크게 번진 것이기 때문이다.이 이단설에 대하여 바울로는 여기에서 비칠뿐 오히려 음식의 금지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고 있다. 7절-속된 이야기-저속한,200주년;망령되고 허탄한 신화,개역한글;망령되고 저속한 신화,ICC. 5장 16절-곧 이런 여신도들은 몇몇 과부들을 모아 보호하거나 돌보았던 것 같다.과부들이 이렇게 모여 산 것은 물질적이거나 생활상의 이유 때문만은 아니 것 같다.곧 아직은 정식 수도단체라 하기 어려웠지만 그 싹이었다.바울로는 이 신도들에게 이 사업을 이어가도록 간청한다.그리고 그런 청을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의지할 때가 없는 과부에 대한 교회의 원조사업이 쉽게 이루어 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따라서 이런 집단은 교회가 과부로서 인정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6장 20절-"속된 잡담"-속된 헛된 소리,200주년;망령되고 헛된 말,개역한글."거짓된 지식에서 나오는 반대이론"-거짓된 지식의 반론,개역한글;사이비 반론,200주년.

디모테오 후서

1장4절,여기서 말한 눈물이란 스승에 대한 제자의 사모의 표시일 뿐 아니라 무엇인가 괴로웠던 사건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드로아스에서 있었던 체포를 암시하였는지 모른다(4,13).그 때 디모테오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끌려가는 스승을 보고 디모테오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6절-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4장 14절과 거의 같은 권고를 되풀이이지만 "원로들이 그대에게 안수하며"대신에 "내가 그대에게 안수하였을 때"로 되어 있다.이 예식은 50년 경 바울로가 리스트라에 머물러 있을 때 이루어졌을 것이다.그 도시의 권위있는 신자들은 디모테오에 대하여 좋은 평판을 하였고 그 후에 바울로는 디모테오를 자기 일행에 끼게 하였다.이 권위있는 신자는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4장14절에서 말한 "원로들"이며 디모테오의 신품성사는 그 교회의 원로들과 교회의 창설자인 바울로가 함께 하였을 것인데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단 첫째 편지의 경우(4,14)는 공식적인 면에서 말한 것이며 거기에 대하여 여기서는 실질적이고 개인적인 면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나의 안수"라고 하였다.18절-배경은 에페소를 수도로 삼은 아시아주이지만 4장1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드로아스도 포함된다.이 지방에서는 바울로에게 몹시 괴로운 사건이 일어났다.그러나 디모테오도 알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암시할 뿐 자세하게 말하고 있지 않는다....."오네시포로의 가족" 또는 "오네시포로의 집안"이라는 말투를 쓰고 있다.이것은 오네시포로가 그동안에 이미 죽었다는 뜻으로 취해야 할 것인지 확정할 수가 없다. 18절에 나타나 있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빈 소망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하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2장22절-청춘의 욕정-청년의 정욕,개역한글. 23절-유치한-몰상식한 200주년;무식한,개역한글. 3장6절-"죄에 빠져 있는 아낙네들"...경박한 여자를 멸시하는 말이다.이러한 여자들은 마음이 변하기 쉽고 꼬투리를 잡아 스승을 바꾸어 치고 침착하지 못하며 여러가지 가르침에 귀를 귀울이나 항상 방황한다.분별이 없고 호기심만이 강한 여자는 벌써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 14장 35절,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2장 12절에 등장하고 있다.마침 초대교회의 시기에는 특히 지식면에서 부인들 가운데서 해방의 기운이 커가고 있었다. 8절-유다측에는 이 둘에 대한 전설이 있다. 11절-안티오키아와 이고니온과 리스트라에서 일어난 사건은 사도행전으로 자세히 알 수 있고(13,50.14,2.19).이것은 바울로의 첫 번째 전도여행 때인 46년과 49년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사도행전의 기술에 따르면 바울로가 처음 디모테오를 리스트라에서 알게 되었는데 바울로가 여기에 온 것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와 이고니온에서 전도한 뒤였다. 4장10절-"데마"는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14절과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24절에서 로마에 있는 바울로 측근의 한 사람으로 나타나지만 뒤에"이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바울로 곁을 떠나 갔다.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데마가 믿음을 버렸다고 할 수 없다.그러나 골로사이인에게 보낸 편지 4장14절의 암시에서는 상당히 냉냉한 느낌이 있는데 부정할 수는 없다. 13절-양피지는 구약성서였을 것이다. 16절"내가 처음으로 재판정에 나갔을 때"란 말은 63년 초 황제의 재판 전에 이루어진 재판을 암시했을 까닭이 없다.그때는 무죄로 풀려났고 그 후 디모테오와 몇 차례 만났으며 이미 디모테오가 알고 있는 것을 여기서 다시 쓸 필요가 없다.또 최초의 옥중생활이라면"모두가 버리고 다 가버렸습니다"라고 할 수 없다. 왜? 디모테오를 포함하여 그때에는 많은 사람이 곁에 있었으며 바울로를 버리지 않았다.그렇다고 한다면 이 "처음으로 재판정에 나갔을 때"란 두번째 옥중생활을 의미하고 로마 황제가 한 최초의 제2심을 암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디도서

1장2절-[시간이 시작하기 전에 하느님의 목적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확정지은 것이 시간안에 이루어졌음을 언급하는 것이다.ICC] 12절-바울로는 그 증명으로서 "그들 중의 한 사람".어느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였다.이방인인 이 작가를 예언자라고 부르는 것은 좀 이상한 느낌이 있으나 단지 시인이라고 한 뜻이었을 것이다.바울로가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시인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예로니모에 따르면 그레데의 에피메니데스(기원 전 6세기)였다고 한다.이에 대하여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로스와 테오도레토스는 적어도 이 시구 앞부분은 가리마코스(기원 전 3세기)에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13절-"유다인의 꾸며낸 이야기"란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가 없으나(딤1,4) 족보와 천사들에 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진리를 저버린 인간의 명령"(골2.8,22) 16절-밉살스럽고 완고해서-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한자,개역;흉측하고 순종하지 않는자,200주년.3장13절-제나를 법률가라고 하였다.율법학자 곧 유다 율법의 법률가가 아니라 로마법의 전문가인 것 같다.

히브리서

로마에 대한 유다인의 국수주의가 폭발한 것은 66년 경이었다.이 편지가 집필된 것은 그보다 좀 앞선 곧 64-65년 경이었다.한편 책의 내용이 저자를 사도시대로 암시하기 때문에 집필 시기를 80년에서 90년사이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이탈리아의 어디에서 쓴 것이라 할 것이다. 1장4절-유다인의 사고방식에서는 조상들의 영광의 하나는 그들이 천사들의 보호 밑에 놓여 있고 또 그런 천사들과 사귀고 있다는 데 있었다(예를 들면 창18.2,32.2;출14.19 등).그리고 천사들의 개입으로 율법 받은 일을 자랑삼고 있었다(출 33.2;행7.38-53;갈3.19). 6절-신명기의 이 구절은 하느님께 대한 엄밀한 뜻의 예배를 요구하고 있고 그리고 이 말이 아들에게 응용되거 있는 것으로 보아 아들이 아버지와 공통으로 오직 하나인 참 신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4장4절-창2장2절 인용. 5절-시편 95편 11절 인용. 7절-시편 95편 7-8절 인용.9장 19절-박하묶음,히솝-우슬초 11장 1절-보증:실상.확증:증거,근거(한글개역,200주년) 5절-집회서(44.16,49.14)에서는 에녹이 특별히 받은 은혜를 암시하고 있다.그리고 바울로가 쓴 이 편지에는 "하느님께서 데려가시기 전부터"라고 하여 죽음이 그에게서 배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한다.이 곳에서 바울로는 그리스도 이전 및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에 있었던 유다의 전통을 나타내고 있었다(유다 고사 1.3.4 및 예루살렘 타르꿈 1).그러나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믿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에녹의 신비스러운 삶을 다룰 때 유다의 라삐들은 그 "데려 가시고"란 말을 예사로운 죽음의 의미로 해석하기 시작하였다.12장 23절-여기서는 그 특권이 영적인 세계로 높여져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고 있다.곧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사람들이다.어느 주해자는(그 중에서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 이 장자를 사도들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사도들이 이런 칭호에 합당하다고 하는 것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지만 여기서는 이 낱말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고 모든 신자가 같은 특권을 누리고 있다.그러나 시민의 권리를 누리는 데에는"하늘에 등록된다"는 것이 필요하다...."완전히 올바른 사람들의 영혼(한글 개역,영)"...이 영혼들은 구약과 신약의 죽은 사람들(베드로전서 3장19절과 4장 6절 비교하라)이며 벌써 인생의 종점에 이르러 하느님과의 일치의 완성을 보고 있다(10.14,11.39-40) . 27절-다시 한번 천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뒤흔들릴 때"피조물들을 ....없애 버린다" 곧 구약시대의 제도가 폐지되고 그 대신에"흔들리지 않는 것은 그대로 남아 있다" 곧 구약 시대의 연속을 가리키고 있다.예수님께서는 이미 비유로 새로운 포도주는 새로운 가죽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태오 9.17).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든가 세상의 종말에 있을 우주적인 동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히브리서

만일"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는 12.4의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이 말은 그 편지를 받은 공동체가 어느 정도의 박해를 받았지만 아직 신앙을 위해서 죽으라는 요구는 받지 않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여기에 예루살렘 교회는 제외되는 것 같다.만일 본 서신이 로마에 보내진 것 이라면 본서의 기록 연대는 A.D64년의 박해 이전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10.32 이하의 비교적 작은 박해는 A.D 49년년경 로마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12장 4절의 말이["피흘리기까지"가 실제로 피를 흘리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비유이고 또한 이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별로 자연스러운 방법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면연구범위는 굉장히 넓어진다.이렇게되면 수신자는 도미티안 시대[AD 81-96]에 있던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으며 10.32 이하의 사건은 A.D 64년의 것일 수도 있다.이 주석에서 임시로 채택한 견해는 A.D 64년 로마에서 박해가 일어나기 전에 본서가 기록되었으나 그다지 오래전은 아니라는 것이다. 1장4절-"보다 나은" 또는"더 좋은"[한글 개역:"...보다 얼마큼 뛰어남은"]이란 이 비교급 형용사는[better] 그리스도와 그의 새로운 제사를 그의 이전의 것과 대조하기 위해서 히브리서에서 13번 사용되어 있다.여기서는 그가 천사들보다 뛰어나다는 그의 우월성이 강조되어 있고 또 그것은 잇따른 구약 성경의 인용문에서 두 가지 특별한 이유로 諒述양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첫째, 아들에 의해서 전달된 하나님의 마지막 메시지는 율법에 수반된 것이나 천사들이 전달한 것보다 훨씬 더 권위있는 제재규정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2.2 이하] 둘째,아들이 중보자로서 다스릴 새로운 세계는 천사들에게 다스리라고 여러 나라에 할당한 낡은 세계보다는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2.5].천사들보다 더 뛰어난 아들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데는 일반적인 이유도 있을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것은 이 히브리인들에게 경고하고 있는"여러 가지 다른 교훈"[13.9] 이 골로새 교인들 가운데 소개된 천사 숭배 교리를 포함했을 경우를 전제조건으로 한다.하지만 이런 가정을 확실하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11장1절-히포스타시스[한글개역:"실상"]라는 말은 본 서신에서 이미 두 번이나 나왔다.1.3절에서 성자는 바로 하나님의 히포스타시스의 형상[한글개역,"그 본체의 형상"] 이라고 언급되어 있고,3.14에서는 신자들이 그들의 히포스타시스[한글개역,확실한 것] 로 시작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라고 언급되어 있다.전자에서는 이것이 "본체" 또는 [단순히 표면상 보기와는 반대로] "실질적 본질"이라는 객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고 후자에서는 "자신" 또는 "확신"이라는 주관적안 의미를 지니고 있다.여기서는 이 말을 3.14절에서와 동일한 주관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여기서는 이것이 앞서 말한 "확신"과 상당히 유사한 의미에서 신념[한글개역,"증거"]을 뜻한다.육체적인 시각은 보이는 것에 대한 확신과 증거를 만들어내지만 믿음은 사람들로 하여금[27절에서 모세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하는 기관이다.필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이지 않는 것을 붙잡는 것"과 결부시키고 있다.



국제성서주석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장4절-족보가 신화[꾸며낸 이야기]와 함께 언급되었기 때문에,그것들이 이 본문에서는 아브라함 자손들에 대한 유다적 증명이나 이스라엘의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증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키텔은 포로기 이후 유다교에 성경의 인물들에 대한 족보적 사변이 생겨났으므로 인해서 어떤 상황에서는 성경의 설명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이단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논의들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논의들 가운데서 시험에 빠졌었다는 사실은 바바 바트라[Baba Batra 91]에 의해 드러나고 있는데,거기에 보면 구약에 나오는 남자들을 나은 모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진술이 나온다."그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미님[이단자들]들에게 대답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목회서신에서는 전체 논쟁이 보여 주고 있는 바와 같이,성서 해석의 범위안에서 생겨난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지주의화해가고 있는 유다교가 문제가 되고 있다.구약의 족보적 연속을 신화적으로 이해하는 영지주의적 해석과 더구나 연속된 지배자들과 세대들에 대한 신화적 사변은 영지주의의 신학을 위해서는 아주 기본적인 것이지만 목회서신의 저자가 대표하고 있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신앙에는 치명적이다.

디도에 보낸 편지

1장12절-다음에 나오는 인용문의 저작자인 시인 에피메니데스는 아마도 그의 증거의 정확성 때문에 우리 저자를 예언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그러나 저자가 에피메니데스의 성격을 설명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키케로는 이 에피메니데스를"정신적 흥분이나 자유롭고 제약이 없는 어떤 감정의 영향아래서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자들 중의 하나로 계산하고 잇다.이 경우 우리는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음과 같은 본문을 비교해 볼 수 있다."에피메니데스가 말한 바와 같이 점쟁이들에 의해서도 이미 알려진 과거,....그러나 그는 미래를 점치지 않았고 다만 과거의 애매한 것들만을 점쳤다."

THESSALONAIANS,GOOD NEWS

페데리꼬 바르바로

데살로니카 전서

이 편지는 50년말이거나 51년초에 쓴 것 같다....부르제가 1905년에 발표한 비문에 따르면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고린토에 취임한 것은 글라우디오 황제 12년째 곧 서기 52년 경의 일이라고 생각된다.바울로가 이 지방총독 앞에 선 것은 갈리오가 고린토에 온 직후 4,5개월경이라고 생각된다.이 때 바울로는 18개월 전부터 고린토에 살고 있었다.(행 18,11) 따라서 50년 말경에 고린토에 온 셈이다.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를 쓴 연대는 앞서 말한 史實사실로 결정되지만 몇 달이란 간격이 있을 수 있다....최근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와 둘째 편지의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부분,마태오(24장-25장)의 종말론적 부분과의 신비스러운 유사함이 주목받게 되었다.이 유사함은 말 뿐만 아니라 사상에도 있다.프룸멜은 이렇게 썼다."바울로가 이 두 편지를 받아 쓰게 하고 있을 때 마태오의 종말론적인 가르침의 부분은 벌써 그가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의 마음 속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극단적인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바울로는 마태오 복음서를 알고 있었다고 단언해도 무방할 것이다.이 신비스러운 유사점을 인정한다면 아람말인 마태오복음서가 옛부터 말해온 것 같이 서기 42~50년 사이에 기록되었다는 주장에는 매우 유리한 거점이 있다. 2장2절-필립비에서 겪은 사건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을 보아 주기 바란다.(16,11-40) 바울로는 이곳에서 로마인의 관원에게 태형을 받고 투옥을 경험했다. 18절-바울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막으려는 구실을 가진 악마의 짓거리를 거기서 보았다.그런 사고 방식은 다른 성인들도 자주 사용하였다.예를 들면 대성 데레사는 건축중인 수도원의 벽이 무너내리자 그것을 악마의 짓거리라고 하였다.아르스의 본당 신부도 침대의 이불에 불을 붙이거나 가구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을 악마의 짓거리라고 말했다. 5장 19절-성 아우구스티노는 "성령"을 성령의 위격이란 뜻으로 보며 죄를 지어 자신의 마음에서 성령을 쫓아 낸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그러나 금구 성 요한의 해석 쪽이 더 좋을 것 같다.곧 여기서 말하는 성령은 성령의 특별한 선물 곧 이상한 언어를 푸는 것,예언 등을 말하고 있다.데살로니카에 있는 어떤 "게으른 자"는 자기 생각을 거스르는 그런 성령의 은사를 의심했을지 모른다.바울로는 신자 일반 특히 교회의 지도자를 향하여 성령의 선물을 소중히 여기라고 권하고 있다. 20절-이 예언은 미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덕을 세우고 권하고 위로하는 것(1고린토 14,3) 등을 말하는 성령의 선물을 가리키고 있다(1고린토 14장). 21절-예언의 은사를 받은 형제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좋으나 분별없이 무엇이든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가짜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신비적인 현상에 대해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신중한 태도를 취하지만 그것은 초대부터의 관례가 되어 왔다.교회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도 항상 신앙과 이성에 조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데살로니카 후서

이 편지는 고린토에서 쓴 것이다....부르제가 1905년에 발행한 "델포스의 비문"에 따르면 이 편지는 51년 말이나 52년 봄에 쓴 것이라고 단정해도 좋다. 2장 4절-"하느님의 성전"은 성 이레네오가 쓰고 있듯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성 금구 요한이 말하듯이 하느님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일까? 바울로의 말은 "하느님의 성전에 자리잡고 앉아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이라고 지정한 특정 장소라기 보다 더할 나위 없는 오만불손을 나타낸 하나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3절-"악한 사람"이란 하느님을 배반하는 반역자이다.그리스말로 말하면 법을 어기는 자(요한 1서 3,4),곧 죄인을 말한다....옛 학자 거의는"그리스도의 적"(단수)이라고 해석하였으나....6절-많은 교부와 현대 학자 거의는 <붙드는 자>가 로마제국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엮인 글- http://blog.naver.com/evangerlist/150015265801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사도행전 18.12절은 갈리오 총독에 대하여 언급한다.이 갈리오 총독이 글리우디오 황제에게 문의한 내용과 그 황제의 답신이 델피에 있는 한 비문에서 발견되었다.그 연대는 글라우디오가 호민관으로서 치세한 지 12년째 되는 해였으며,황제로 추대된 지 26년 후였다.12년째 되는 해는 주후 52년1월25일~53년1월24일에 해당한다.즉위 26년째의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음해 즉위 27년째는 52년8월1일 이전이었다. 그것은 황제의 결정이 이보다 앞선 수개월의 기간내에 내려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그래서 그 때는 주후 52년의 후반기보다는 일렀을 것에 틀림없다.총독들은 관례상 이른 여름에 임무를 맡았다.그 점은 갈리오가 52년에 그 임기를 시작하였다고 보기가 어렵게 만든다.그가 직무를 맡아서 난관에 부닥치고 글라우디오에게 문의하여 그의 대답을 받았다는 것이 그 시간으로는 가능할 것 같지 않다.그는 1년 먼저 즉 51년에 총독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사도행전 18장은 바울이 갈리오 총독에게 불려간 것이 굉장히 빨라 보이기는 하지만 총독이 된지 어느 때 쯤인지는 말하지 아니한다.사도 바울은 18개월 동안 고린도에 있었다[행18.11].그러나 다시 우리는 이 기간 중 어느 시점에 갈리오에게 나아가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그 때쯤 바울은 분명히 꽤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었던게 분명하다.그러나 그 때가 고린도에 있던 마지막 때는 아니었다[행18.18].모든 것을 종합하여 볼 때 바울은 갈리오가 도착하기 1년 전 이상을 고린도에 있었던 것이다.아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갈리오가 51년 초여름에 총독이 되었으며,바울은 50년 전반기에 고린도에 왔다고 말하는 것이다.데살로니가 전서는 그러므로 50년 전반에 쓰여졌을 것이다.이 연대는 근사치로 간주되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이미 지적한 것에 또 다른 어떤 것들이 첨가되어야 한다.총독들을 때때로 회기를 1년으로 하지 않고 2년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그래서 갈리오가 고린도에 도착한 것이 우리가 이제까지 생각하여 온 것보다 더 먼저 인지도 모른다.이 서신의 연대는 우리가 생각한 연대에 비해 한두 해의 오차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그러나 그 이상 오차가 나기는 어려울 것이다.모든 주석가들은 거의 데살로니가전서가 50년 전반기에 쓰여졌음이 틀림없다고 인정한다.우리가 알아본 바와 같이 후서는 전서가 쓰여진 후 수주간내에 기간내에 쓰여졌다는 확실한 시사가 있다.비추어진 상황이 동일하고,같은 류의 충고가 주어지고 있다.전서가 쓰여진 후 짧은 기간 내에 쓰여졌다는 것을 확증하는 또 다른 요점을 바울이 사도행전 20장 1절이하에 기록된 대로 마게도냐를 방문하고 그 지역들을 지나서 많은 권면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서 떠오른다.데살로니가후서는 이보다 앞서 쓰여졌어야 한다.왜냐하면 데살로니가전서의 상황과 아주 같은 상황이 후에 감옥에서 그 문제를 다룰 기회가 있었을 때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사도행전 20장에 이르는 기간동안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함께 있었던 곳은 고린도 밖에는 모른다.그러므로 데살로니가후서는 전서와 같이 고린도에서 쓰여 졌다.이것은 두 서신의 연대를 같게 해준다.데살로니가후서가 다른 시기에 썼다고 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EPHESIANS PHILIPPIANS,COLOSSIANS,PHILEMON,GOOD NEWS

페데리꼬 바르바로

에페소서

우리들은 에페소서,골로사이서 그리고 필레몬서라는 차례를 지지하고 그러나 거의 같은 때인 62년 가을에 기술되었다고 추정한다.더욱 큰 신뢰를 보여 옥중생활의 끝을 알려 주고 있다고 여겨지는 필립비서는 63년 봄에 쓴 편지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1장4절-천지창조이전에,희랍어로는 before the foundation(기초,씨뿌림,임신,창설) of the world. 9절-심오한 뜻:신비,200주년;비밀,개역한글. "미리 세워 놓으셨던 계획대로: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개역한글. 2장1절-허공:대기권,200주년;공중,한글개역."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이라는 말은 허공에 자신의 세력을 나타내기 때문에(성 예로니모,쁘라,보스떼) 또 허공을 돌아다니는 악한 세력의 머리(베르셀,구나벤바우엘)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3장11절-작정하신:마련하신,200주년;예정하신,개역한글....영원한 계획:희랍어 the purpose of the ages.4장6절-만물을 꿰뚫어 계시며:만유를 통일하시고,개역한글;모든 이를 통하여,200주년.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섭리에 따라 우리를 당신의 계획도구로 쓰신다.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있는 이웃에 대한 크나 큰 존경과 자애심이나 이기심때문에 하느님의 이 섭리를 피하려고 하는 위험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져야 할 것이다. 7-9절-바울로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높은 곳에서 사람에게 그 선물을 분배하고 계심을 증명하기 위하여 시편 68편 18절을 인용하고 있다.역사적으로 말하면 이 시편은 승리한 후에 개선행렬을 짓고 성궤를 시온산으로 장엄하게 운반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포로들은 성궤뒤를 따르고 풍부한 전리품은 주님께 봉헌된다.바울로는 70인역에 따라 인용하고 있다.그러나 히브리말과 70인역에서는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으시는 이는 하느님이시며 편지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다.얼핏 보아 텍스트에서 벗어난 것같이 느껴지는 이 해석은 오랜 전통에 근거를 두고 하는 것이다.시편에 관한 따르꿈은 이런 말을 모세에게 응용하고 있다."당신은 높은 데에 올라가 율법을 배우고 그리고 이것을 선물로서 사람에게 주었다" 또 타르꿈의 다른 곳에서는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당신은 사람을 위하여 선물을 받았다" 곧 타르꿈에 들어가기 까지에는 이미 유행하고 있던 번역이나 해석이 있었는데 바울로는 이에 따르고 있었다.성궤와 함께 시온산에 운반된 전리품은 승리의 권리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것이었으나 하느님께서는 적어도 그 중의 어느 부분은 백성에게 나누어 주신다..."사로잡힌 자들을 데리거"사로잡은 이란 말은 바울로가 별로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이후 다른 곳에 응용되지 않았다.완전한 승리의 개념을 주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수사와 같아서 그 사로잡은 사람이 누구를 가르키려 했던가 물을 필요도 없다.그렇지만 이것은 여러가지로 시도되었다.금구 성 요한은 "죄,악마,죽음을 가리켰다"고 하며 이것들은 모두 패배한 존재였다.성 예로니모,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가 임보(고성소,개신교는 중간상태라고 한다)에서 구해내신 의인들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였다.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 가셨다는 말은 그분이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것을 전제하고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그분은 승리의 영광을 받으셨다. 곧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승천이 뚜렷이 표명되고 있다.예수님게서는 "땅 아래 세계에 내려가셨다."어떤 저자들은 땅 아래 세계라 한 곳은 임보 곧 고성소를 가리키고 있다고 하였다.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임보 곧 하늘에 들어가기 전에 의인들이 살던 집으로 내려 가셨다는 교의면의 중요한 텍스트가 있는 셈이 된다.그러나 아래의 세계라는 말은 하늘에 비하면 낮은 데에 있는 이 세상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바울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물을 사람들에게 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스스로 낮추신 데에 대한 보상으로 올라 가셨던 것이다.낮은 곳에 내려가셧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낮추심을 가르키기 위한 말이기도 하지만 만일 이것을 고성소라고 해석한다면 이미 자기비하가 아니고 오히려 구세주의 승리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다.그런 까닭에 옛 해석자 까에따누스,베라르미누스,그리고 현대에는 구나벤 바우엘,휴비 등이 이 텍스트는 고성소에 내려 가셧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은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5장 3-4절-추행:부정,200주년;더러운 것,개역한글.점잖지 못한농담:상스러운 말,200주년;희롱의 말,개역한글.17절-기회는 엄밀히 말해서 형편이 좋은 기회라는 뜻이다.그리고 잘 살린다는 동사는 그리스말의 본래의 뜻으로는 시장에서 산다.기워 갚는다는 것이다.곧 좋은 기회라고 한 때는 값을 치루고 사야 하는 물건과 같이 보고 있다.하느님의 의향에서 보면 우리의 한 평생 순간 순간마다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덕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하늘을 얻기 위하여 받는 것이다.잘 이용된 순간마다 영원과 관련되어 있다.그리고 시간은 잃는 것이 아니고 벌어 들이는 것이다."그들이 선행을 하기 위하여 시간을 쓰는 것은 그것을 사는 것이다(성 예로니모).6장16절-"믿음의 방패" 길이 120센치,폭 75센치의 길고 넓은 온 몸을 가려 지켜주는 긴 방패를 말한다.어떠한 때는 이것을 항상 지니고 다녀야만 한다."그 방패로는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당시의 싸움터에는 끝에 유황과 역청을 붙여 거기에 불을 당긴 화살을 던지는 싸움이 흔하였다.그리스도인의 강한 믿음은 영원한 진리를 가지고 모든 유혹에 저항하고 그 맹렬한 불길을 꺼버려야 할 것이다.

필립비서

1장15절-이와 달리 다른 어떤 사람들이 바울로를 시기하고 경쟁심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곧 자기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믿을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선교에 성공함으로써 바울로를 깍아 내리고 그렇게 하여 그의 쇠사슬을 다시 무겁게 하려고 까지 생각하였다.2장6절-본질:모습,200주년;본체(또는 형체) 개역한글.그리스말 모르페(형,모습,형상) 이란 말은 철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문학에서 본성,본질이라는 뜻이 되어 있다. 3장2절-유다인은 곧잘 이방인을 개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바울로는 여기서 이 유다인 교사를 개라고 부른다.그들은 끊임없이 짖고 물려고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악한들"이라고 한 것은 복음에 봉사하기 보다는 복음을 변형하기 때문이다.그들의 할례는 아무런 영적인 효과가 없고 육체에 대한 하나의 상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골로사이서

2장8절-세속의 원리를 기초로 인간이 만들어 전해준 것이지: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개역한글.22절-"제멋대로의 예배"곧 천사들에 대한 제멋대로의 과장된 하느님께서 바라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거스르는 예배이며 또 여기서 "겸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순수한 의미로 말하는 겸손이 아니라 하느님밑에 있는 영에 대한 굴종인 것이다. 그들의 이 예배의 또 하나의 방향은 엄한 수행이다.그러나 이 수행은 몸을 괴롭히지만 육의 교만을 정복하기에는 힘이 없다.여기서 말하고 있는 육욕은 육의 사욕이라기보다도 육적인 인간,곧 하느님의 정신으로 인도되지 않은 인간의 교만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또 하나의 해석에서는 이같은 엄격함 자체가 교만의 자극으로 보고 있다.이와달리 참된 신심 수행은 먼저 육의 교만을 굴복케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3장 18절-모질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괴롭게 하지 말라,개역한글. 21절-못 살게 굴지 마십시요,공동번역;들볶지 마십시요,카톨릭 새번역,200주년.;노엽게 하지 말찌니,개역개정./의기를 꺾어서는 안 됩니다,공동번역:낙심할까 함이라,개역한글,개역개정.4장16절-라오디게아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에페소인에게 보낸 편지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이 편지는 아시아주의 수도인 에페소에 먼저 보낸 것이고 여기에서 다른 교회로 전해야 할 편지였다.이 편지를 가지고 간 디키고는 에페소에 상륙해서 이것을 수신자인 에페소 교회에 건네 주었다.그러나 골로사이에 가기 전에 자신이 지나가는 길에 있던 라오디게아에 그 편지의 사본을 남긴 것으로 생각된다.그렇지 않으면 바울로가 자신이 권고하는 확실히 골로사이인에게 넘긴 이 편지가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고 어찌하여 없어지고 말았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필레몬서

11절-"쓸모있는 사람"과"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두가지 말은 아마도 오네시모[이익이 되는 또는 유용한]라는 이름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사실 그렇다.이 이름은 "편리한 것,쓸모있는 것"이라는 뜻이 있다.지금까지는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었으나 이제부터는 그 이름과 인물이 어울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에베소서

4장7-9절-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으니"그러므로"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고 말한다[롬 12.5-6,베드로전서 4장 10절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린도전서 12장7-11절에서는 여러가지 사역을 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유익하게 하려고" 여러가지로"성령의 나타남"을 주신 것이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인데 여기서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주어졌다....시편 68편 18절의 정복자에게 잡힌 수많은 포로들에 대해서 이 페쉐르[탈굼의 설명]에는 설명이 없으나 이 말은 적장의 달갑지 않은 지배에서 벗어난 정복자의 정당한 신하를 가르킨다기보다는 좀 더 자연스럽게 적군의 전쟁 포로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만일 그 많은 사로잡힌 자들이 기독론적 해석을 제공하였다면 골로새서 2장 15절의 정복당한 정세와 권세가 그 목적에 보다 잘 어울렸을 것이다]

빌립보서

3장2절-거기에서[1.15-18]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지만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전하는 기독교 교사들,그리스도를 위하지만 바울을 반대하는 그 결과 시기와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을 묘사하였다.여기에서의 문제점은 기독교 복음의 왜곡,곧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의 완전성의 거부이다.이 문맥에서는[2-3,6-7절] 에서는 유대교인들을 뜻하는데, 이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으려면 육체의 할례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했으며,그들의 구원의 소망을 할레와 율법의 성취에 두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만 두지 않았다."개들"은 치욕과 경멸의 표현으로서,이 동물의 불결함과 파렴치함과 성가심 때문에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동방의 시가들을 헤메는 개떼들은 ,집도 주인도 없이,길거리의 쓰레기나 오물로 배를 채우며 서로 으르렁대며,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덤벼드는 행동이 이 비유를 사용하게 된 이유이다".이 경멸의 표현 다음에 "행악하는 자들"이란 용어가 쓰였는데 이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순수한 교훈을 왜곡하며 곡해하려는 그들의 열정과 노력을 가리킨다. 그들은 교회의 믿음을 세우기는 커녕 무너뜨리는 처사이다.그와 더불어 유대교인들이"할레"라는 말과 함께"손할례당"이란 표현으로 비웃음을 당한다.그들의 할례는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육체를 절단하는 것이다.비록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지만,그들은 동시에 몸의 할례와 하나님 앞에서 의를 위한 그 가치를 자랑하면서도,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할례를 요구한다[행15.1을 참조].바울에게 그러한 행동은 육체의 무가치한 절단이며 그리스도의 충분성을 부정하는 것이다[갈 5.2-6,고전 7.18-19 참조].



골로새서

2장8절-이방인과의 유사성을 가진 그 거짓된 가르침의 특징은 반드시 그 출처가 이방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그 특징들은 그 특징들은 [그 용어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쓰일 경우] 밀의密儀 종교의 어떤 면과 흡사하다. 이 밀의 종교에서는 우주적인 위협,곧 적대적이며 달래기 어려운 힘에 의해 다스려지는 세계에서 존재의 공포로부터 안전을 구했다.그 힘은 이 편지에서 스토이 케이아 곧"자연력"[elements 또는 elemental forces]으로 언급되어 있다[개역성경에서는"초등 학문"].그와 같은 힘에 의해 다스려지는 우주에서"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알아냈는데,그것은 인간이 그 힘에 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숭배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다스리는 신에게 자신을 맡겨 스토이 케이아의 위협으로부터 그의 보호를 받는 것이다.마틴 디벨리우스가 말한 양자 택일 중에서,골로새 교인들은 전자를 택하고 싶어했고 반면에 바울은 후자 곧 그 우주적인 힘의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승리로 그것을 다스리는 분으로 입증된 하늘의 주를믿는 믿음을 권하고 이있는 것 같다. 이교도들 가운데서 찿아볼 수 있는 비밀 의식의 양상과는 다른 특징들을 가지는 경향이 랍비적 유대교 내에 있었다.이 가운데는"메르카바 신비주의"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하늘의 병거에 좌정하신 하나님의 환상을 경험하기 위한 기술연마이다.이 환상은 에스겔이 그의 사역에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본 것이다[겔1.26-28].거룩한 율법을 세심하게 지키는 것이 그런 경험에 필수적이었다는 것은 말 할 나위도 없지만,자기 훈련에 대한 특별한 방법 역시 필수적이었다.메르카바 신비주의 문헌에는 천사들에게 중재역이 주어져 있다[이것은 골로새 이단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뿐만 아니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에 대한 경험한 사람들이 영적 엘리트에게 속해 있다고 생각되거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거의 불가피한 일이다[그러므로 바울은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가 하늘의 환상을 본 후에,"너무 자고하지"않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곧 겸손하게 하는 고통을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다(고후12.7)].골로새 이단에서 초기 영지주의의 특징들이 흔히[그리고 아주 분명하게] 발견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메르카바 신비주의에 대한 그 주된 전거典據 文獻이 그것을"유대인 영지주의"의 한 형태로 말한 사실을 주시하는 것이 적절하다.브루기아의 제설諸說 혼합주의적 분위기에서도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노스틱 사상 배후에 깔려 있는 가설,곧 영과 물질은 서로 정반대이므로 지고의 하나님과 창조된 우주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은 생각할 수 없다는 가설에 노출되어 있었다.만일 이 가설이 골로새 이단의 배후에 깔려 있었다면 그것을 반박하는 데 어느 정도 역점을 두었다는 것은 보다 쉽게 이해가 된다.그와 같은 가설에 근거한 사상 체계는 복음을 손상시킬 수밖에 없었다.만일 하나님과 세상 물질이 직접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다면 이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물일 수가 없다.하나님의 지혜가 한 "육체"[골1.22]에 화육化肉되었다는 것,즉 하나님의 아들이"여자에게서 태어났다"는 것[갈4.4]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며,지상에서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통도 직접적일 수도 없고 일련의 중재자들을 통해서 행해져야 한다.골로새 이단이 노스틱 가정의 이 모든 논리적 결론을 끌어내지 않을 수도 있으나 하나님과 인간 사상사이에 일련의 중재들을 생각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그 중재자들을 통해서 상호 교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성서의 창조론에 관한 암시적 부정에 대하여 바울은 이미 우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겨 났다고 주장하였다.보다 고차원적인 지혜라는 매혹적인 제의에 대하여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하나님과 우리 세계 사이에 일정하지 않은 일련의 중재자들이 있다고 믿는 신앙에 대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신성의 모든 충만에 대한 인격적 체현體現으로 제시한다.이 중재자들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 접근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존경이라는 약간의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대하여,바울은 그들이 모두 그리스도께 정복당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사람들의 충성을 이제 요구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골로새 교안들이 받아들이라고 촉구를 받았던 가르침 전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쓸모없게 만드신 낡은 생각과 생활을 다시 닦는 격이었다.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에게서 전해 내려온[6절] 유전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세상의 초등학문[스토이 케이아]"과 일치하는 가르침이었다.[KJV와 ARV에 "초보"로 번역되었고 RSV와 NEB에"기초정신"으로 번역되었으며 NIV에"기본원리"로 번역되어 있는] 이 스토이 케이아란 말은 바울의 두 서신서에서 쓰이고 있는데,본서외에 다른 하나는 갈라디아서이다.갈라디아서 4.3,9에는 스토이 케이아가 "본래 신이 아닌 존재들"을 섬기는 데 있어서 율법 아래의 유대인의 생활과 이방인 생활을 다스린 힘으로 되어 있다[개역 성경에서는 여기서도 "초등학문"으로 번역되었음].갈라디아 개종자들이 옛날로 되돌아가 스토이 케이아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유대인의 성력을 지킨 데서 나타나 있다:"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갈4.10].그들의 월력 구분은 천체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스토이 케이아가 유성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암시도 될 수 있다.[이와 비슷한 월력을 지키는 일을 골로새 이단이 요구한 사실은 골로새서 2.16에서 추론될 수 있다.]다시금 갈라디아서의 논술은 많은 주석가들에게,이 편지에 쓰인 스토이 케이아가 율법이 주어질 때 중보 역활을 한 천사들[갈3.19]과[동일한 것이 아니라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GALATIANS,GOOD NEWS

페데리꼬 바르바로

바울로는 "그렇게도 빨리"(1,6) 참된 복음을 떠나서 그릇된 복음에 휩쓸린 갈라디아인을 비난하고 있는데 그가 갈라디아를 떠나고 나서 얼마 안된 때의 일이라고 생각된다.그렇다면 바울로의 두 번째 방문 곧 에페소에 머물고 있던 54-55년사이에 쓴 것인지 모른다.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좀더 뒤인 57년 말경에 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른 견해가 아닐까?[카톨릭 새번역,에페소에 비교적 길게 체류하던 때(아마도 56-57년의 겨울)의 끝무렵 그러니까 로마서를 집필하기 6 달 전이 된다.이로써 두 서간의 내용이 비슷하다는 사실도 이해 할 수 있게 된다.]...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57-58년 사이의 겨울,고린토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고린토든가 아니면 마케도니아에서 그 몇 달 앞서서 쓴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지 않겠는가? 1장 17절-'아라비아',라이훗과 코르넬리는 바울로가 율법을 폐지하기 전에 율법의 산인 시나이산을 순례했다고 말하고 있다.'18절-3년 후에'라고 한 것을 보면 사도 생활의 출발점인 회개에서부터 셈하면 기원 39년 경의 일인 것 같다.21절-사도행전에서는 "교우들은 사울을 가이사리아로 데리고 내려 가 거기에서 다시 다르소로 보냈다"(9,30) 라고 하였다.이것을 보면 가이사리아는 항구였기 때문에 거기에 가서 배를 타고 다르소로 간 것이 된다.그래서 사도행전은 길리기아의 수도 다르소에서 한 포교밖에 쓰지 않았던 것이 된다.그러나 바울로는 먼저 시리아에 들려 그곳에서 포교하였을 것이다.혹은 다르소에서 시리아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혹은 길리기아와 시리아에서 선교를 하였는데 시리아쪽을 중요하게 보고 그 이름을 먼저 들었을지도 모른다.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서 그는 오랫동안 포교하였다. 2장 1절-1장18절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난 사도가 된 회개의 때로부터 셈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그렇다고 한다면 예루살렘에 올라간 여행은 49년 말이나 50년 초기였던 것 같다.14절-이방인 같이 산다는 말은 유다인의 관습을 무시하고 사는 것이다.베드로는 가이사리아에서 있었던 백인대장 고르넬리오(행 10,24 이하)의 사건에서 그렇게 행동하였다.유다인의 관습을 지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의 신자들 앞에서 드러내 놓고 자신의 행동방식을 변호하였다(행 11,1-19).바울로의 이 말을 보면 베드로는 그의 경우에도 "이방인과 같이"살았던 것 같다.베드로는 유다인의 관습이 유다파 신자에게도 의무가 아니고 금지사항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런데 안티오키아에서 베드로가 행한 것을 보면 유다인의 관습을 신자의 의무인 것처럼 생각하게 될 위험에 있었다. 17절-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만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앞에서 버린 유다교의 관습으로 다시 되돌아간다면 관습을 앞에서 버렸다는 것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는 셈이다.곧 그것을 버린 사람은 스스로 법을 어긴 사람이다. 3장 18절-430년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출애굽기(12,40)에 의한 숫자이지만 그러나 이 숫자는 히브리말 텍스트의 같은 곳에서는 에집트에서 히브리인이 머문 기간이다.70인역의 그리스말 텍스트와 사마리아 텍스트에서는 히브리인의 에집트 체류 이전 가나안의 조상들이 살고 있던 기간도 포함된 숫자이다.바울로는 70인역에 따라서 이 숫자를 들고 있다.그가 말하는 연대는 가나안에서 조상들이 산 기간을 215년으로 잡는다.그래서 430년에서 215년을 빼면 215년이 남는다.이것은 바울로가 사용한 텍스트에 따르면 히브리인이 에집트에 살던 기간을 나타내고 있다.다른 곳에서는 400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창 15,13;행7,6). 4장3절-"자연숭배'를 "세상의 요소"[카톨릭 새번역,세상의 정령들]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요소란 일반적으로 말해서'땅과 그위에 있는 모든 것"(벧후 3,10-12),혹은 "초보적 원리"(히5,12) 또는"쓰기의 처음(알파벳의 첫 글자)",천체"등을 가리키고 있었다.바울로가 여기서도 또 골로사이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우상숭배(세상의 요소)란 말을 쓰고 있지만"땅위에 있는 모든 것과 초보적 원리"라는 두가지 뜻을 포함시켜서 쓰고 있는 것 같다. 6절-"아빠,아버지" 같은 말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8,15)에도 나온다.마르코(14,36)를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셨다.아빠는 아람말로<아버지>이다.예수님께서 아빠와 아버지라는 두 마디를 이어서 말씀하셨다면 당시의 팔레스티나네서 그러한 습관이 있었을런지도 모른다.사도들이 전도하고 있을 때 이 말씀은 예수님이 남기신 유품처럼 전했을 것이다. 10절-유다파 선교사에게서 사주를 받은 갈라디아사람은 "날" 곧"안식일,토요일",또"달"=新月祭신월제에 관한 것,"계절"유다교의 과월절,오순절,장막절에 하는 단식,"해",안식년,성년따위를 지키도록 되어 있었다. 13절-간질병,말라리아,눈병 등이다.어느 해석자는 15절에"눈이라도 뽑아서"라는 말이 있으니 그것을 연상하여 눈병이라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이 표현법은 지금도 유럽 사람들이 쓰고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안질과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5장19절-[카톨릭 새번역:불륜,더러움,방탕함.공동번역:음행,추행,방탕] "추행"은 자연을 거스리는 죄 예를 들면 남색같은 동성끼리의 성관계를 성관계 등이다. 20절-"마술"먼저 독을 그리고 나서 약을 가리키기도 한다.마약이나 그 밖에 따른 약을 어느 정도 사용하고 있던 마술을 말한다.21절-질투라고 번역하고 있는데"시기"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질투와 시기는 좀 다르다.시기라고 하는 쪽은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며 질투는 남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죄이다.



뉴 인터내셔널 성경주석

남갈라디아 가설을 받아 들이게 되면 집필 연대는 보다 초기가 된다.이것에 근거한 최고 집필 연대는 바울이 이 교회들을 두번째 방문한 때라고 할 수 있다[행16.1-4,갈4.13].즉 사도 교회를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잠시 머물러 있었던 곳에서 머문지 얼마 되지 않아 기록되었는데 그곳은 고린도로 예상된다[참조 1.6].그렇게 보면 본서의 기록연대는 50년 또는 51년이 될 것이다.1장21절-그는 거기서 즉 다소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이것은 바나바가 그를 안디옥으로 초청하기 전이었다.그러나 바울이 이것과 관련하여 먼저 수리아를 말하고 난 다음에 길리기아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예루살렘에 가기 전[2.1에 언급된] 14년 동안의 그의 경험을 연대순으로 배열하여 이야기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고 다만 당시 그가 머물러 있었던 곳을 일반적으로 알려 주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예루살렘의 유리한 위치에서 그렇게 해석하고 보기 때문에 수리아-길리기아란 지리적 순서는 당연한 것이다[실제로 길리기아는 독립된 하나의 행정구역이었으나 그 규모가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첫 로마 황제들에게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고 그럼으로 해서 수리아 총독의 관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이처럼 길리기아의 중요성이 다소 덜한 것 때문에 본문에서 그 이름이 수리아 다음에 나온 것 같다.3장18절-출애굽기 12장의 히브리어 본문에 의하면 이 430년은 이스라에이 애굽에 있었던 기간으로 되어 있다.그것에 근거해서 볼 때 아브라함에게 한 그 약속과 율법을 준 것 사이의 기간은 좀 더 길게 계산되어야 한다.다른 곳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압제받은 기간이 400년으로 언급되어 있다[창15.13,행7.6].70인역은 출애굽기12.40을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가나안에 있었던 시간이 435년이라는 식으로 전하고 있다.4장3절-"이 세상"은["초등학문"이"낙원의 법"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추측하는 것 처럼] 본래의 창조에 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을 상실한 세계 곧 구속을 필요로 하는 세계를 뜻한다[참조 골2.8].아마도 이 원리나 금언들은 그리스도밖에서의 구속에 대한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사도 바울이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한"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밖의 종교인들이 자신을 내맡기고 그런 방법으로 구속을 성취하려고 했던 규정이나 규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6절-"아바 아버지"라는 2중 표현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하지도 않고 알아 들을 수도 없는 말을 사용하는 무아경의 지껄임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좀 더 가능한 견해는 이 아람어의 용법을 사도 바울과 초대 교회의 가장 심원하고도 가장 최초의 신앙 경험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5장19절-"음행"은 가장 넓은 의미의 불법적인 성 관계를 가리킨다.바울의 글에서"더러운 것"은 언제나 윤리적인 읨이로 사용되었는데 가끔 여기서처럼 성적 의미로 쓰인다."호색"은 자제의 결핍과 방종을 뜻한다.20절-"술수[sorcery]"는 원래 약품 제조를 의미했는데 보다 함축성있게 이것은 마술도구를 만들거나 사용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따라서 이말은 우상 숭배와 마술 분야에서 쓰인다.



국제성서주석

편지를 쓴 연대로서 50-55년 사이의 연도들이 합리적인 추측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마르시온의 서언은 그 편지가 에페소로부터 보내졌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여기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많은 필사본들에...그에 따르면 로마가 갈라디아서의 발송지로 되어 있다.4장3절-그리스도 이전 상황이었을 때 그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미성년자의 상황에 있었던거나 다름 없다...."세상의 원시종교들 하에서의 노예상태"라는 공통분모 하에 유다교와 이방인들을 이같이 결합시킨 것은 도식적인 의의를 가진다고 외프케는 지적했는데 그것이 옳다.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상황을 노예상태로 이같이 묘사하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를 통한 해방과 대조될 수 있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로가 뜻하는"세상의 윈시종교들"의 개념이며 그 말로써 그는"노예 소유자들"을 암시한다.수많은 학문적 연구들은 이 "세상의 원시 종교들"이라는 말이 "이 악한 세대"를 구성하고 제어하는 악마적 세력들을 나타낸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바울로 시대의 그레꼬.로마의[그리고 유다의]혼합주의는 세계에 대한 아주 부정적인 견해를 그 특징으로 한다."세계"는 넷이나 다섯 개의"요소들"로 구성된다고 생각되었으며 그것들은 단순히 유형적인 물질이 아니라 사람에게 적대적이었던 우주적 차원들과 별세계의 세력을 지닌 악마적 실재들로 여겨졌다.유다교에서 이 세력들은"천사적 존재들"의 세계 안에 통합되었다.6절-"아빠"는 아람어 "압"의 강조형인 "아바"의 그리스어 음역...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서 루터는"바울로는 이방인들과 유다인들로부터 모여든 교회의 이중적 성격때문에 의도적으로 두 개의 표현을 사용하고자 했으며 이방인들과 유다인들이 실제로 하느님을 각기 다른 언어로'아버지'라고 부르긴 하지만 양자의 외침이'아버지'라는 점에서 동일하다"라고 말한다. 5장19절-'부정한 성행위','도덕적 불결',그리고'방탕'

CORINTHIANS,GOOD NEWS

페데리꼬 바르바로

에페소에서 57년 봄에 집필하였다.1장 1-바울로는 자신에 대하여 엄밀한 뜻으로"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곧 희소식의 전달자로 소개한다.바울로는 선교사로서 신임받아야 할 명분을 주장한다.바울로가 35회나 쓰고 있는 "사도"라는 말은 "자신이 보낸다"라는 그리스말에서 온 것이다.곧 아포스톨로스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람,하느님을 대표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이다....소스테네는 사도행전 18장17절에 있는 회당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은 아니지만 바울로의 협력자로서 형제라는 말에 붙어 있는 관사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형제',고린토인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2- "하느님의 교회"[에클레시아=교회] 라는 말은 본시 통속적인 그리스말로서는 "전령의 소리이며 도시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하여 의논하기 위해 소집된 시민의 집회"라는 뜻이 있다.무엇인가 공동행동을 위하여 모이는 뽑힌 사람들의 모임,그리고 또 의식적 통일이라는 개념을 포함한 말이다.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주기적 집회,또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안에서 믿음으로 초청을 받은 모든 사람의 단체를 가리키는 데 잘 어울리는 말이다.70인역의 번역자는 히브리말인 '가하르'를 번역하기 위하여 이 말을 집회라는 뜻으로 썼고(신명기 9:10,18:16),특히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가르키기 위하여 약 100번이나 쓰고 있다(신명기 23:4;역대기 상 28:8;느헤미야 13:1;미가2:5)...특히 바울로는 60번은 쓰고 있다.처음 이 말은 그리스도 신도의 모든 공동체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 같다(마태오 16:18;사도행전 5:11).마침내 장소이름이 덧붙여지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예루살렘이라든가 다마스커스에 모여 있던 하느님의 교회(갈 1:13;필립비3:6)라는 식이었다....바울로가 위에서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어느 장소의 단체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그 자체에 대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이것에 따라서 에클레시아는 구약성서에서 200번이나 쓰이고 있는 시나고게(집회,회당)와 구별된다.왜냐하면 신약성서에서는 시나고게라는 말이 거의 언제나 장소적인 뜻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더욱 더 뚜렷이 유다교를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그런가 하면 에클레시아는 새로운 믿음의 사회적 보편적 면을 가리키고 이 집회에 속하는 사람을 보통"형제"(5:11,6:6,8,7:12,14-15)라고 말하였다.금구 성 요한의 말에 따르면 바울로가 여기서 "하느님의 교회"라는 말투를 쓴 것은 교회가 이 사람 저 사람의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또 고린토의 공동체에 스며든 당파심을 치려 한 것이었다고 한다. 14~16-바울로가 스스로 세례를 준 이 그리스보는 그의 회개로 말미암아 복음이 고린토에서 승리를 거둔 저 회당장과 같은 인물임에 틀림없다.(사도행전 18:8) "가이오"는 바울로가 머물렀던 집주인으로서 다소 알려진 사람이며 그 집에서 종교집회를 가지는 일도 있었다.(롬16:23) 스테파나와 그의 가족은 아카이아의 수도에서 새 믿음으로 회개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16:15-18) 몸이 약하고 분주했던 바울로는 새로운 신도의 세례를 자신의 협력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협력자 중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 사람은 마케도니아에서 돌아온 디모테오와 실라였다(행 18:5). 22-유다인은 하느님의 간섭을 증명하는 "기적"을 구한다.(마태오 12:38 이하;루가 11:29 이하).곧 그들은 잘못을 저지를까 하는 두려움없이 믿고 싶어했다.또 자신들의 영광으로 삼는 소피아(지혜)에 도취하고 있던 그리스사람은 확실한 논법에만 의지하고 인텔리계급에 있어서매력있는 철학을 품지않는 종교는 멸시해 왔다.그러나 이 두 가지야말로 세상의 것이어서 그리스도교적 믿음에는 맞지 않고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다. 2장3-'이 세상 임금'의 성곽이었던 고린토에는 무엇인가 성공을 얻기 위한 인간적인 수단이 하나도 없었고 조금 전에 아테네에서 온 슬픔 더우기 협력자들도 이 때에는 없었고 또 바울로의 건강상태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불안을 설명할 수 있다.후에 그리스도의 영상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고(행 18:9).사람의 나약함이 하느님의 힘으로 변하였다(4~5). 4~5-그리스인이 얼마나 지식을 숭배하고 있었는가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성에 대한 찬사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에게 증정했던 '윤리'속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곧 행복한 것인 하느님의 활동은 순수하게 지적인 것이며 인간활동에 있어 무엇보다 행복한 것은 이 하느님의 활동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하였다.또 플라톤에 따르면 사람과 하느님은 "이성"을 공유하기 때문에 친척과 같은 관계에 있다.知子지자는 개념의 길을 통하여 하느님께 가까이 가 하느님이 된다.하느님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고 인간 자신이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7-천지창조이전(200주년 신약성서,현세 이전,그리스어 萬世前만세전). 11-마음(그리스어,영). 14-16"영적인 사람"프네우마디코스(프뉴마디코스)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자신의 생각이 그리스도 자신의 생각이 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에 대해서도 바르게 판단한다.(16) 사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믿음의 선교를 반갑게 맞아들이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다(갈 3:5,14). 이 하느님의 성령은 또한 그리스도의 성령이기 때문에 이것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살고 그리스도와 똑같이 인간적인 것 신적인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16;필2:5).이 영(프네우마)은 우리 인간의 영역생활 전체에 대한 힘의 원리로 간주할 수 있다.4장 9-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옥좌에 앉아"(마19:28),곧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이 세상에는 인간 쓰레기처럼 사람을 다스리는 왕의 자리가 아니라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투기장에서 맹수와 싸우도록 마련되었다.이것은 벌써 사형판결을 받은 노예에 대하여 로마의 관습이 마련하고 있는 운명이다.투기장에서 싸우도록 마련되어 있는 죄수처럼 사도들은 모든 이성을 가진 피조물의 구경거리가 되었다.시련 속에 있는 그들의 용감성을 감탄하면서 보고 있는 착한 천사와 착한 사람들(히10:33) 그리고 아우구스티노의 말대로 그들의 괴로움을 기뻐하는 악한 천사에게도 구경거리가 되었다(욥 1:7;에페소 6:11-12). 17-생활 원칙[200주년 道理,그리스어 신앙의 길]. 21-이 채찍은 당시의 스포츠 경기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경기 심판자는 채찍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채찍이 단지 심판관의 표시만이 아니라 경기장에서 규칙을 거스린 사람들을 때리는 데도 사용되었다. 5장5-사탄에게 넘긴다는 말은 몹시 알기 어려운 말투이지만 의미는 이 죄인이 성도의 교회에서 배척되고 거기서 누리던 뒷받침도 잃고 온갖 보호를 잃어 간접적으로 사탄의 다스림안에 떨어진다(1 디모테오 1:20)는 것이다.그리고 이 사탄은 그 죄인에게 악마의 짓거리로 삼았던(욥 2:7;루가 13:16; 2고린토 12:7) 여러가지 육신의 병이라든가 괴로움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6장18-음행이 특별히 나쁜 것은 그리스도인의 몸의 구실과 사명에 무섭게 대립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곧 그리스도인에게서 매춘부와의 관계가 가장 무서운 죄악이 되는 까닭은 축성된 이 몸이 구세주께 가지고 있는 일치의 관계를 끊기 때문이다.음행으로 말미암은 육체의 일치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일치에 대립한다.그리스도와의 영적 일치로 말미암아 몸은 靈化영화된다.그렇기 때문에 또다시 육체적인 죄의 일치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기의 몸에 대한 죄이다. 19-고린토에 있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에서는 "포르네이아(음행)"가 여신에 대한 축성인 것처럼 생각되고 있었다.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그 반대이어서 음행이야말로 하느님화化 되었던 자기의 신성함을 잃는 것이다.7장 9-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좋다.곧 육욕에 지기보다는 결혼하는 편이좋다.육욕은 일종의 해로운 열이다.그리고 이 육욕의 공격을 받은 사람은 이것에 져서 은총의 윤택을 잃지 않는다면 뜨거워 지기는 하겠지만 불타지는 않는다." 11-"헤어졌다"란 이혼이 아니고 별거를 말한다.주님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동거를 포기한 아내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이가를 말한다.그러한 여인은 남편과 화해하든가 혹은 혼자 살아야 한다.별거하고 있는 부부라도 하느님 앞에서의 결혼 인연은 살아있다.그러한 까닭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이혼한 여자를 얻지 말라고 명하셨다(루가 16:18).이 절의 후반은 남녀가 이 일에 있어서 똑같은 권리나 의무를 가지며 완전히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9장 25- 그리스의 여러 가지 큰 경기에서 주는 상은 물질적인 상이 아니었다.피디아 경기에서는 월계관,올림픽 경기에서는 올리브관,그리고 고린토 경기에서는 소나무 관이었다.이러한 관은 지협경기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는 죽은 사람의 기념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성도들의" 눈앞에 이 세상에서 겪은 모든 시련과 인내에 대한 보상으로서(1 데살로니카 2:19;2디모테오 4:8;야고보 1:12;묵시록 2:10) 영원한 월계관이라는 미래의 영광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26-권투선수는 길이 2미터쯤 되는 소가죽의 띠를 주먹에 감아 그것을 될 수 있는 한 조여 매었다.때로는 가죽안에 납이나 못같은 것을 넣어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히기까지 하였다.당시의 권투선수 그림을 보면 눈이 부어오르고 코가 뭉그러지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10장 2-물론 씻는다는 것이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의 표시인 것과 같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의 예속에서 해방되었고 하느님의 축복의 보증을 받았다.이 은혜를 받는 것은 하느님과 백성사이에 중개자였던 모세에 대한 복종과 신뢰때문이었다.이것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도가 세례를 받을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처럼(6:11;롬6:3;갈 3:27) 모세와 한 몸이 되었다. 8.-이 수는 퓔론,요세푸스 및 라삐들에 이해 증명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기록이 있었다고는 말 할 수 없다.이 두 기록의 차이는 바울로가 여기서 페스트로 죽은 사람,혹은 그 날에 죽은 23,000명만을 쓰고서 우두머리들에게 살해된 1,000 명을 쓰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필사인의 잘못이든가 또는 사도 자신이 어림셈으로 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0-"살육의 천사" 하느님의 복수를 행하는 천사이며 바울로는 코라와 그 무리에게 내린 벌(민 17:12)을 천사가 내린 벌로 보고 있다.(출 12:23;사무엘 하 24:16;역대기 하 32:21;행 12:23;히 11:28 참조). 11장 5~6.이러한 풍습은 모두 여성의 심중한 마음가짐과 고상한 품위의 정신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그렇기 때문에 어떤 교회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처녀들에게 베일을 씌어 주는 의식이 있었다(테르툴리아노,예로니모).그래서 고대세계에서는 여자가 베일을 쓰는 것이 그 종속적인 신분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관습이었다.여종과 창녀만은 베일을 쓸 수가 없었다.이것은 왜 바울로가 당시의 관습을 그렇게도 고집스럽게 지켰던가 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30-성체에 대한 고린토인의 불경과 알맞은 준비의 부족은 교회안에 여러가지 병과 사망의 이유가 되었다."여러분 중에 몸이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또 죽은 자도 적지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이것은 하느님께서 징계로서 주의와 보속을 위하여 주시는 시간적인 벌이다.(집 18:20-21;마카베오 하 6:12-17) 이것은 또한 바울로가 한 경고가 공허하고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12장 8~10- [첫째]"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은 가르침의 선물에 속한다."지혜의 말씀"이라는 선물을 받고 있는 사람은 믿음에 대한 가장 고귀한 진리,하느님의 심오한 진리,은총의 신적인 생명 등을 전할 능력을 가진다. 이에 대하여 지식의 말씀의 선물을 받은 사람은 믿으의 초보적인 진리 예를 들면 구원에 대한 수단 등을 말 할 수가 있다...."성령의 활동인지 가려내는 힘"이란 선물의 기원을 분별할 수 있는 선물로 가짜 예언자와 가짜 교사가 유별나게 많았던 시대에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었다. 27~30-"사도"는 12 사람만 가르키는 말이 아니고 바르바나,실라,디모테오와 같이 새로운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고 혹은 거기에 세운 교회의 발전에 힘쓰고 있는 선교사를 포함한다.하나의 선물을 이름지을 때에 신약에서는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다."사도"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은 좀 이상스러운 느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도의 여성명사는 70역인에서 선물 또는 봉사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울러 생각한다면 그 수수께기가 풀린다."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간략하게 예언자라고도 번역하는데 교회의 창립자의 사업을 이어가는 사람을 가리킨다.(행 11:27-30,13:1-12)."가르치는 사람" 곧 교사인데 교회에서 전도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로마 12:7; 1 디모테오 4:13-16,5:17;디도 2:7).이상의 세 가지 직분은 가르치며 이끄는 교회의 중심적 지도층이었다. 13장 1~3- 아쯔로에 따르면 여기 나온 말은 울려 퍼지는 꽹과리(심벌즈)의 소리를 생각나게 하는 의음적疑音的인 그리스말이 사용되고 있다.그리고 황홀상태를 일으키기 위하여 꽹과리를 쓰고 있던 특히 키베레스(cybele,또한dionysus,corybantes) 여신의 의식 등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5~6-"무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말인 이 동사는 예例의 개방적인 부인들처럼(11:2-16).예절을 거스리고 또 무례한 짓을 한다는(롬 1:27) 그런 뜻이며 뉘앙스로서는 심중성의 모자람,형제간의 사귐에 있어서 거치른 행동,곧 노골적이고 야비한 짓거라라고 하는 데에 중점을 둔 말이다.사랑은 이와같은 태도를 피하고 이웃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어떻게 해야 할 것이가를 직감하고 무슨 일에 있어서나 온유하게 행동하고 고귀한 품위를 보존한다.이것은 명예에 대한 감각과 병행된다.참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예의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8~12-고린토인은 금속(놋,금,은)의 거울 제조로 유명하였다.그러나 이런 거울은 아무리 닦는다 하더라도 희미하게밖에 모습을 비춰주지 못한다.마찬가지로 하느님을 그 업적을 통해서 보는 길외에는 알 수가 없다(로마 1:20).이것은 추리적인 인식이라고 하며 막연한 지식이기 때문에 언제나 수수께끼가 남는다.그러나 하늘에서는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된다.곧 정확하게 그리고 자신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에게 사랑받는 그 정도에 알맞게 하느님을 알게 된다.(아쯔로) 14장 28-"보통 교인[개역한글:알지못하는 자;ICC:방언 은사받지 못한 자,알지못하는 자;200주년:초심자]이나 믿지 않은 사람들"."보통 교인"은 고린토교회의 이와 같은 관습을 알지못한 다른 교회의 신도이거나 혹은 고린토의 신도로 이러한 모임에 참석한 일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 33-35.바울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회당의 관습을 나타내고 있지만 동시에 그리스의 사회에서도 그러하였다.그리스에서도 여자는 집안에서 살림을 하고 공생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1세기 경이 되면서 그리스 여성은 점점 해방되고 있지만 경솔한 고린토인들은 특히 극단으로 달리기 쉬웠기 때문에 바울로가 새삼스럽게 주의를 주었던 것이다. 15장8~10-바울로는 자기를 팔삭동이라고 말하고 있다.이 말은 잉태된 지 8개월만에 태어난 미숙한 태아에 대하여 하는 말이었다.곧 바울로는 어머니의 태내(유다교)에서 힘을 주어 태어나게 된 아기라는 상징으로서 자신은 정상이 아니라 돌발적으로 그리스도교 안에 태어난 사실을 말하였다.다시 살아난 그리스도께 대한 증인들의 차례로 보면 바울로는 이를테면 나중에 끼어든 사람이다.열두사람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생활을 보았고 정상적인 증인으로 태어난 셈이었다.그것과 달리 바울로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있으실 때는 그분의 제자가 아니었고 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본 일도 없고 따라서 사도 혹은 증인이라고 하는 구실에서 말한다면 예외적인 팔삭동이와 같은 존재이다. 28.이 세상의 때가 끝나면 하느님께서는"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이다."곧 그 때에는 하느님과 사람사이에 중개가 필요없다. 29-이에 대하여 제시한 해석은 40가지 이상이 되지만 두 가지만은 주목할 만하다[카톨릭,동방정교회,성공회,루터교,감리교의 해석은 거의 같다]어떤 구도자들은 (모두가 모두는 아니었다) 세례를 받을 때그리스도교에 들어오기 전에 죽은 친척이든가 친구에게 이 속죄의식의 성과를 얻게 하고 싶어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아쯔로) 현재 어떤 해석자는 이를테면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받은 세례를 엄밀한 뜻의 세례와는 다른 여러가지 기도를 포함한 죽은 이를 위한 무엇인가 특별한 예절이라고 생각하였다.마카베오서에서도 마카베오의 유다는 전사한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을 예루살렘 성전에 맡겼다.성서에서는 이러한 행동을 칭찬하였다(마카베오 하 12:43).그리고 지금도 전례로 행하고 있는 사도赦禱 예절(고별식)이라는 예도 들 수가 있다.어쨋거나 고린토사람들이 그러한 예식을 행하고 있다는 것은 죽은 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성 토마스 아퀴나스) 16장 2-"일요일마다"곧 유다인의 안식일(토요일)다음 날인데 이 날은 그리스도교의 모임(집회)이 있는 날이며(행 20:7),주의 날(지금의 주일.일요일=묵시록 1:10;디다케 14:1,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이라고 부른 날이다.이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며 안식일을 대신하게 된 날이었다.특히 이 날에는 애찬(미사)이 이루어지고 이 미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와 유다교가 뚜렸하게 분리되었다. 5-9-바울로는 마케도니아를 거쳐 고린토에 갈 작정이었다(3)그러나 후에 새로운 사정이 생겨 이 계획을 바꾸었던 것 같다."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라는 히브리식 말투는(고린토 후 2:12;골로사이 4:3) 에페소의 배경이 된 지방 곧 지방총독의 관할하에 있던 아시아주에 복음을 전 할 기회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그렇지만 "적대하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이란 말은 에페소에서 오래 머물게 된 이유가 아닌가도 생각된다.



국제성서주석

2장16절-누가 주를 가르칠 만큼 주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영적인 그리스도인들]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여기서 "마음"이란 말은 이사야 40장 13절 때문에 "영"대신에 쓰인 것이다.그러나 이 말은 이사야 40장13절을 똑같이 따르는 것이 아니다.히브리어성서에는"영"으로 되어 있다.70인역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더냐?..."[로마서11장 34절과 비교하라].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의 깊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참조,10절]. 4장17절-바울로의"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생활방식"은 도덕적인 표준들을 말하는 것인데,이러한 도덕적인 표준들은 가르침의 내용이 될 수 있는 어느정도 인정받는 행동 유형들로 [비교 7.17,12,31,14.33 데후2.15] 표현되었다."방식"[way]이란 말은 바울로의 유대교적이고 라삐적인 배경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참조.halakah(역주;유다교 관례법규)라는 말].그 말[방식]은 그리스어로는 도덕적인 의미가 거의 없다.이 귀절은 고린토교회가 새로운 것에 애착을 느끼고 독창성을 강요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6장9-"불탄다는 것"은 실제로 음탕한 행동들을 발산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이 단계에서 결혼하는 것이 차라리 간음하는 것보다 나음을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비록 그러한 욕망에 굴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적으로 그러한 욕망에 불탄다는 것을 뜻한다. 11절-그리스도교적 법틀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법적 방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또 바울로가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도 않았음을 시사한다.별거한다고 해서 별거 중인 배우자들를 교회에서 제명하지는 않는다.그들은 여전히 친교를 나누는 일원이며 친교의 훈련을 받는다.문제의 여자에 대해서 이 귀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그녀의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두 번째 결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페데리꼬 바르바로

디도의 뒤를 이어 디모테오도 이 곳에서 합류하였고 마케도니아에서 보낸 57년의 초여름과 가을 사이에 이 편지를 썼다.58년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어느 고사본과 페싯토에서는 편지를 쓴 장소를 더 정확하게 필립비였다고 말하고 있다.1장 8절-바울로가 이 환난을 고린토인에게 말하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해방된 자신의 감사를 그들과 함께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바울로가 암시하고 있는 아시아에서 겪은 이 환난은 에페소에서 은세공장이들의 폭동으로 나타났던 적대행위와 그것에 따른 위험전체를 가키는 것 같다.그 일 때문에 바울로는 어쩔 수 없이 에페소를 떠났다. 24절-바울로는 고린토인을 폭군처럼 지배하여 그들의 믿음을 멋대로 다룰 의도는 꿈에도 없었고 오직 그들을 영적으로 발전하도록 도와주고 무엇보다 믿음에서 솟아나온(필1,25) 미래의 행복을 보증하는 기쁨을 얻어주고 싶어 했다(롬15,13;갈5,22).바울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발전이란 보다 큰 기쁨의 충만이었다.2장13-눈물을 흘리며 쓴 편지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하여 57년 디도를 거기에(아시아의 무시야 지역) 보낸다.그리고 돌아 올 때에는 육로를 따라 마케도니아오 건너와 트로아스에 머물라고 명하였다.바울로는 거기서 디도와 만날 작정이었다.그런데 그 해 봄에 에페소에서 일어난 은장이들의 소동때문에 바울로는 갑자기 어쩔 수 없이 그 도시를 떠났다.북으로 올라가 트로아스에서 디도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만날 수 없었다. 17절-바울로는 고린토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떤 선교사들을 생각하고 있다.그 사람들은 거짓 가르침으로 복음의 가르침의 순수함을 더럽히고 그리고 타산적인 목적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이러한 사람들은 불행히도 많이 있었다.자신은 이러한 사람들과 다르며 하느님의 말씀을 파는 사람이 아니다.여기서 바울로는 집회서 26장 20절 이사야서 1장 22절에 근거를 두고 있다.3장3절-"먹"이라는 것은 그을음(검은 재)에서 만든 까만 잉크인데 이것의 사용에 대해서는 몹시 오래전부터 파피루스 등으로 된 증명이 있다. 4장 7절-"질그릇"이라는 비유는 애가 4장 2절에서 따온 것 같은데 영혼의 집인 몸을 가리키는 고전적인 비유이다.그러나 흙으로 만든 그릇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깨지기 쉬운 천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특히 인간 본질의 비참함,나약함을 가리킨다(롬 9,20-21;2딤 2,20). 8절-"찌부러지지 않고",이 사상뒤에는 씨름의 술어가 엿보인다.쓰러지고 아래에 깔릴지라도 아직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시리아말 번역에서는"찌부러지지 않고"를 "숨이 막히지 않고"라고 번역하였다.이러한 씨름에서는 상대편을 목졸라 죽이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뜻일 것이다."절망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그리스 로마의 씨름은 상대편의 두 어깨를 땅에 짓누름으로써 승패가 난다.씨름꾼에게는 상대편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손과 다리를 잡아 비튼다.적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열심히 몸을 피하지만 잡히는 데 따라서는 어쩔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궁지에 쫓긴 일이 있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16절-사실 죽음의 끊임없는 파괴작용은 "외적 인간"(7절의 질그릇과 같다)곧 몸의 생활을 파먹지만 하느님의 성령은 "내적 인간"을 "나날이 새로워지게"해 주신다(롬 12,2;골3,10;딛3,5) 5장1절-이 장막집은 "지상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흙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창 2,7) 사람을 지상에 매어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그것과 달리 "영원한 집:(마르코 14,58;골2,11;히 9,24)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하늘 나라에 세우셨고 또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온갖 변화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6장 15절-팔레스티나의 유다교에서 벨리아르라고 햐는 것은 사람을 죄로 이끌어가는 악령과 같은 것이다.그래서 벨리아르 자식들이라고 하면 죄인,악인,곧 "어둠의 자식들"을 말한다.유다의 여러가지 외전에서는 벨리아르를 악령의 두목으로 여기고 하느님께 반역한 자들의 지도자라고 한다. 7장 5절-"밖으로는 싸움을 겪었고 안으로는 두려움에 싸여 있습니다"(2,13 참조).바울로가 여기서 암시하고 있는 57년의 봄,그 계절은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외로움에 찬 폭풍이 휘몰아친 해였다.치명적인 위험과 위협을 받으며 에페소를 도망쳤다(1고 15,32)--이것은 은장이의 소동은 끝났으나--그 때 바울로는 어느 때보다도"나는 매일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 눌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11,28)라고 고백할 만큼 큰 근심에 싸여 있었다.그래서 바울로는"밖으로의 싸움"이라고 한 말 외에 "안으로의 두려움"이라고 말하였다. 6절-필립비 혹은 데살로니카에서 디도를 만난 것은 한 줄기 빛을 주었다.디도로부터 고린토교회에 대한 기다리던 소식을 받았기 때문이다. 13절-디도가 고린토를 향하여 떠났을 때 그들이 어떻게 맞아줄지 상당히 염려하고 있었다.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있었으나 고린토교회의 모든 신자들은 (2,6) 성실과 순명을 가지고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그래서 디도는 자신의 사명을 무사히 다하였고 근심을 말끔히 씻고 지금은 기뻐한다. 8장 7절-푼수대로만-힘이 닿는데까지,200주년 신약성서. 21절-의연금-헌금,200주년;연보,개역한글. 10장1절-"여러분과 대면하고 있을 때에는 유순하지만 떨어져 있을 때에는 강경하다"이것은 반대자들이 바울로에게 한 말이었던 같다.그들은 바울로가 저항할 수 있는 사람들 앞에 오면 온유하여 움추리고 있으나 멀리 떠나 있는 경우에는 무서울 것이 무엇이냐면서 우쭐거리고 있다고 말하였다. 5절-"잘못된 이론"..이 그리스말의 참 의미는 적의 계략을 가리킨다.그러나 여기서는 유다인이나 이방인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저항하기위해 사용한 "잘못된 이론"이 한 마디로 궤변을 말한다. 10절-저 집요한 반대자는 모금을 기회로 하여 바울로의 청렴을 상처입힐 새로운 비방을 퍼뜨리고 거기에다 바울로의 기질에 대하여 겁이 많다.등등 험담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말하고 알았다."그는 약하기 짝이 없고"이 말은 160년 경에 나온 <바울로와 테클라의 행전>에 근거를 두고 오래 전 어느 해석자는 바울로가 키가 작고 머리가 벗겨지고 갈지자 걸음을 걸었다고 묘사했다.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신체상의 용모가 아니고 언행의 태도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묘사는 억지춘향격인 추리에 지나지 않는다.여기서는 오히려 바울로의 심리적 태도,별로 신통치못한 말재주(11,6)를 암시하고 있다.바울로는 신자 한사람 한 사람에게 마치 어머니처럼 온화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에(1고 9,12-22).이 유순한 태도를 나약한으로 본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주장을 과대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1장4절-"어떤 사람"이라고 한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유다파 사람을 가리킨다.이 침입자들은 바울로가 한 선교와는 다른 예수님,다른 성령,다른 복음을 전하였다. 8절-노동으로 번 것만으로는 생계유지에 충분하지 못하였다.그래서 바울로는"다른 교회들이 주는 삮을 가지고"충당하였다.다른 교회란 마케도니아 교회를 가리키지만 말은 다소 과장법을 취하고 다소 야유를 띠고 있다.사실 고린토와 달리 바울로는 마케도니아교회에서 어느 만큼 경제적 도움을 받고 있었다(2고 11,9). 23절-이 수고는 선교할 때 한 노동의 고생,생계를 꾸리기 위한 노력을 가리킨다.반대자들은 그런 노동을 하지않았다. 이 편지 이전에 있었던 바울로의 감옥생활은 필립비에서 한(행 16,23)것만이 알려져 있다.후에 바울로는 예루살렘,가이사리아 그리고 로마에서 2 번 투옥되었다.그러나 로마의 클레멘스는 1세기 말에 바울로가 7 번 감옥에 투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우리로서는 다른 경우의 사정은 알 수가 없으나 아마도 세 번째 전도여행 때 에페소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된다. 24절-신명기에서는 몽둥이로 40번이상 때리지 못하게 금하였다(25,3).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잘못하여 이 수를 초과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나를 줄여 39 번 때리도록 정하였다. 26절-당시의 여행 특히 바울로가 지나 다닌 소아시아의 산악지대의 여행이란 참으로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그래서 마르코도 이런 모함적 여행을 두려워하여 몸을 피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다(행 13,13).로마의 치안이 미치지 못하였던 이 지대에는 도적이 많았고 생명의 위험이 컸다.타키투스는 35년에 다울루스 지방에 토착민의 반란이 있었으며 그 진압을 위하여 시리아 군단이 파견되었다고 기록하였다.그리고 51-53년에 걸쳐 바울로는 마침 고린토에 있었다.고마게네왕 안티오커스는 또 하나의 반란을 평정하였다.육지 쪽은 그러한 양상이었으나 바울로의 여행은 참으로 육지의 여행보다 더 큰 위험이 따랐다.해적에 대항한 싸움은 그리스 로마 역사가가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주제의 하나이다.길리기아,팜필리아,리기아는 마침 이러한 해적지의 근거지였다. 32-33절-바울로가 다마스커스에서 도망친 것은 39년 경의 일이며 당시 다마스커스는 나바데 왕 아레다의 지배하에 있었고 총독이라고 하였으나 경찰의 장관과 같은 사람이다.유다인은 이 총독으로부터 바울로의 체포허가를 받았다(행9,24).이런 책략을 알게된 바울로는 성벽에서 광주리에 담겨져 도시를 빠져 나갔다.옛 도시의 발굴작업으로 말미암아 증명되고 있는 것처럼 집의 들창문이 경사진 성벽에 있었으므로 그것을 이용하여 도망쳤다. 12장2절-이 영상은 지금의 편지를 쓸 때부터 헤아려 14년 전의 일이다.곧 43년 경 일이었는데 당시 바울로는 회개한지 7년이 되었고 다르소에서 사사로운 생활을 하거나 혹은 안티오키아 교회에 옮겨갔을 초기의 일이었다(행13,2). 13장 7절-낙제생-자격없는자,200주년;버림받은자,개역한글.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장24절-그의 동기는 자신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었다.그의 본래의 동기를 성취시킨다는 것은 슬픔과 매를 가지고 그들에게 나아감을 의미할 것이다[참조 고전4.21].그러나 그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방문을 연기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회개를 하고 사태를 수습할 좀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이러한 것은 연약의 표시는 아니다....사도는 분명히 자신의 진술을 아무리 좋게 이야기된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고린도에서 나쁘게 나타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잘못 해석될 소지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의식하였으므로 그가 가지 않은 이유는 고린도 교인을 아끼기 위해서라고 말한 다음 즉시 이러한 설명에 대한 그의 비방자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품위를 손상시키는 악용에 대해 대처할 필요를 느낀다.이들 비방자들은 그가 그들을 아끼기를 원한다는 말로부터 그가 그들의 신앙에 대한 주권 또는 전제권을 행사하려고 한다고 추론할 것이었다.즉 용서하는 그는 또한 자신의 임의적인 결정에 따라서 처벌하고 처리하는 주인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신앙적인 면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주관하려는 뜻은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4장7절-바울은 등잔보다는 흙으로 만든 항아리나 단지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가장 귀중한 보배들을 천하고 무가치한 용기에 숨겨 두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로마의 승전 행진에 있어서도 금과 은을 질그릇에 넣어 운반하는 것이 관례였다.그리하여 플루타크는 B.C.167년 마케도니아 전투에서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에서 3천명의 남자들이 은화가 담긴 750개의 질그릇을 운반하는 마차를 호위하는 경위를 묘사하고 있다.그런데 각 질그릇에는 3천 달란트 가치의 보화가 들어 있었고 네 명이 들어서 운반할 수 있었다고 한다.바울은 이미 로마가 슬리를 거두고 행하는 승전 행진의 장관으로부터 생생한 비유를 빌려 오기를 즐겨하였음을 보여 주었다[2.14,고전4.9을 보라].그리고 본문에서의 그의 의도는 그리스도 곧 자신의 부요함을 자신의 인간 추종자들의 보잘것없는 질그릇에 맡긴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제안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10장10절-본문에서 바울은 몸으로 대할 때라는 언급은 비꼬는 말일 수는 있을지라도 그의 육체적인 모습을 가리키기 위해 의도되었을 것 같지 않다.그보다는 이 비난은 도덕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고 따라서 어떤 육체적인 장애를 조롱한 것보다,그가 주장한 권위에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이 세상의 겉모습에 따라 사물을 판단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바울의 대적자들은 온유함을 연약함으로,관용을 비겁으로,상냥함을 우유부단으로 해석하였다[참조,1절,11.21].최소한 그들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게 부추겼다.또한 그들은 바울의 "언변"을 헐뜯으려 하였다.인간의 지혜 및 웅변 자체를 위한 웅변에 대한 헬라인들의 존경은 고린도에 있는 그의 중상자로 하여금 비교적 용아하게 공중앞에서 말할 때의 바울의 비전문적인 태도를 비난하게 하였다.즉 그의 언변은 현학적衒學的인 웅변가의 세련된 언어구시와 기교에 의한 언변과는 달리 윤색이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바울은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귀만을 매료시키는 겉치례에는 관심이 없었고 구원의 진리를 전달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그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웅변가의 기교와 책략을 단호하게 기피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고전 2.1-5,11.6]. 청중의 주의를 흩뜨리거나 자신의 메시지의 힘있는 진리를 흐리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안에서" 서도록 하는 것이다. 12장2절- 14년 전 즉 A.D 44년경에 일어났다.하늘의 단계들을 말하는 7층천에 대한 신앙은 랍비들의 가르침 및 조로아스터교에서 발견된다.그러나 이 개념이 바울 시대에 지배적이었느냐 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여러 증거들을 감안할 때 가장 타당한 결론은 구약과 신약에 퍼져 있는 하늘들에 대한 개념[비록 바울은 삼층천과 낙원만을 말하고 있기는 하나 바울의 저작까지 포함하여]은 칠층천의 개념이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같은 하늘의 수효에 대하여 언급한 곳은 없다.게다가 이레니우스가 오래전에 지적하였듯이 바울은 "자신이 삼층천에 올라갔다는 것은 대단하고 굉장한 것으로 기술하였다."만일 그가 올라간 하늘 위에 네 개의 하늘들이 더 남아 있었다면 그는 결코 그런 식으로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4절-"낙원"과 "세째 하늘"이 동의어라는 것은 데오도레트,어거스틴,어퀴나스,에스티우스,하지,바흐만,빈디쉬,태스커,그리고 대부분의 현재 주석가들,그리고 또한 스웨트와 찰스의 견해이다.외경 "모세의 묵시록"과 때로는 랍비 문헌에서 이 두 장소를 나타내는 용어는 서로 구별 없이 사용된다.이 구절에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기 전에 성경 및 기독교의 기원,최초의 몇 세기 동안 "낙원"이라는 용어에 부여된 의미를 고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이 용어 자체는 "울타리로 둘러막은 땅"을 의미하며 그 까닭에 즐거운 정원 또는 공원을 의미하며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구약성경 70인역에서는 이 용어가 "에덴 동산"이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 유의하여야 한다.신약에서 이 용어는 세 번만 나타난다.:[1]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는 강도에게 확신시켜주시는 누가복음 23.43,"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2] 현재 우리가 다루는 본문. [3] 요한계시록 2.7,"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현재 우리가 다루는 본문과 요한계시록 2.7은"하늘의"낙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후자에 언급된 생명나무는,인간이 죄 때문에 잃어버렸던 본래의 낙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인류에게 모든 축복이 회복될 하늘 낙원을 연결시켜 주고 있음이 분명하다[참조,계 22.1 이하].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후서 12.4의 낙원이 요한계시록 2.7의 낙원과 동일한 낙원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그렇다면 누가복음 23.43의 낙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리스도가 회개한 도적에게 말씀하신 낙원이 본문의 낙원과 요한계시록 2.7절의 낙원과 동일하다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 주님이 하데스로 내려 가셨다면 그것은 그의 나팔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의인들의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하여,그리고 그들을 십자가에서의 그의 정복을 통하여 그들을 위하여 확보된 하늘 낙원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였다. 회개한 도적이 죽는 날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게 된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죽음 후에 신자들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임재를 누리게 되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빌 1.23,물론 이 문맥에서 "올라가다" "내려가다"와 같은 용어들은 지리적 용어라기보다는 비문법적인 상징적 용어임을 기억해야 한다.



국제성서주석

6장15절-벨리알이 히브리어 "쓸모없는 자식들",즉 "악한 사람들"을 번역한 것인데 이 히브리어는 가끔 사용되는 말이며 음역되기 보다는 대개는 번역되었다.벨리알은 [변형들과 함께] 성서이후의 유다 교회에서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발전되었다.사해사본들에서는 벨리알이라는 말이 악마의 왕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예가 상당히 많이 나타나고 있음은 사실이다. 벨리알은 결국에는 사탄과 동일시되었고,후기 묵시문학[이사야의 승천]에서는 이 두 이름이 서로 바뀌어 사용될 수 있었다.따라서 벨리알은 신약성서에서는 단순히 사탄의 동의어가 되었다. 10장1절-아마도 바울로은 질병에 시달렸던 것 같다.그러나 여기서 "약한"의 의미는 "인상적이지 않은"이다.그의 경쟁자들과는 달리 그는 위압적인 행동이나 혹은 말로 자신을 교회에 드러낼 줄 몰랐다. 혹은 그것을 알았다고 해도 그는 그러한 술수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이것은 영감을 받은 말이나 혹은 인상적인 말을 함으로써,환상의 영기靈氣를 보임으로써,그리고 사도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부과함으로써 성령의 증거와 사도됨의 증거를 보여야한다는 사람들에게서 바울로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다.바울로는 자신을 종이라고 말했으며[4,5] 보수를 요구하지도,받지도 않았다[11.7~11,12.13:비교 고전9.12,18].그리고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인간의 지혜를 포기했다[고전 2.1~5]. 고린토 사람들과 바울로의 교회에 침입한 경쟁적인 사도들에게 있어서는 위압적인 성격이나 멋진 말을 할 줄 아는 것이 일반적으로 매우 중요한 평가기준이었다. 12장2~3-'그리고 이 사람들이 나를데려다가 둘째 하늘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내게 지상의 어둠보다 훨씬 더 어두운 어둠을 보여 주었다....'[제2에녹서 vii.I : 8장에서 에녹은 계속해서 세째 하늘로 가며,9장에서는 네째 하늘로,18장에서는 다섯째 하늘로,그리고 계속해서 열째 하늘로 간다].'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나를 데려다가 첫째 하늘로 인도했다.그리고 내게...을 보여주었다'[제3바룩서 ii.2,이렇게 계속해서 다섯째 하늘에까지 인도된다].....바울로가 여기서"세번째"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가 단지 세 개[다섯이나 일곱,열,혹은 다른 어떤 수의 하늘이 있다고 믿지 않고] 의 하늘이 있다고 믿었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비록 그의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세 개의 하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말이다....'셋이라는 숫자는 가장 높고 가장 완전한 것을 나타내는 완전수로 쓰였다'는 칼빈의 견해가 옳을 것이다....제2에녹서 8장에서는 낙원이 세째 하늘에 있는 것으로 말한다.모세의 묵시록 37장 5절에서는 하느님은 미카엘에게 말한다.'그 [죽은 아담]를 세번째 하늘의 낙원으로 들어 올리라.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심판할 그 두려운 날까지 그를 거기에 내버려두라.'

ROMANS,GOOD NEWS

[로마서 성경주석] 1장17절'믿음에서 믿음으로'에 대한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국제비평주석,로마서1(로고스 1994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은 많은 다른 방식들로 이해되어 왔다.

예컨데 다음과 같은 의미들로 이해된 것이다.

즉'구약성서의 믿음에까지'(테르툴리아누스,오리게네스)

'설교자들의 믿음으로 부터 청중의 믿음에까지'또는

'율법의 믿음으로부터 청중의 믿음에까지'(아우구스티누스),

'한 신조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다른 신조에 대한 믿음에까지'(아퀴나스),

'현재의 믿음으로부터 미래의 믿음에까지'(아퀴나스가 언급한 또다른 해석),

'말들의 믿음으로부터(우리가 지금 보고 있지 않은 것을 지금 믿는 경우,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의 신실성으로부터 인간의 믿음에까지'(암브로시아스터,바르트,맨슨),또는

믿음의 성장을 가리키는 말씀으로서(바르바로,칼빈,카톨릭의 일반적인 견해)...이해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1장18절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뉴 인터내셔널 성서주석,로마서(생명의 말씀사,1979년)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형벌적 정의(定義)이다.

그것은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결의이다.

사람 속의 분노는 상대방의 악에게 고통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은 성경에 편만되어 있는 진리와 일치하게

하나님의 심정의 침착하고도 정확한 목적에 적용된다.

하나님의 심정에 품고 있는 목적은

하나님의 물리적 또는 도덕적 통치상의 어떤 다른 법칙이 작용하는

동일한 일반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죄와 비극간의 관계를 확보하자는 것이다.(찰스핫지)

칼빈의 논평에서도 이것이 인정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견해도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2장8절,'당을 짓는 사람들'에 관한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국제비평주석,로마서(로고스 1994년)

RV에서 그것은'faction'(당파)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당파를 짓는 사람들에게'

(unto them that are factious)로 번역되어 있다.

바레트는 이 번역어가 '싸움'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정하기'때문에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AV의역'unto them that are contentious'(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로 번역]...

RV의 번역자들은 이 단어가 아리스토텔레스,pol 1302b4와1303d14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단어는 거기서 정치운동을 하러 돌아다니는 것,

즉 음모를 꾸미는 일을 가리켜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음모를 꾸미는 일은 당파를 만드는 일을 의미했다.

따라서 RV의 번역문은 이 단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법에 기초해서 작성될수 있는 것이다.만약 이것이 옳다면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진리에 불순종하고 자신을 불의에 내어주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반대하는 당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아리스텔레스에서 사용된 의미의

연장일 수도 있는 더욱 일반적인 의미,즉'자기추구의'또는

'이기심이 많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RV의 번역을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3장3-8절,21절의 표준적 성경번역 選 성경주해



3 그런데 어떤 유다인들이 신의를 저버렸다고 합시다.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신의를 저버리시겠습니까?

4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세상 모든 사람이 거짓말장이라 하더라도

하느님만은 언제나 진실하십니다.

성서에서도,"당신의 말씀에는 언제나 정의가 드러나고

재판을 받으시면 반드시 이기십니다."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5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느님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는 말이지

6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겠습니까?

7 또"나의 영광에 오히려 하나님의 진실을 더욱 드러내고

하느님의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죄인으로 단정함을 받아야 하느냐?"하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8 그뿐아니라"아예 선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하는 말이

나옴직도 합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인간을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공동번역개정판]

한글개역개정판은 5,7절의 '그러나'와 8절의 '또는 그러면'을 생략하고

21절에서'그러나'를 첨가한다면 문장이해가 쉽게될 것 같다.


[로마서 성경주석] 3장19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국제비평주석,로마서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하려 함이니라"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결과를 나타내는 부사절로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목적절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즉,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하나의 목적은 모두 사람의 입을...)....바울이 율법아래 있는 자들란 말로써 유대인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못된다.바울의 생각은 유대인들(자기 자신을 예외적인 인물들로서 간주할 이유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사람들)도 사실상 전혀 예외는 아니라는 증거와 더불어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아래에 놓여 있다는 증거가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만일 유대인들이 성서에 의해 죄아래 있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면(죄아래)있지 않은 이방인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로마서 성경주석] 4장13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아브라함이 세상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그나 그의 후손에게 주어진 것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의로움을 통해서였습니다".

[200주년신약성서주해의 본문,NAV]



"It was not through law that Abraham and his offspring recieved the promise that he wouid be heir of the world,

but the rightousness that comes by faith".[NIV]


[로마서 성경주석] 4장17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국제비평주석 로마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바울은 아브라함의 육신과 사라의 자궁을 되살려서 잉태케 해주신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문의 대를 잇는다는 견지에서 볼때 그들은 죽은 자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또 그는 창세기22장에 진술된 이삭의 생명을 살린 이야기를 생각했을 수도 있으며(참조 히11:19)예수의 부활사건을 배경에 깔고 있음은 매우 확실하다.

(참조.24절과25절)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라(새번역-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하나님>; 공동번역-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하느님>).이것은 하나님의무로부터의 창조를 가리키고 있음은 거의 확실하다.샌디와 헤들람은 네가지 제시된 해석들을 열거해 주고 있다.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1)'존재없는 것들을 마치 존재했던 것인양 명명하시는<하나님>;(2)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도록 부르시는<하나님>;(3)'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들에게 마치 그것들이 존재했던 것인양 직접 소환장을 바랭하시는<하나님>;(4)'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마치 존재했던 것인양(생명과 구원에로)부르시는<하나님>.샌디와 헤들람이 마지막(4)를 문맥과 상관없는 것으로서 기각시킨 것은 옳은 일이다.그러나 (1)이나(3)은 전혀 확실치 않다.샌디와 헤들람은 그 둘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들은(3)을 더선호하며'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에게<그당시 그가 소환장을 발행했던 것처럼>소환장을 발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이 단어들을 표현하고 있다].

페테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나이였는데,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와 같았던 두 사람에게 아들을 얻게 하셨다."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하느님께서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나라 사람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부르실 것을 암시하셨던 것이다.

200주년신약성서주해의 본문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존재하지 않은 것들을 존재로 부르시는 하느님"이라고 번역하고난외주로 마카베오후서 7:23,28-29;고린도전서1:28을 참조하라고 되어 있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0절의 표준적번역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의 본문



'우리가(하느님의)원수였을 때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화해를 얻었다면,

하물며 우리가 화해한 지금 그분의 생명에 의해 더욱더 확실히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성구에서 '당신'의 문자적의미는 물론'그분의'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여기서 '그' '그의'라는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예수님,예수께서,예수그리스도께서,예수님을 믿읍시다와

예수가,예수그리스도가,예수믿읍시다,예수를 믿읍시다라는 표현은

너무나 느낌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2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그러므로' 또는 '이러므로'의 표현은 공동번역개정판이나

카톨릭새번역같이 생략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러운 것 같다.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카톨릭 새번역의 주석]



가. 라틴계 교부들,그리고 루터도 아담이 죄를 지은 그 행의 안에 모든 인간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포함되었다고 본다.(그래서 대중라틴말성서는'아담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다.'라는 식으로까지 번역한다).

이러한 해석의 방향에서는,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죽음이라는 유산을

자기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고,또는 인류의 모든 죄가 이미 아담의

불순종안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이해하게 된다.

나. 일부 그리스계 교부,많은 카톨릭주석가,그리고 칼뱅을 비롯한

많은 프로스탄트 주석가들은,바오로가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지은 죄를 가리키고 있다고 판단한다.바로 이러한 죄를

통하여,아담이 이 세상에 끌어들인 죄의 위력이 죽음이라는 그 열매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아무튼 이 말마디는 12-18절의 문맥과 마찬가지로,아담의범죄와

각 사람의 개인적인 죄사이의 연대성을 전제로 한다.

(카톨릭 새번역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의 견해는 하나의 범주안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굳이 우선 순위를 택한다면,

개인적으로 라틴계 교부들과 루터의 견해를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3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페떼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

유다인의 입장에서 인류의 역사를 본 바울로는"율법을 주시기 전에도"곧 모세의 율법이 제정되기 전에도"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하고

말하지만,"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죄가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뿐"이다.곧 율법이 없어서 죄를 지우지 않은 것이라면, 어떠한 율법을 근거로 하여 죄가 인간에게 돌아 갔는지 마땅히 의문으로 생각될 것이다.주목해야 할 것은 죽음의 원인이 되는 "죄"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12절에서"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한 그 죄이다.그렇다면 아직,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율법을 근거로 하여

죄를 인간에게 돌렸던 것은 아니지만,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자연법(2:12)에 근거를 둔 것도 아니다.왜냐하면 자연법은 여러 가지

죄를 금하고 있다고 하지만-이것은 중요한 곳인데-위반하는 자를

죽음으로써 벌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새번역의 주석

일부학자들은 13-14절이 12절의"모두 죄를 지었으므로"라는 말을

설명한다고 여긴다.바오로는 법적 관점에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아담에서 모세까지 이르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죄인이기는

하였지만,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 각자에게 적용되는 무슨 법에

따라 죽음의 벌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때문이 아니라 아담의 죄때문에

죽음의 운명을 겪었다는 것이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5,16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카톨릭 새번역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다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6 그리고 이 선물의 경우도 그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경우와

다릅니다.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왔지만,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도 좋지만 문맥상'그렇지만'으로 번역하는 것이

좀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렇지만'은 '또(다른) 한편으로', '또한'으로

번역할수 있다고 본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9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9절은 18절을 확증하고 설명하는 귀절이다.이 사실은 19절의

문장 구문 및 내용으로 보아서도 분명하거니와 그것들이 관계하고 있는

방식으로 보아서도 분명하다.19절은 "왜냐하면"(for)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NASV: 19. For as through the man's disobedience the many were made sinners,even so through the obedience of the One     man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NIV: 19.For just as through the disobedience of the the one     man the many were made sinners,so also through the obedience of one     man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NAV:19. For just as through the disobedience of one     person the many were made sinners,so through the obedience of one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로마서 성경주석] 1장17절'믿음에서 믿음으로'에 대한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국제비평주석,로마서1(로고스 1994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은 많은 다른 방식들로 이해되어 왔다.

예컨데 다음과 같은 의미들로 이해된 것이다.

즉'구약성서의 믿음에까지'(테르툴리아누스,오리게네스)

'설교자들의 믿음으로 부터 청중의 믿음에까지'또는

'율법의 믿음으로부터 청중의 믿음에까지'(아우구스티누스),

'한 신조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다른 신조에 대한 믿음에까지'(아퀴나스),

'현재의 믿음으로부터 미래의 믿음에까지'(아퀴나스가 언급한 또다른 해석),

'말들의 믿음으로부터(우리가 지금 보고 있지 않은 것을 지금 믿는 경우,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의 신실성으로부터 인간의 믿음에까지'(암브로시아스터,바르트,맨슨),또는

믿음의 성장을 가리키는 말씀으로서(바르바로,칼빈,카톨릭의 일반적인 견해)...이해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1장18절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뉴 인터내셔널 성서주석,로마서(생명의 말씀사,1979년)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형벌적 정의(定義)이다.

그것은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결의이다.

사람 속의 분노는 상대방의 악에게 고통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은 성경에 편만되어 있는 진리와 일치하게

하나님의 심정의 침착하고도 정확한 목적에 적용된다.

하나님의 심정에 품고 있는 목적은

하나님의 물리적 또는 도덕적 통치상의 어떤 다른 법칙이 작용하는

동일한 일반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죄와 비극간의 관계를 확보하자는 것이다.(찰스핫지)

칼빈의 논평에서도 이것이 인정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견해도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2장8절,'당을 짓는 사람들'에 관한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국제비평주석,로마서(로고스 1994년)

RV에서 그것은'faction'(당파)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당파를 짓는 사람들에게'

(unto them that are factious)로 번역되어 있다.

바레트는 이 번역어가 '싸움'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정하기'때문에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AV의역'unto them that are contentious'(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로 번역]...

RV의 번역자들은 이 단어가 아리스토텔레스,pol 1302b4와1303d14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단어는 거기서 정치운동을 하러 돌아다니는 것,

즉 음모를 꾸미는 일을 가리켜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음모를 꾸미는 일은 당파를 만드는 일을 의미했다.

따라서 RV의 번역문은 이 단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법에 기초해서 작성될수 있는 것이다.만약 이것이 옳다면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진리에 불순종하고 자신을 불의에 내어주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반대하는 당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아리스텔레스에서 사용된 의미의

연장일 수도 있는 더욱 일반적인 의미,즉'자기추구의'또는

'이기심이 많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RV의 번역을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3장3-8절,21절의 표준적 성경번역 選 성경주해



3 그런데 어떤 유다인들이 신의를 저버렸다고 합시다.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신의를 저버리시겠습니까?

4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세상 모든 사람이 거짓말장이라 하더라도

하느님만은 언제나 진실하십니다.

성서에서도,"당신의 말씀에는 언제나 정의가 드러나고

재판을 받으시면 반드시 이기십니다."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5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느님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는 말이지

6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겠습니까?

7 또"나의 영광에 오히려 하나님의 진실을 더욱 드러내고

하느님의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죄인으로 단정함을 받아야 하느냐?"하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8 그뿐아니라"아예 선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하는 말이

나옴직도 합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인간을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공동번역개정판]

한글개역개정판은 5,7절의 '그러나'와 8절의 '또는 그러면'을 생략하고

21절에서'그러나'를 첨가한다면 문장이해가 쉽게될 것 같다.


[로마서 성경주석] 3장19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국제비평주석,로마서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하려 함이니라"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결과를 나타내는 부사절로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목적절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즉,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하나의 목적은 모두 사람의 입을...)....바울이 율법아래 있는 자들란 말로써 유대인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못된다.바울의 생각은 유대인들(자기 자신을 예외적인 인물들로서 간주할 이유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사람들)도 사실상 전혀 예외는 아니라는 증거와 더불어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아래에 놓여 있다는 증거가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만일 유대인들이 성서에 의해 죄아래 있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면(죄아래)있지 않은 이방인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로마서 성경주석] 4장13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아브라함이 세상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그나 그의 후손에게 주어진 것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의로움을 통해서였습니다".

[200주년신약성서주해의 본문,NAV]



"It was not through law that Abraham and his offspring recieved the promise that he wouid be heir of the world,

but the rightousness that comes by faith".[NIV]


[로마서 성경주석] 4장17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국제비평주석 로마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바울은 아브라함의 육신과 사라의 자궁을 되살려서 잉태케 해주신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문의 대를 잇는다는 견지에서 볼때 그들은 죽은 자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또 그는 창세기22장에 진술된 이삭의 생명을 살린 이야기를 생각했을 수도 있으며(참조 히11:19)예수의 부활사건을 배경에 깔고 있음은 매우 확실하다.

(참조.24절과25절)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라(새번역-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하나님>; 공동번역-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하느님>).이것은 하나님의무로부터의 창조를 가리키고 있음은 거의 확실하다.샌디와 헤들람은 네가지 제시된 해석들을 열거해 주고 있다.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1)'존재없는 것들을 마치 존재했던 것인양 명명하시는<하나님>;(2)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도록 부르시는<하나님>;(3)'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들에게 마치 그것들이 존재했던 것인양 직접 소환장을 바랭하시는<하나님>;(4)'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마치 존재했던 것인양(생명과 구원에로)부르시는<하나님>.샌디와 헤들람이 마지막(4)를 문맥과 상관없는 것으로서 기각시킨 것은 옳은 일이다.그러나 (1)이나(3)은 전혀 확실치 않다.샌디와 헤들람은 그 둘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들은(3)을 더선호하며'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에게<그당시 그가 소환장을 발행했던 것처럼>소환장을 발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이 단어들을 표현하고 있다].

페테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나이였는데,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와 같았던 두 사람에게 아들을 얻게 하셨다."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하느님께서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나라 사람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부르실 것을 암시하셨던 것이다.

200주년신약성서주해의 본문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존재하지 않은 것들을 존재로 부르시는 하느님"이라고 번역하고난외주로 마카베오후서 7:23,28-29;고린도전서1:28을 참조하라고 되어 있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0절의 표준적번역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의 본문



'우리가(하느님의)원수였을 때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화해를 얻었다면,

하물며 우리가 화해한 지금 그분의 생명에 의해 더욱더 확실히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성구에서 '당신'의 문자적의미는 물론'그분의'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여기서 '그' '그의'라는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예수님,예수께서,예수그리스도께서,예수님을 믿읍시다와

예수가,예수그리스도가,예수믿읍시다,예수를 믿읍시다라는 표현은

너무나 느낌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2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그러므로' 또는 '이러므로'의 표현은 공동번역개정판이나

카톨릭새번역같이 생략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러운 것 같다.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카톨릭 새번역의 주석]



가. 라틴계 교부들,그리고 루터도 아담이 죄를 지은 그 행의 안에 모든 인간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포함되었다고 본다.(그래서 대중라틴말성서는'아담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다.'라는 식으로까지 번역한다).

이러한 해석의 방향에서는,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죽음이라는 유산을

자기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고,또는 인류의 모든 죄가 이미 아담의

불순종안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이해하게 된다.

나. 일부 그리스계 교부,많은 카톨릭주석가,그리고 칼뱅을 비롯한

많은 프로스탄트 주석가들은,바오로가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지은 죄를 가리키고 있다고 판단한다.바로 이러한 죄를

통하여,아담이 이 세상에 끌어들인 죄의 위력이 죽음이라는 그 열매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아무튼 이 말마디는 12-18절의 문맥과 마찬가지로,아담의범죄와

각 사람의 개인적인 죄사이의 연대성을 전제로 한다.

(카톨릭 새번역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의 견해는 하나의 범주안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굳이 우선 순위를 택한다면,

개인적으로 라틴계 교부들과 루터의 견해를 지지한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3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페떼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

유다인의 입장에서 인류의 역사를 본 바울로는"율법을 주시기 전에도"곧 모세의 율법이 제정되기 전에도"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하고

말하지만,"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죄가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뿐"이다.곧 율법이 없어서 죄를 지우지 않은 것이라면, 어떠한 율법을 근거로 하여 죄가 인간에게 돌아 갔는지 마땅히 의문으로 생각될 것이다.주목해야 할 것은 죽음의 원인이 되는 "죄"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12절에서"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한 그 죄이다.그렇다면 아직,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율법을 근거로 하여

죄를 인간에게 돌렸던 것은 아니지만,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자연법(2:12)에 근거를 둔 것도 아니다.왜냐하면 자연법은 여러 가지

죄를 금하고 있다고 하지만-이것은 중요한 곳인데-위반하는 자를

죽음으로써 벌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새번역의 주석

일부학자들은 13-14절이 12절의"모두 죄를 지었으므로"라는 말을

설명한다고 여긴다.바오로는 법적 관점에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아담에서 모세까지 이르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죄인이기는

하였지만,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 각자에게 적용되는 무슨 법에

따라 죽음의 벌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때문이 아니라 아담의 죄때문에

죽음의 운명을 겪었다는 것이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5,16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카톨릭 새번역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다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6 그리고 이 선물의 경우도 그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경우와

다릅니다.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왔지만,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도 좋지만 문맥상'그렇지만'으로 번역하는 것이

좀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렇지만'은 '또(다른) 한편으로', '또한'으로

번역할수 있다고 본다.


[로마서 성경주석] 5장19절의 표준적인 번역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9절은 18절을 확증하고 설명하는 귀절이다.이 사실은 19절의

문장 구문 및 내용으로 보아서도 분명하거니와 그것들이 관계하고 있는

방식으로 보아서도 분명하다.19절은 "왜냐하면"(for)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NASV: 19. For as through the man's disobedience the many were made sinners,even so through the obedience of the One     man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NIV: 19.For just as through the disobedience of the the one     man the many were made sinners,so also through the obedience of one     man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NAV:19. For just as through the disobedience of one     person the many were made sinners,so through the obedience of one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로마서 성경주석] 11장9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국제비평주석

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원래의 비유적 표현은 다양하게 해석되었는 데 예를 들면,축연이 베풀어졌을 때 만일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이 갑자기 위험물 가까이에 있을 때 그들의 발을 얽히게 할 수 있는 유목민들에 의해 땅에 깔려진(짐승의)가죽과 의복과 관련하여 해석되었으며,음식을 준비한 사람들이 특정한 개인들로 하여금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안되도록 그들을 위해 준비된 독이 든 요리와 관련하여 해석하였다. 그러한 단어들에 관한 바울의 사용을 고려하여 볼 때 샌데이와 헤들람이 제안한 것과 같은 그러한 설명의 해석('자신들이 믿는 율법과 율법서가 타락의 원인이 되었으며,또한 그런 것들이 자신들을 걸리게한 그물과 수렵용 망으로 되어버린 유대인들과 마찬가지이다')...과 같은 설명의 해석을 바울의 것으로 보기보다는 신적 완악함을 암시하는 일반적 방식으로 그러한 단어들을 바울이 단순하게 이해하였다고 추정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이러한 교회는 첨단과학수사를 통하여 반드시 척결되야 한다.

[로마서 성경주석]11장11,12,15절의 표준적인 번역과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11 그래서 나는 묻습니다.그들은 쓰러지기 위해 걸려넘어졌다는 말입니까?(21)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오히려 그들의 범행때문에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왔습니다.이는 그들을 질투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2 그러나 그들의 범행이 세상의 부가 되고,그들의 감손이(24) 이방인들의 부(가 되었다면)그들이 선택받은 이들의 충만한 수에 다다르는 것은 얼마나 더 대단하겠습니까? 15 그 이유로는 그들의 배척이 세상의 화해(를 뜻했다면)그들의 받아들임은 죽은 자들로부터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32)

(21)하느님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다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다면 그들을 저버리셨는가?하느님은 그들이 결정적으로 파멸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그들은 하느님의 선택에서 결정적으로 제외되지 않았다.하느님은 그들의 잘못을 신비스럽게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24)"감손"이라는 그리스어는"적다,약하다,열등하다,패배하다"를 뜻한다.이 말은 "배척"(15절)이라는 말과 병행되고 "충만한 수"(25절)와"온 이스라엘"(26절)에 대조된다.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다인들은 불신앙 때문에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수에서 탈락된 자들이다. (32)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 들이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몇이라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바울로의 기대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받아들여 이러한 새 생활을 주실 것을 가리킨다.


[로마서 성경주석] 11장26절의 "온 이스라엘"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이 귀절에서 말하고 있는"이스라엘"에게는 본장 전체를 통해 이 말에 속하던 의미를 그대로 적용해야지, 만약 그것과 다른 의미를 적용한다는 것은 주석적으로 불가능하다.이 사실은 본 서신의 이 부분에 나타난 문맥이나 유사한 문맥 양자로 보아서 분명한 일이다.앞의 주석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간의 대조를 말해왔던 것이다.그런데 이 귀절에 와서는 이스라엘을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가? 바울이 말한 것은 인종적으로 본 이스라엘이다.이 이스라엘 속에는 이방인은 포함될 수 없다.이 점에 있어서 앞의 귀절은 불합리하지 않은 것이다.26절은 상호 유비적 또는 상호관련적 진술이기 때문에,"이스라엘"의 의미는 25절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여기 '이스라엘'을 25절의'이스라엘'과 다른 의미로 주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F.F.Bruce").칼빈이 한 것처럼 갈라디아서 6:16절에 호소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이 문단에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사이의 대조가 계속 있었다.갈라디아서 6:16절의 문맥에서는 그러한 대조가 없다.]....25절의 주요논제는 이스라엘의 완악이 그치고 그들이 회복될 것이라는 점이다.이것은 12절에서는 이스라엘의"충만함",15절에서는"받아들이는 것".23,24절에서는 또다시 접붙임이라고 부르는 여러 사실들을 다른 표현으로 확증하고 주장하는 것이다."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최절정적 진술을 이상에서 말하는 대로 분명한 사실 이외에 달리 해석한다는 것은 주석상의 무리이다.....그것은 종말에 가서 모든 이스라엘이 다 회심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다음과 같은 유추로 보아서도 이런 주장은 반대되고 있다.이스라엘의 배교,그들의 범죄,그들의 실패,버림,완악은 전체적인 것이 아니었다.언제나 남은 자는 있었다.가지 모두가 꺾이움을 당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완악은 부분적이었다.마찬가지로 회복과 구원도 모든 이스라엘을 모두 다 포함시킬 필요는 없다."온 이스라엘"은 다수를 가리킨다.그것은 이 장 전체를 따라 나타나고 있는 형태와 일치되는 전체로서의 국민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모든은 그 말의 적절한 의미에서 다루어야만 한다.'전체로서의 이스라엘,한 국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이다.그것은 필연적으로 모든 개개 이스라엘을 포함하는 것으로 본 것은 아니다. Cf.왕상12:1....대하12:1....단9:11."(샌데이와 헤들람)]


[로마서 성서주해] 12장1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200주년 신약성서주석은 '이성적'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예배니라.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사도는"몸"이라는 말을 온 인격을 대표하는 데에 쓰고 있으며 따라서 그 의미는"너희 온 인격을 드려라"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어 온 터이다.....희랍철학에서는 몸에 대한 과소평가가 있었다.윤리적 이상은 몸과 몸의 타락적 세력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몸에 대한 이와같은 견해는 성경의 전반적인 증거와 모순된다.몸은 처음부터 인간의 인격 속에 하나의 완전한 요소이다(참고.창2:7,21-23).몸의 분해는 죄의 삯이며,그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다(참고.창2:17;3:19;롬5:12)구속의 완성은 몸의 부활을 기다린다(참고.롬8:23;고전15:54-56;빌3:21).그러므로 성화도 몸을 그것의 범위대로 가져와야만 한다.이런 종류의 권고를 해야 할 필요성은 몸에 대한 과소평가 때문임은 물론이거니와,몸과 밀접히 관련된 몸의 방종이 너무나 유행하고 득세하여 윤리적 요구의 평가에서 매우 동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산"이란 말이 이 제사의 영구성을 반영하고 있다.그것은 계속적인 헌신이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여기 사용된 말은 신약에서 보통"신령항"(Spiritual)이란 말로 해석되는 그런 용어가 아니다.합당한 또는 합리적이란 말이 보다 문자적 의미이다. 즉 그것은 성령의 지시에 따라 드린 제사이다.(참고.벧전2:5).그러나 바울이 다른 곳에서는 결코 사용하지 아니했고,오직 신약에서 기타 한 곳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이 분명한 용어를 쓰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노라고 했다.(벧전2:2).여기서 말한 예배는 경배적 예배이다.사도는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특징짓는다.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정신과 이성과 지성을 열거하고 있다는사실로 보아 하나님께 합당한 성질을 이끌어 오고 있는 예배이기 때문이다.이 예배는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것과는 대조적인 합리적인 예배이다.우리의 신체적 기능속의 상당수는 우리의 결의를 지원하지 않는다.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경배적 예배는 지적인 결의를 강요한다.우리가"합리적"이란 말에서 유도해 낼 수 있는 교훈은 이런 것이니,곧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전적으로 의식적,지성적 그리고 성별된 헌신으로 바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결코 성서적 의미에서 본"신령한"이란 말을 우리 몸에 대해서는 쓸 수 없다는 사실이다.더우기,이런 표현은 기계적인 형식주의와는 정면으로 반대된다.그리하여 예배는 H.P.Liddon이 말한 것 같이"유대교와 이교도 종파의 외부형식적 예식과는"대조를 이룬다.어떤 경우이든간에,문제의 이 용어는 우리의 몸과 몸이 드리는 예배가 특이하게도 합리적 반응적인 존재자들인 우리들과 어떻게 관련되고 있느냐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성서주해] 12장3-8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믿음"이란 말은 믿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서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즉 복음의 진리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참고.갈1:23; 딤전5:8; 유다서 3절).이것은 개개 신자들에게 어느 정도로 주어진 물건으로 생각되어질 수는 없다.그런즉 여기"믿음"은 신자에 의해 역사되어지는 믿음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믿음의 분량"은 마치 믿음이 부분으로 나뉘어질 수 있어서 몫으로 측량이나 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믿음의 분량"은 믿음이 그리스도의 교회안에서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기능들의 관점에서 역사되어지고 있는 각이各異한 국면을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바울이 사도직분에 관해 언급하지 아니한 이유는 명백하다.로마에는 사도가 없었기 때문이다...."섬기는 일"이란 말은 물질적 필요와 관련해서 자비의 봉사라는 보다 한정된 의미에서 사용되기도 한다(참고.행6:1;11:29;12:25;고후8:4;9:1,12,13).더우기 이 서신에서(15:31)그 말은 바울 자신이 예루살렘에 선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그것은 15:25-27절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그대로다. 이 말은 포괄적인 사용은 바울이 "직임은 여러 가지다"라고 말하고 있는 고린도 전서12:5절에서도 분명하다....집사직에 대한 것이라는 견해를 배격해도 될 만한 아무런 결정적인 이유도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이것이 바로 그와 같은 은사라고 생각될진대,집사들이 스스로 이런 섬기는 일에 권고를 받게 되는 좋은 이유가 있다고 할 것 이다....그 다음에 언급된 은사는 求濟구제하는 일이다.구제를 하되 성실함으로 하라는 것이다.이 말은 때로는 관대하게 구제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참고.고후8:2;9:11,13)....여기서의 구제는 사적私的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교회의 헌금에서 주는 것은 아니다...."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여기서 지시되고 있는 사람은 교회내에서의 치리治理와 감독의 책임을 맡은 사람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참고.살전5:12;딤전5:17).뒷 문단에서는"장로들"이라고 했다.고린도 전서12:28절에서는 이 직분이 다른 명칭, 즉 "다스리는것"으로 되어 있다...."긍휼"이란 말의 사용에는 궁핍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직접적 개인적 섬김에 대한 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앞에서 말한 구제는 지금의 긍휼의 사역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이 경우의 미덕은 즐거움으로 이행해야 하는 미덕인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봉사"(섬기는 일)란 말은 여러 경우에 적용되었다:식탁봉사(사도6,2),헌금(15,25.31),헌금관리(1고린16,15;2고린8'4),바울로의 사도적 직무(11,13;1고린12,5;2고린4,1;11,8). "지도자"(다스리는 자)는 교회공동체를 지도하는 사람(1데살5,12-13;1디모5,17참조)으로서 신자들을 훈계하는 직책을 맡는다. 8절에서는 그들을 보호하고 보살피는 사람인 것 같다(16,2참조).


[로마서 성서주해] 12장11,16,20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11 열성에 식지말고 영에 열렬하며 주님을 섬기시오.16 서로 사이좋게 살고(직역하면"서로 같은 것을 생각하라")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시오.분수에 넘치게 현명하다고 자처하지 마시오. 20 오히려"당신의 원수가 굶주리면 그를 먹여 주시오.그가 목말라하면 그에게 마실 것을 주시오.사실 당신이 이렇게 함으로써 불타는 숯을 그의 머리위에 쌓아올릴 것입니다.

"불타는 숯"은 하느님의 심판이나 죄인의 가책과 회개할 용의를 상징한다.원수를 악으로 대적하지 말고 자비를 베풀라고 권고하는 20절에서는 이 말이 회개할 용의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한다.

가톨릭 새번역

11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15) 16 서로 뜻을 같이 하십시오.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20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위에 놓는 셈입니다."(23)

(15) "마음이"와 "성령"의"성"은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일부 수사본들에는"주님을"대신에"시간을"로 되어 있는데,일부 주석가들은 이 말을'적절한 기회를 잘 살피십시오.'라는 뜻으로 이해한다.(에페5:16참조) (23)잠언25,21-22절을 인용한 것이다.바오로가 이 본문을 인용한 의도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첫째는,피해자의 선의로 가해자의 악의가 더 두드러짐으로써,그에 대한 하느님의 벌을 더 무겁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첫째 것과 반대로 피해자 쪽의 사랑을 보고 그야말로 괴로울 정도로 놀란 악인이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둘째 해석이 문맥에 더 잘 맞는 것으로 여겨진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Klassen의 결론은 이와 같다."숯불은 수치,양심의 가책 또는 형벌을 가리킨다는 너무도 널리 해석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이런 해석은 ,본문의 모든 지지를 결여하고 있다.애굽문헌과 속담에 의하면'숯불'은 사랑의 행위의 결과로서 생겨난 마음의 변화를 생동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국제비평주석

"머리 위에 핀 숯"이란 표현은 또한 2에스드라서16:53에도 나타난다.그 기원에 대한 그럴듯한 제안은 이것이 머리에 잿더미 위에 타는 숯을 담은 접시를 얹고 다님으로써 자신의 죄과를 깨끗이 했던 이집트의 의식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S.Morenz;W.Klassen;L.Ramaroson; S.Baltina)



페데리꼬 바르바로의 로마서주해

타고 있는 불을 머리에 쌓아 놓는다는 것은 불과 기름을 성벽위로 던지는 옛날의 전략(플라비우스 요세푸스,<유다 전쟁>3:27,3.271-275) 에서 취한 예일 것이다.그리이스 교회의 교부들(금구 성 요한,데오도래투스,데오필라투스)는 적에 대한 무거운 벌이라는 뜻으라 하였다.아우구스띠노는 자주 그런 의견을 반박하였다.아우구스띠노의 생각이 좋을 것같다.신도들이 적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이나, 그것은 심한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적들에 대한 하느님의 크신 복수를 청하는 애덕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좋을 것이다.혜택을 입은 적敵은 마음의 가책을 느끼고,그런 가책은 겉으로도 나타날 것이다.사랑의 불에 탔다면 적은 은혜를 받고 회개할 것이다.요컨대 사랑은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데 그 사명이 있다.

Commentary Critical and Explanatory on the Whole Bible-jamieson,robert

(compare Mt5:44;Ro12;20).As metals are melted by heaping coals upon them,so is the heart softened by kindness.


[로마서 성서주해] 13장11-12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셩경주석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왔다는 신약적 개념과 관련해서 이런 전망을 취한다는 것은 필요하다.그것은 예언적인 전망이 가까움이지,우리가 셈하는 연대기적 시간의 계산의 가까움은 아니다.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계시함에 있어서,그리스도의 죽음,그의 부활 및 승천,오순절의 성령의 부어주심과 서로 관계가 있는 그다음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은 영광가운데서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이것은 신앙의 지평선 위에 매여달려 있는 사건이다.현재와 이 획기적 구속 사건간의 유사한 성질을 지닌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그러기에 그날이 바로 오늘과 같다고 사도가 기록했을 때에는 틀린 말이 아니다....."밤"은 "이 세대"와 동일시됨이 틀림이 없으며,따라서 밤은 그의 강림에 선행하는 이 세상의 역사의 전기간과 동일시되고 있기 때문이다.사도는 이 세상의 역사의 과정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사실,곧 역사의 결말이 시급하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고 추론을 내릴 만한 그럴듯한 이유를 우리는 지니고 있다.다른 곳에서 바울은 지난 과거를"만세와 만대"라 했다(골1:26).그는 현재를"말세"와 동일시했다(고전10:11).그리고 히브리서9:26절에서는"세상 끝"이라고 했다.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밤은 깊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 정도만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해야 할 말이다.


[로마서 성서주해] 14장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팔레스티나의 유다인들은 채소(2사무17,28참조)고기,술(다니1,8.12-16;유딧8,6;10,5;12,1-2;에스14,17참조),안식일이나 축일 규정을 세심하게 지켰다(즈가7,5;8,19참조).루가18:12를 보면 경건한 바리사이들은 한 주간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을 했다."믿음에 약한 이들"은 그리스도께 개종한 뒤에도 위의 규정들을 세심하게 지킨 로마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강한 이"들은 이 규정에 대해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믿음에 약한 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의심하는 자를 뜻하지 않는다.그분이 성취하신 하신 자유,즉 불결하거나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 유다계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그들은 신앙에 의해서 의로움에 다다랐는데도 이 자유를 행사하기를 주저했다는 뜻으로 믿음에 약했다는 뜻이다....안식일이나 단식일이나 축일을 다른 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관습에 대해 각자가 망설이지 말고(14,22-23)분명한 태도를 정해야 한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너희가 받되"라는 말은 강한 자들에게 직결되고 있기 때문에,만일 연약한 자들의 의심하는 바가 분석과 논평의 주제가 될 경우 연약한 자들에게 떨어질 노怒함을 피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부딪힐 것이란 어떤 사람이 혹 부딪히게 되는 '길 위에 놓인 장애물'이다.거칠 것이란 문자적으로 '덫'을 가리킨다...."너희의 선한 것"..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어 왔다.가령,복음,기독교 신앙고백,하나님의 천국 등이다.그러나 강한 신자가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누리고 있는 자유보다 문맥에 더 잘 어울리는 견해는 없다....주석가들 사이의 견해차이는"의와 화평"의 의미애 대해서다.혹자는 주장하기를 이런 용어들은 법정적 의미라고 하는 바,의는 칭의의 의를 가리키고(참고,1:17;3:21,22;10:3,6),평강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강을 가리킨다는 것이다(참고5:1).[칼빈,필립비,핫지] 다른 혹자는 주장하기를 이런 용어들은 윤리적으로 이해한다 하여,신자들에 의해 성취된 의와 또 신자들에 의해 촉진되고 보존되는 평강을 가리킨다고 한다.[마이어,가뎃,샌데이와 헤들람,바렛] 신자들이 지키고 있는 모든 옳음과조화가 하나님의 화평에 기초하고 있음은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지만,두번째 견해를 두둔해서 할 말이 더 많다.

[로마서 성서주해] 15장19-20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그리스어,일뤼리콘)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200주년 신약성서,완결했습니다).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일루리곤은 아드리아의 동부 해변이니,대강 말한다면 지금의 남부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를 포함하는 곳이다.따라서 마케도니아 북부와 아가야의 서북쪽이다(200주년신약성서주해:기원전11년 로마제국의 황제령이 되었지만 6~9년 원주민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티베리우스 황제가 그곳을 다시 정복했다.일리리쿰은 그 후 판논니아와 달마시아로 불렀다)....그는 사도행전 20:1,2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여행 중,일루리곤에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혹은 그가 고린도에서 체류하는 동안 이 지역 안으로 전도여행을 했는지도 모른다.(참고18:1,18;20:3)..."편만히 전하였노라"는...그가 복음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참고 골1:25),그가 복음을 제시하던 거리낌없는 충만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행20:20,27).바울은 자기 임무를 이행했고,또 위에서 밝힌 지역안에서 그의 사역의 계획도 완성했다."편만히 전하였노라"는 말은 그가 그 지역 안의 모든 곳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는 의미는 아니다."그가 위대한 사도의 의무라고 생각한 것은 그가 교회를 세우고 그렇게 놓여진 터위에 다른 사람이 세우도록 맡겨두는 일이었던 것이다(고전3:7,10)"그리고 그의 기능이라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 그는 말하기를 그가"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다"고 했다(23절).


[로마서 성서주해] 로마서 15장22-33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22 이러한 이유로40 나는 여러분에게 가지 못하도록 여러 차례 방해를 받았습니다. 23 그러나 지금 나는 이 지역에서 더 이상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 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24 내가 스페인으로 갈 때(여러분에게 가려고 합니다).실상 나는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보고 먼저 여러분과 얼마 동안 사귀다가 그곳으로 (가는 여행에) 여러분의 배웅을 받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25 그러나 지금 나는 성도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납니다. 26 실상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인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다소의 기부를 하기로 기꺼이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27 그들은 과연 (그렇게 하기로) 기꺼이 결정했고 그들에게 빚진 이들입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들에 한몫을 차지하게 되었다면 그들은 또한 물질적인 것들로 그들에게 봉사해야할49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28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다 마치고 그들에게 이 결실을 봉인해서50 전해주고 나면 여러분에게 들렸다가 스페인으로 떠날 것입니다. 29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도착할 때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져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30 [형제 여러분],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또한 영의 사랑에 의해서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나를 위해 하느님께 드리는 여러분의 기도중에 나와 함께 싸워 주시오. 31 그것은 내가 유다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구출되고,예루살렘에서 나의 봉사가 성도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입니다. 32 또한 그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기쁘게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분과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기 위함입니다. 33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아멘.

40 바울로가 동부 지중해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바빠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기 어려웠다. 49 "봉사하다"는 경신례 용어이다(민수8,22;16,9;18,22.23;2역대11,14 참조). 이 말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헌금이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뜻을 가짐을 암시한다. 50 봉인은 소유권을 가리키는 공적표지다....바울로는 그들이 헌금을 받아 들이지 않을까 걱정했다.이것은 그와 예루살렘 교회의 관계가 확고부동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바울로가 그 이유를 명시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추리할 수밖에 없다:예루살렘 교회안에 헌금으로 입증될 그리스도인 두 집단 사이의 일치를 방해하는 적대 세력이 헌금을 거절하도록 부추길 위험이 있었던 것같다.이 세력은 이를테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울로의 사도직을 반대한 거짓 형제들(갈라2,4참조)과 비슷한 자들이었을 것이다.바울로는 예루살렘의 형제들이 헌금을 받아들이도록 유다계 그리스도인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이 공동체가 자기 편을 들어 이방계 그리스도인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보여 주기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사도24,17을 보면 성도들이 헌금을 받아들인 것같다.

[로마서 성서주해] 16장18,25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국제비평주석

18 이같은 자들은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교활,한글개역개정판;200주년 신약성서,번지르르한;그럴 듯한,공동번역)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永世前부터 감취었다가

바렛은 그 언급을 '음식률에 마음을 빼았긴 것'으로 간주한다;그러나 이런 해석은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가고 약간의 현대 지지자들을 갖는 반면에 아주 그럴듯 하지는 않다....문자적으로 취해진다면 14:15~21절의 관점에서 훨씬 더 자연스러운 설명은 분명히 바울이'믿음이 연약한'형제들을 영적으로 파멸시키면서까지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14:1~15:13의'믿음 강한'이들의 이기적인 주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영세 전'에서 분명한 의미를 확증하기란 사실 어렵다.딤후 1:9;딛 1:2절에서는"before the world began"을 의미할 수 있다."times eternal"은 이 세계역사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게될 것이다.지금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times eternal"은 창조에서 그리스도의 강림까지 나아가는 시대를 지칭할 수있다....이것이 바울의 의미라면, 그땐 이런 사상이 될 것이니 곧 그 계획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가운데 감추어 있었으며 이 은혜는 영원부터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는 진리를 말해준다는 것이다.선택의 비밀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촉진되듯이(엡1:4),또한 이 비밀의 영광이 비록 감추어져 있긴 했지만 하나님에게는 감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원 전에 그의 계획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JOHN,GOOD NEWS

페데리꼬 바르바로

1. "한 처음".거의 모든 성서학자는 이 말씀이 창세기에 있는 첫말씀,"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창1:1)의 명백한 암시라고 인정하고 있으나 사도 요한은 우주 창조의 먼 순간을 벌써 초월하고 영원으로부터 영원과 함께"말씀"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벌써 말씀이 계셨다는 곧 "말씀"은 역사적 변천의 지배아래에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영원히 변함없으시고 한없이 완전하신 존재와 실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따라서"말씀"은 우주 창조 전에 모든 시간을 넘어 언제나 영원히 존재와 실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따라서"말씀"은 우주 창조 전에 모든 시간을 넘어 언제나 영원히 존재하고 계셨던 것이다.(삼위일체론에 따라 해석할 때 "한 처음"이 '영원부터'를 의미한다.) 51.그들은 언젠가 예수님께서 초자연적 자격을 깨닫게 할 것이다.예수님께서는 그 약속을 창세기에 있는 이야기(28:10-17)에서 암시하고 있는 영상적인 말씀으로 나타내셨다.메소포타미아를 떠날 때 노하고 있던 형제 앞에서 야곱은 베델에서 꿈에 하늘에 닿는 신비스러운 사다리에서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자고 있던 야곱보다 제자들은 장차 자기네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하늘이 열려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하늘과 사귀시고 연락을 하고 계셨다.예수님의 전생애에 걸쳐 이런 기적이 실현될 것이다."사람의 아들"(다니엘 7:13-14).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부르신 이름이 여기에 처음 나타난다.이것은 제자들을 메시아에 대한 초자연적 이해로 이끄시는 데 정녕 알맞는 말이었다. 2장 1.복음사가가 갈릴래아 가나라고 한 것은 시도와 띠로 부근에 있는 다른 가나와 구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이곳은 나자렛에서 북방 8키로 지점에 있었다.대충 지금의'게프르 겐나'와 같은 곳이다.3-4.팔레스티나에서 결혼 축하연이 한 주일이나 계속되었다는 관습을 생각하면 이런 경우 잔치에 내놓는 포도주가 상당히 많은 양이었을 것이다.이 한주일사이에 뜻밖의 손님이 올 가능성도 있었다.그래서 많은 포도주를 여유 있게 준비하지 않으면 잔치 도중에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이것은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할 주인에게는 커다란 수치였다....텍스트에 충실하게 번역한다면 "여인"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곧 어머니를 "여인"하고 부르셨는데 이 말투에는 언짢아하시는 느낌을 짙게 풍기고 있다.한 젊은 유다인이 어머니를 향해 어머님하고 불러야 하리라고 여겨지는데 이 특별히 장엄한 기회에 있어서 존엄과 깊은 인품에 대한 존경의 뜻이 풍기는 호칭인"여인"이라고 부른는 편이 더 어울렸던 것일까? 이 말에서는 깊은 애정이 였보인다.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똑같은 표현을 쓰셨다(19:26).그리스인과 소아시아인들은 가장 친밀한 사람을 부를 때 여인이라는 말을 썼다.'마담'이라는 뜻이다(호메로스&일리아드 3:204;꾸세노폰&치롭 8:3)..틀림없이 거절의 표시이기는 했으나 어머니께 갖추어야 할 애정과 존경이 모두 들어 있었고 더우기 그분 말씀에다 음성의 음조,얼굴 표정이 틀림없이 나타나 있었을 것이다.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거절의 의미를 나타 내셨다."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드러내어 말씀하신 말씀하신 것처럼(루가 2:49)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다하시기 위하여 인간적인 모든 애정,혹은 목적에 따를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만 따라야 하셨던 것이다(4:34).어느 교부들(아우구스띠노,그레고리오,이레네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때는 영광에 들어 가신 "때"라고 하였다.그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청을 모두 들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신비적인 뜻이라기보다는 메시아로서 외적인 활동이 실현되는 "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6. 당시 돌항아리는 율법 상의 부정을 타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이 명하는 정결 예식에서는돌항아리에 물을 담아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여기에 기록된 돌항아리도 마침 그런 일을 위해 곧 손발 접시따위를 씻는 데 쓰이고 있었다.이 돌항아리는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80리터들이에서 120리터들이 까지 있었다.그집에 정결 예식용 항아리가 이상스럽게 많았던 셈인데 혼인 예식이 일주일이나 걸리는 축하연의 필요에 따라 설명이 된다.이런 특별한 경우에는 이웃에서도 빌려 왔을 것이다...가나는 해발 250미터쯤이고 가파르나움은 해면 밑 200미터쯤 되는 곳인데 거리는 약 20키로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에서 가파르나움으로 가는 길은 심한 내리막 길이었다. 3장 22.예수님께서는 그 도성에서 나오셨으나 너무 멀리 가지 않으시고 팔레스티나의 중심인 유다에 머무르셨다.약 2달 동안 유다에 머무르셨다고 생각된다. 23.이 이곳은 벌써 4세기 경부터 에우세비우스와 예로니모가 사마리아의 시도 폴리스에서 약 8키로 지점에 있는 지금의 베이삼과 같은 곳으로 여겨 왔다.이 곳은 샘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4장 4-5.엄밀한 뜻으로 팔레스티나는 당시 세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곧 북은 갈릴래아,남은 유다,사마리아는 이 두 나라 사이에 있었다.갈릴래아에는 히브리인과 함께 많은 이방인이 섞여 살고 있었으나 유다에는 이방인이 매우 적었다.사마리아 인구는 거의 이방인이었으나 그들 중에는 기원 전 7세기경 아시리아인에게 몰려 이 곳으로 옮겨온 히브리인 이주민의 자손도 살고 있었다.예수님께서는 나그네로서 가리짐 산 남동쪽 구약의 존경할 만한 추억을 지닌 마네의 아름다운 평야를 지나가고 계셨다.거기에는 예로부터 조상들의 잦은 순례의 근거지가 된 세겜(창 12:6,33:18,35:4,37:12;여호수아 24:25;판관기 9:6),요셉의 밭과 무덤(창 48:22;여호수아 24:32),야곱의 우물이 있었다."시카르".세례우티데스 시대부터 옛 세겜의 위치는 북방 1,500미터 지점에 떨어져 있는 비교적 현대적인 도시,곧 플라비아 네아포리,지금의 나프르자라고 해 왔다.그러나 최근 델 바라다에서 한 발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시대의 옛 세겜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아람말인 시코라는 복음서에서 시카르가 되었다.거기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곳에 지금도 십자군이 세운 성당안에 야곱의 우물이 있다. 7."한 사마리아 여자".사마리아라는 고을은 "오무리"가 세운 곳으로 이스라엘의 수도이기도 했던 지금의 "세바스띠에",세겜에서 12키로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그래서 이 여자는 사마리아 고을 사람이 아니라 사마리아 나라 사람임을 알 수 있다....우물은 매우 깊은데 39미터쯤 되는 것도 있었다.그리고 팔레스티나의 옛 우물에는 양수기가 없었기 때문에 긴 밧줄이 달린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야 했다.가까이 사는 주민의 친절을 믿고 나그네는 긴 밧줄이 달린 두레박을 갖고 다니지 않았다.나그네가 청하는 물을 거부한다는 것은 큰 죄라고 보았다.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물을 청하셨는데 그것은 그 지방관습을 따르신 것이었다.그러나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교제는 최소한도로 제한되어 있었다.이 유다와 사마리아의 깊은 적대감정 내지 반감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이 적대감정은 바빌론의 유배에서 돌아 와 즈르바벨의 동료가 성전을 개축할 때 사마리아인의 협력을 거부하면서부터 더욱 격심해졌다(에즈라 4:1-5).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한 마낫세라는 사제가 예루살렘의 성전과 대립되는 사제직과 성전을 가리짐산에 세운다는 극단적인 행동에 이르렀을 때 적대 감정은 최고조에 달했다(유다고사XI 8:2).마침내 유다인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같이 보았고 또한 그렇게 다루게 되었다.집회서(50:25-26)는 사마리아를 증오하는 민족이라 하였고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다.그래서 사마리아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복수하기를 잊지 않았다(유다고사 VIII2:2.XX6:1). 20.마낫세(B.C.400년경)의 분열이 이루어진 이후 사마리아인은 예배를 가리짐산에서 드리고 있었다.거기에 서있는 성전은 기원 전 129년경 요한 이루까노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사람들은 지금도 거기서 의식이나 기도를 하고 있었다.지금도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마리아인이 거기서 과월절을 지키고 있다. 35.마네의 평야에서는 수확이 6월 후에 이루어진다.그렇다면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추방시키신 과월절로부터 2달이 지난 셈이다. 46.아첨에 능란한 왕이라는 말을 듣던 헤로데 안티파스의 작은 궁전에 속한 무관 혹은 관리였을 것이다.어느 해석학자는 이 고관을 마나엔(행 13:1),혹은 자기의 재산을 가지고 최초의 사도들의 모임을 도와주고 있던 여자들 가운데의 한 사람 요안나의 남편,곧 헤로데의 신하(루가 8:3) '쿠자'와 같은 인물이었다고 하였다.후자의 경우를 확실하다고 하기에는 지금껏 뚜렷한 증명이 없지만 진실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51.가나에서 3시간 반쯤 지나 길은 갈릴래아 평야 끝에 이르고 티베리아 호수 낮은 지역(700미터쯤)으로 가던 고관은 거기서 종들을 만났다.그들은 좋은 소식을 알리려고 서둘러 마중 나왔던 것이다.어린이는 벌써 병에서 해방되어 있었다.열은 오후 1시경 떨어졌다....가나에서 가파르나움까지는 7시간쯤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복음사가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서둘러 돌아온 고관은 같은 날 오후 늦게야 집에 이를 수 있었다....저녁 6시부터 다음 날이 시작되기 때문에 어린이가 나은 것도 어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데리꼬 바르바로

5장2."베짜다".호겔과 쁘라는 베데스타라고 읽지만 이것은 지지하기 어렵다."못"은 현재의 풀(수영장)과 같은 것이었다.성녀 안나라는 지금의 성당에서 서북쪽으로 30미터쯤의 거리에 있고 지금은 대부분이 발굴되어서"다섯 행각"이 있는데 그것은 요한이 기록한 것과 똑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이 못은 길이 120미터,폭 60미터의 자리를 차지하고 둘레에는 기둥으로 구획된 회랑이 둘러 싸고 있었다."양의 문 곁에는".양의 문은 그 못으로부터 그렇게 멀지않은 동북쪽 한 구석에 있었다.요한은 이 못에 베짜타(새로운 집)이라는 아람말의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성전의 북쪽에 지은 새로운 구역의 이름이었다.이 구역은 옛 거리와 깊은 도랑으로 나뉘고 있었다(유다전기 V 4:2). 5.실제로 보면 그 병은 중풍이었음을 알 수 있다. 7장 51.고소된 자에게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문제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벌한다는 것은 확실히 율법의 정신을 거스르는 것이었다.그러나 몹시 분노하고 있기 때문에 바른 정신을 잃은 사람들과 토론을 하는 것은 시간의 낭비이다.그들은 니고데모에게 모욕을 퍼부울 뿐 편견에 찬 논법을 가지고 이야기를 끊어 버린다."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란 말이요?" 이것은 모욕이다.이러한 경우 예수님을 변호하려고 생각하는 자는 제 나라의 영광에 취해 있는 갈릴래아 사람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라고 한 어리석은 주장도 거짓말이었다.예언자 요나는 실로 갈릴래아 사람이었다(열왕기 하 14:25).그러나 이러한 논의를 차치하고라도 지금까지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있어서도 그러하리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야의 영광이 이방인의 갈릴래아에도(이사야 9:1) 미칠 것이라고 말하여 마침 그 반대가 되는 일을 암시하고 있었다.끝으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태생이 아니시었다. 8장 6. 무엇인가를 땅에 쓰신 예수님의 이 동작은 아무 말도 들으려고 하지않고 자기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이러한 뜻없는 것을 쓰신 예수님께서는 이와같은 문제를 법률상 해결 할 권리가 자기에게 없다고 암암리에 대답하려고 하신 것 같다.그러한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재판소가 있으므로 그 곳에 물으면 좋으리라.유다인의 율법학자들도 자기네에게 향해 오는 델리케이트한 문제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고 싶을 때에는 땅에 무엇인가 쓰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10장 1.실제적인 시골 생활에 대한 묘사이다.밤이 되면 그 때까지 풀을 뜯어 먹기 위하여 산에 흩어져 있던 양들이 맹수와 도적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돌담으로 쌓은 양우리로 들어 간다.이 양우리를 지키는 목자들은 모두 그 안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막이나 혹은 그다지 멀지 않은 집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찌기 다시 그 곳으로 돌아 온다.산으로 가기 전에 양을 우리에서 끌어내기 위하여 소리를 지른다.때로는 목자가 뒤에서 양을 몰기도 하고 또 때로는 양떼 앞에 서서 목장을 향하기도 한다.때때로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 먹을 풀이 있는 평야로 양을 데리고 가기도 한다. 3.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 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이 말씀은 양에 대한 목자의 특별한 애정을 보여 준다.오늘날에도 팔레스티나의 목자들은 무리들 속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는 양에게 이름을 붙이는 습관이 있다.11장 1."라자로"(라자로스,에르아자르[하느님께서 도우신다]의 생략형) 이 옛 마을을 가리키는 우물과 집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여기에서 동방 200-300미터 되는 곳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세운 라자리온(현재의 에르 라자리에)라는 집의 한 모서리의 흔적이 있다.하부 시티 마리암이라는 예루살렘의 문에서 올리브산을 따라 에르 라자리에(베다니아)까지는 3키로쯤으로 걸어서 약 반 시간 걸린다.전통이 라자로의 무덤이라고 일컫고 있는 땅 옆에 하나의 비잔틴식 성당과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서 있다. 18"오리".15스타디온 19.장레는 한 주 동안 계속되었다(집회서 22:12).그런 관습은 오랜 옛날부터 내려온 것이었다(마카베오 하 10:1-9). 38.히브리인들에게는 시신을 자연동굴 또는 인공으로 바위에 판 동굴 속에 묻는 습관이 있었다.대개 무덤은 두 서너 단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출입구를 돌로 막아 놓았는데 무덤이 깊을 경우 돌을 뉘어 두었다. 21장 19. 다른 사람이 허리띠를 묶어 주고 원하지 않는 데로 데려간다는 것은 끈으로 십자가에 묶이고 사형 집행장에 끌려 가 사형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5장 2."커퍼 두루마리"(the copper scroll)가 쿰란 동굴에서 발견되었고 그것에 의하면"Beth Eshdatain"이라고 판독되는 문절이 나오고 있고 그것에 따르면"베데스타"가 거의 확실하지 않은가 여겨진다...이 주랑이 사방에 네모꼴로 서 있고 그리고 두 개의 못 중간 경계선에 또 하나의 주랑,이렇게 다섯이었다.

LUKE , GOOD NEWS

[루가복음 성서주해] 1장1-38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데오필로"는 하느님의 벗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존경하는"이란 호칭은 대개 나라의 장관에게 쓴 말인데 때로는 친구나 친교를 맺은 사람에게도 쓰는 말이었다.데오필로라고 한 이름은 그저 하느님을 사랑한 그리스도의 신자의 상징적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주장이 있었다.그러나 이 인물은 명백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이다.또한 "존경하는"이라고 한 호칭을 상징적 인물에 붙였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난"은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또는 실현된 것 혹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서 확실하게 인정하고 있던 사실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조작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고 암시하고 있는 듯 싶다."그 일들".예수 그리스도의 생활 수난,죽음,부활,승천으로 이루어진 인류의 구속사업을 가리킨다."여럿".이 말은 루가보다 앞서서 예수님의 사적을 기록한 많은 저자를 가리키고 있다.그들 중에는 마태오나 마르코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여기서는 정확하거나 정확하지 않거나는 불문하고 착한 의향을 지니고 최초의 신자들이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기록한 모든 자료를 가리키고 있다.이러한 기록은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인정한 정정正典복음서가 넓게 퍼지면서 읽혀지게 되자 차차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그러나 확실한 것은 "여럿"이라는 말에 베드로와 야고보의 거짓 복음서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이러한 거짓 복음서는 루가 복음서보다 훨씬 후세에 기술된 것들이었다."처음부터".세례자 요한의 선포에서 시작되고 예수님의 공생활을 본 그 때부터인 것이다(마르코1:1;루가3:23;행10:36-37)."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한 사람들",그 사도를 중심으로 하여 광범위하게 보면 72인의 직제자들일 것이다.그들은 이를테면 살아있는 증인들이었다.여기 복음서 기술의 역사적 사실성,사료史料로서의 사실성이 강조되고 이 있는 셈이다."우리에게 전해 준 사실".처음부터 예수님께 관한 일들을 쓴 사람들은 모두 사도들과 구세주께 직접 배운 제자들의 가르침을 전하는 데 충실했었다.사도와 제자들은 처음에는 눈으로 본 사람들이었고 후에는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곧 복음의전도자가 된 이들이었다.그래서 복음서의 첫 원천은 사도들의 복음 선포 전도였다..... 구약성서에서 이 말은("전해 준") 항상 입으로 전한 명령,혹은 교훈을 가리킬 경우에 사용되었다...."순서대로"...란 부사를 해석자는 두 가지 뜻으로 보고 있다.하나는 시간적인 순서,또 하나는 논리적인 순서인데 후자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헤로데"는 헤로데 대왕이다.이두메아에서 태어났고 제2 이루까노(기원 전 47년)가 대사제였을 때 율리오 카이사르로부터 유다 총독으로 임명된 안티파도로의 아들이었다.교활한 간교에 뛰어났고 그곳으로 마침내 로마의회에서 왕이란 칭호를 받고 로마 714년(기원 전 37년)에서 750년(기원 전 4년)까지 나라를 다스리다 그 해에 죽었다.그는 여러가지 거창한 공익사업을 하였기 때문에 그를 대왕이라고 불렀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대대적인 개수공사였다."아비아 조".다윗이 성전에서 종교 봉사 체제를 세울 때 사제들은 24조로 나누고 각 조에서 반장의 이름을 따 부르게 했다.그들 각 조는 토요일(안식일)부터 교대하여 (1주일간)성전에서 봉사하였는데 향로를 피우고 제물을 바쳤다.아비야조는 엘르아잘을 시조로 한 8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사제들과 레위인들은 모두 20,000여 명이었다)...즈가리야(하느님께서 기억하신다)는 아비야 조에 속해 있었다."아론의 후예".즈가리야의 아내 엘리사벳(하느님은 맹세하셨다)도 사제 집안의 딸이었다.사제는 보통의 히브리인들과는 달리 다른 종족의 여인들을 얻을 수 있었으나 즈가리야는 이런 특권을 이용하지 않았다...."사제들의 관례".사제들사이에서 일어날 여러 분규를 사전에 막으려고 매일 아침 제비를 뽑아 맡을 일을 정하였다."성소에 들어가".향대라고 부르는 성전 깊은 곳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향은 공식 기도 때 곧 오전 9시와 오후 3시에 바치고 있었다."만은 사람들".믿음이 깊은 유다인들은 토요일에 사제들이 향을 바치고 있을 때 성전에 모이는 습관이 있었다.사제가 지성소안에서 분향하고 있을 때 "밖에서는".곧 이스라엘 사람과 부인들의 광장이라는 곳에 모여 기도하였다...."분향 제단".또는 향의 제단이라고 하며 백향 나무로 만들었는데 작은 황금 판으로 덮은 제단이다.그 위에서 향을 바치고 있었다(출애굽기 40:5)..."요한(이오안네스)".히브리말로는"요하난"이라 하고,'야훼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또는 '야훼의 은총'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이 이름이야말로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잘 표현하고 있다.정녕 그의 사명은 하느님의 은총 그리스도께 나갈 준비를 시키는 데 있었던 것이다....밀,보리,기장,종려 열매 등을 발효시켜 만든 술을 말한다...엘리야가 아케브와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긴 사제와 하느님의 가르침을 버린 이스라엘 사람을 향해 용감히 싸운 것처럼 요한도 타락한 헤로데나 바리사이파 사람 도는 악을 고집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리한 칼로 내리칠 것이다.또 예언자들이 오실 메시아를 맞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신 것처럼 요한은 오실 예수님을 맞도록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마음의 준비를 외칠 것이다."아버지와 자식을 화해시키고".요한은 히브리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 데려옴으로써 아버지와 자식을 화목케하고 일치시킬 것이다.믿지 않는 자손과 그 도덕적 타락에 노한 조상에게 다시 자손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할 것이다......"가브리엘"은 말한다.나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자이다,그렇기 때문에 내 말을 믿어야 한다."하느님을 모시는 시종".왕 앞에 나아가 존경을 다하여 그 명령을 따르는 충신과 같다....가브리엘은 강생의 천사라고도 부른다.마리아께 예수님의 탄생을 즈가리야에게 선구자의 탄생을 다니엘에게 이스라엘의 구원을 알렸기 때문이다......"마리아".히브리말의 미리암.아마도 마담이라 뜻이겠지만 아름답다란 뜻이 있다....또 라그랑쥬와 휴비는 왕비라는 뜻이 있었다고 하였다....유다법에 따르면 결혼연령은 여자 12세 남자 18살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공동번역에서는 빼고 말았으나"당신은 여인 중에 축복을 받으셨습니다."란 말이 있다.여기 나오는"축복을 받으셨다"란 말은 히브리말에서는 최상급의 표현법으로 마리아가 누구보다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분이란 뜻이다.확실히 그렇다.마리아는 그렇기에 대를 이어 많은 사람의 더할 나위 없는 찬양을 받으셨던 것이다.이 말은 바티칸과 시나이 사본에는 없는데 알렉산드리아의 사본,라틴말,시리아말,이디오피아말,그밖의 많은 교부들의 책에 실려 있다.어느 비판학자는 이 말을 베껴 쓴 사람이 42절을 인용하여 써 넣었다고 하였다.이러한 이 증명은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아기는 예수(예수스),곧 히브리말의 예호슈아(야훼는 구원이시다)이다.이사야는 아기를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고 불렀는데 이 관념은 이미 천사의 인사에 포함되어 있었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그는 행정 장관이었거나 아니면 어느 도나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 총독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스트리터는 그가 도미티언 황제의 추정 상속인 티터스 플라비어스 클레멘스였을 것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는데 이럴 경우("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자"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의 데오빌로는 가명이라는 것이다.데오빌로가"저명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이것은 누가복음이 그에게 헌정된 것을 보아 추론될 수 있는 것이다.게다가 데오빌로는 누가복음의 출판과 이것을 보급하는 일을 담당하여 그 비용을 부담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Greydanus).한 권의 책을 높은 사람이나 그 밖의 중요 인사에게 헌정한다는 것은 그 당시의 하나의 인정된 관습이었는데 그 책을 보다 많은 독자를 확보한다는 뜻도 있었다(윌리허-파셔의 신약 개론).....이 마을은 오늘날 까지도 그대로 있는데 지금은 엔-나시라(En-Nasirah)로 알려져 있다.현재 이 곳에는 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서 2/3는 기독교인이고 나머지 1/3은 모하멧교도들이다.그러나 유대인들은 (고의적으로 이 마을을 피하고 있어) 한 사람도 이 곳에 거주하는 자가 없다....그 당시에는 약혼이 상호간의 충절에 대한 명확한 약속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파혼은 간음으로 간주되었다(신 22:13,23 이하 참조)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이사액의 어머니 사래(창세 11,30;17,17;18,11-14) 야곱과 에사오의 어머니 리브가(창세 25,21)삼손의 어머니(판관 13,2-3)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사무1,5)도 본시 석녀石女였다....어린 양을 잡아 번제를 바칠 제관,기름으로 반죽한 밀가루와 포도주를 바칠 제관,분향할 제관,촛대를 보살필 제관을 추첨으로 선발했던 것이다.여러 제례 가운데 분향을 가장 영광스럽게 여겼다....가브리엘을 풀이하면 "하느님은 나의 영웅","하느님은 나의 전사"라는 뜻이다. 아침과 저녁 제사가 끝나면 제관은 번제 제단 밖으로 나아가서 거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해 주었다(민수6,24-26;미슈나 타미트 7,2)..이스라엘에서는 처녀가 결혼한 다음에도 성관계를 맺지 않은 채 1년 남짓 친정에 눌러 살았다.27절의 정혼은 이런 상태를 가리킨다.한 해쯤 지나고 나면 신랑이 신부를 시집으로 데려가서(마태 25,1-13 참조) 비로소 성관계를 맺었다.


[루가복음 성서주해] 1장 39-80,2장 1-2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유다".6세기까지 되올라 간 것으로 보이는 어느 오래된 전승에 따르면 이 유다는 예루살렘 남쪽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아인 가린>이다.혹은 사제의 동네라고도 부른 헤브론을 생각한 이도 있다....할례는 태어난 지 8일만에 가령 그 날이 토요일 곧 안식일일지라도 베풀었다.또한 이 날의 예절은 사제의 권리가 아니었고 어떤 이스라엘 사람도 또 여자라도 집행할 수 있었다(마카베오 상 1:60:마카베오 하 6:10).할례는 즈가리야의 집에서 이루어졌고 엘리사벳도 그 자리에 있었다.율법에 따르면(레위기12:4) 여인은 산 후 40일 동안 집밖으로 나다닐 수 없었다.할례는 하느님과 맺는 계약의 표시였기 때문에 아기가 뽑힌 백성의 한 사람이 되는 이 날 새로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유다 관습을 어기는 일이었다.....어떤 교부는 그녀가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어 준 일은 성령의 이끄심이었다고 생각했으나 아마도 즈가리야에게 어떤 암시를 받지 않았을까! 몸짓 발짓으로라도 즈가리야는 엘리사벳에게 지성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대충 알렸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밀납을 바른 판에다 쇠붙이나 상아로 만든 줄칼을 가지고....."지극한 자비의 덕분".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자비의 장腸"이다.히브리인은 장을 가장 깊은 애정,예를들면 자비나 사랑의 자리라고 보았다.그래서 이 말은 위대한 자비를 나타내었고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속죄와 그 은혜는 우리의 공로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의 속죄를 통한 하느님의 자비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한다."하늘 높은 곳에".이것은 메시아의 기원을 말한다.메시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태양"...떠오르는 태양을 말하는데"세상의 빛이신 메시아를 가리킨다.이 태양이 이 세상 하늘에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서 온 것이다.옛 예언자들도 메시아의 오심을 별이 뜰 때,새벽,솟아오르는 태양 등 이런 말로 비유했다(민수기24:17;이사야9:1-2,42:6;즈가리야6:12;말라기3:2)."죽음의 그늘".끝없는 검은 암흑을 말한다.히브리인은 죽은 사람이 검은 암흑 속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아마도 사해 서쪽 유다의 사막이었을 것이다.유다의 사막에서 그는 엣센파 사람들과 사귀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의 활동,그 역사적 사명과 군중과의 사귐을 본다면 그런 주장의 근거는 무너지고 만다....로마의 초대 황제 가이사르 아우구스토(옥타비아누스)는 이오 옥타비오와 율리오 가이사르의 친척이었던 앗지아의 아들로 기원 전 62년에 태어 났다.율리오 가이사르의 양자가 된 그는 아버지가 죽자 원수를 갚으려고 마르코 안토니오,레피도와 함께 삼두정치를 하고 아찌오 해전 후 원로원으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받았다.....이 사건을 루가만 기록했는데 정확한 기록일 할 수 있다.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첫째로 아우구스토는 이러한 호구 조사를 여러번 했다.갈라디아의 안치라市시의 어느 신전 벽에 새겨 넣은 아우구스토의 유언서에도 로마 기원 726년,746년,767년에 행한 3번의 호구 조사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로마 시민의 호구조사 뿐만 아니라 전 로마의 지형도와 지도를 만들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이 큰 일을 해내기 위한 측량은 로마 기원 747년(기원 전 7년) 경 곧 그리스도 탄생 무렵에 완성되어 있었다.이것을 아울러 생각해 본다면 이 당시 로마 제국의 속국에서 이루어진 측량 외에 부속되는 다른 일들도 완성하고 있었을 것이다.그래서 746년에 이루어진 로마 시민의 호구 조사는 로마에서 747년에 완성 된 그 광범위한 호구 조사의 일부였던 것 같고 이것은 로마에서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곳에서는 어느 기간 오래 끌며 진행되었던 것 같다....또 어느 주해자에 의하면 퀴리노가 앞서 시리아에 파견된 것은 호구 조사를 완성하기 위한 특권을 가지고 봐로의 보좌로 일하려는 것이며 봐로 후에 총독 결원 대리 기간을 보충했다고 한다.이 주해자는 루가가 퀴리노를 키프로스(행13:7)나 아카이아(행18:12)의 통치자에 대하여 한 말 곧 지방 총독이라고 부르지 않고 단지 통치자,관리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낱말은 그의 직책이 아닌 막연한 성질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불가타역을 보면 이 창야은 그 첫마디부터 성모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로 알려져 있다.초기 때부터 이것은 기독교회의 찬양에서 사용되어 왔다.문형으로 보아 서정시이다.사상과 표현 방식 그리고 찬양과 경배에 있어서 이것이 얼마나 순수하게 히브리적인가 하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이것은 거의 전체가 구약 성경 인용문으로 구성되어 있다.특별히 이 찬양과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그러면서도 마리아의 찬양은 한나가 부른 승리의 노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마리아는 깊은 겸손과 거룩한 자제로 그녀의 행복을 노래하는 반면 한나는 원수들을 이긴 승리감에 완전히 도취되었다.마리아는 구약성경의 표현을 빌려와 거룩한 말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보다 고차원적으로 적용하고 있다.예언자들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들 선구자들의 말을 가지고 종종 그렇게 하였다....메시아를 "돋는 해"로 묘사한 것은 이사야 9:2과 60:1의 말씀과 그리고 특히 하나님이 선언하신 말라기 4:2의 말씀에 부합된다:"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아마 요한은 20세경에서부터 그의 공생애를 시작할 때까지 사해 서쪽 유대 광야 지역에서 머물며 그의 과업을 위해 준비한 것 같다....그는 빈틈없는 전략과 군사적 힘으로 여러 해 동안 로마 전역에서 일어난 그 무서운 내란과 그에게 도전하는 모든 저항을 진압한 다음에 40냔 동안 절대적 군주로서 로마 제국을 다스렸다.그는 평화스럽고 관대한 통치를 통해 세계적으로 전례없는 외적인 평정을 가져다 주었고 그의 대제국에는 후에 기독교의 확산을 용이하게 한 영구한 조직을 만들었다.이 점에서 그의 명령(1절)을 통해 미가 5:2의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그는 모든 것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의 도구였다.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로마제국의 후계자들(일례로 네로 황제)은 악한 자에게 잡힌 도구로서 아주 광포하게 행하였다.그들이 기독교회를 박해했지만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 아래 있었던 것이다......반드시 구례뇨가 수리아의 총독이나 지방 총독이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공권의 권한을 받았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Plummer,ICC).그래서 그 당시에 다른 어떤 사람이 수리아의 총독이었고 구례뇨는 관청의 어느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거기에 있었다는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성경주석] 2장 3-52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로마의 관습법에 의하면 호구 조사를 할 경우 사람들은 현 주소에서 등록하엿으나 팔레스티나에서는 유다의 관습에 따라서 저마다의 본적지에 가서 등록을 하였다.이 방법이 히브리인들에게는 편리했던 것이다.그들은 종족은 물론 가계의 구별까지 엄격히 따졌고 보존해 왔기 때문이다."요셉".그는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나자렛에서 다윗의 도읍인 베들레헴(역대기 상 17:12)으로 가야만 했다.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120 키로의 거리였다."마리아와 함께".로마인은 12-60살 까지 남녀 모두에게 세금을 거두었다.그래서 마리아도 요셉과 함께 갔던 것일까? 또 한편 마리아도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그 본적지에 가 등록해야만 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또 한편 마리아도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그 본적지에 가 등록해야만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루가는 1장 32,69 두 절에서 그녀가 다윗 집안 출신임을 암시하고 있다...."달이 차서".예수님께서 정확히 언제 태어나셨는가는 확정하기 어렵다.단 여기서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로마 기원 747년(기원 전 7년) 전에도 749년(기원 전 5년) 후에도 태어나지 않으셨다는 것 뿐이다.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무렵 로마 제국에서 광범위한 호구 조사를 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이것이 746년 혹은 747년 이전 일은 아니었다. 왜 그런가? 746년에 처음 로마의 야누스 신전이 폐쇄되고 제국에 평화가 회복되었기 때문이다.더우기 팔레스티나에서 한 호구 조사는 748년에 이루어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747년 혹은 748년 이전에는 태어나지 않으셨다고 추정된다.또 마태오는 예수님이 헤로대 대왕이 다스릴 때 태어나셨고 이 왕이 죽기 전에 박사들의 방문이 있었으며 무고한 아기들의 학살이 있었고 거룩한 가정의 에집트 피난 등 여러 가지 사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적어도 몇 달이 걸려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헤로데의 죽음을 750년 3월 혹은 4월이라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은 749년 후의 일이 아닌가 결론을 내릴 수 있다.여기서 예수님의 탄생은 로마 기원 748년 749년 사이에 있었다고 인정해야 한다....2세기 중엽에 팔레스티나에 살고 있던 유스티노 및 3세기 중엽 무렵의 사람으로 이 땅을 잘 알고 잇던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이 외양간은 그 변두리의 가축을 위하여 추운 밤을 피난하는 데 쓴 동굴이었다고 하였다....여관이라고 번역하였으나 명백하지 못하다.짤라 낸 돌로 만든 정방형의 울타리에 지나지 않고 복판에는 가축을 위한 자리,둘레에는 나그네를 위한 조잡스러운 방이 있었다.그리고 이런 여관은 대부분 가축의 피난처가 있는 동굴 가까이에 있었다....목장에서 야영을 한다는 뜻이다.그들은 그솟에서 맹수나 도둑을 경계하고 있었다.예수님께서 어느 계절에 태어나셨는지는 알 수 가 없으나 교회의 전승처럼 12월이라고 해도 괜찮다.그 곳 12월은 야영할 수 없을 만큼 춥지가 않은 계절이다.....전승에 의하면 목장에서 그 곳까지는 약 반 시간 걸리는 거리였다고 한다....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태어난 그 동굴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그러나 목자들이 찿아온 후에도 요셉이 여관방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혹은 길을 가다가 할례를 행했다는 학자가 있다.이 예식에는 보통 10사람이 증인으로 참석했다.명예석이 둘 마련되고 하나는 어린이의 대부를 위하여 다른 하나는 이 자리에 참석한다고 믿은 예언자 엘리야를 위한 것이었다.예식의집행자인 아버지나 혹 그 권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작은 상처를 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이 법규로서 우리를 축성하시고 할례를 주시는 주이신 하느님이시여 축복을 내리소서" 어린이의 아버지가 대답한다."우리 아들을 아버지이신 아브라함의 계약에 들어 가게 하신 하느님,찬미를 받으소서" 또 참석자들은 시편의 말을 빌려 화창한다."주여,당신의 아들로 뽑힌 자를 축복하옵소서 " ...첫 아들은 주님에 의하여 축성되고 속세를 떠나서 사제로서 오로지 하느님을 섬겨야 했다(출13:2;민18:15-16).그 후 하느님께서는 사제직을 레위인들에게 한정시키셨으나 하느님께서 첫 아들에게 가지고 계신 권리를 기억하려고 첫아들은 성전에 봉헌하게 하시고 5세겔의 돈으로 속량하게 하셨다....율법의 명에 따르면(레12:6-8) 여인은 정결례의 제물로 일 년 된 양 한마리와 집 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를 바칠 의무가 있었다.그러나 가난한 여자는 두 마리의 산비둘기나 또는 집비둘기를 바치면 되었다....성가족은 성전에 들어가 이방인과 부인을 위한 두 출입문을 지나 15계단의 층계를 올라 가서 부인의 출입문과 이스라엘을 위한 출입문 사이에 있는 <니까나레>라고 하는 문으로 나온다.그 곳에서 사제는 예식을 따라 마리아에게 형식적인 피를 뿌리고 기도문을 외우고 비둘기 한 쌍을 바쳐 예수님을 속량했다.....어느 학자에 의하면 이 인물은 힛레루의 아들이며 가믈리엘의 아버지였던 저 유명한 랍비.시므온과 같은 인물이었다고 하였으나 의심스럽다.힛레루는 기원 후 31년에 죽었기 때문에 시므온이 예수님의 탄생 때 이미 존경받을 만한 노령에 이르러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고 또 사제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확증도 없다.그는 오히려 그의 도덕적인 단정한 인품때문에 알려진 사람과 같다....고통의 예리한 칼은 예수님께서 유다인에게 버림을 받고 도적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볼 때 그녀의 마음을 꿰뚫을 것이다.마리아는 예수님의 고통과 연결되어져 있다.... 율법은 (출23:14,17,34:23:신16:16) 팔레스티나에 사는 성년 남자에게 해마다 3번 곧 과월절,오순절,장막절에 예루살렘 성전 곧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명하고 있다.여인은 이 규정에서 예외였으나 그러나 믿음이 깊은 여인들은 적어도 과월절에만은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갔다.복음사가의 말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도 해마다 과월절을 위해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관습을 지켰던 것 같다.나사렛에서 약 110키로 거리였으며 4,5일 걸리는 여행이었다.히브리인 남자가 율법의 아들이 되는 것은 15살이어서 그 때부터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따라서 이곳에서는 예수님께서 12살이 되셨으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려 한 것은 아니다.그것은 그 분이 그 어린 나이에 예루살렘 학자의 혀를 차게 할 만큼 지혜를 가지셨다고 주목하게 하려 한 것이었다....신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3가지 창조적 지식을 분류한다.(1) 지복적 지식.이것에 의해 예수님을 하느님의 본질을 보고 그것 안에서 모든 것을 보신다.(2)직접 하느님께 받은 이성적인 형태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알려 주는 천부적 지식.(3)습득한 지식.이것에 의해 감각적 사물에서 추상된 관념을 가지고 사물을 본다. 이상 3가지이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원래 베들레헴은 에브랏으로 불려졌다(창35:19).현재 이 곳은 벧-람(Beth-Lahm)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주민은 약 8,000명 정도 되는데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다.이곳은 예루살렘 남쪽 약 6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요셉은 그녀를 나사렛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사람들은 그녀가 요셉과 결혼한 지 아홉 달도 못되는 것으로(1:56) 알고 있는데 그녀가 아이를 낳게 되면 아마 모욕과 불신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염려도 있었던 것이다.또 요셉과 마리아는 미가서 5:2절에 의하여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것을 알고서 그리로 함께 가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른다....A.D.330년 경에 콘스탄틴 대제가 이 동굴 위에 교회를 짓게 했는데 일부 전문가에 의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출생한 실제 장소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얼마 후에 유스티아누스가 이곳을 보다 아름다운 건물로 재건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동굴 위에 서있는 이 교회는 1,600년 전에 그 때 세운 모습을 대부분이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크리스마스는 354년 로마에서 제일 처음 경축되었고 그 다음 379년 콘스탄틴노플에서 다음은 388년 안디옥에서 경축되었다.그 때부터 그것은 기독교계에서 일반적인 찬성을 얻게 되었다.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실제 탄일이든 아니든 그것은 전세계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그 날의 중요성에 대하여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기념해야 할 것은 위대한 사건 그 자체이지 그 날이 아니기 때문이다....아마 이들의 양떼는 성전 예물로 쓰이기 위해 베들레헴 부근에 수직守直된 양 떼처럼 그런 목적에 쓰이도록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그럴 경우 그들은 오래되지 않아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기서도 약속된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던 경건한 사람들에게 그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다.이런 식으로 그들은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아기를 영접할 준비를 시켰을 것이다....요셉과 마리아가 성전 방문 후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어느 집에 살려고 들어간 것(마2:11)을 추정할 수 있다.이것은 특별히 시므온과 안나같은 경건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후에 그들이 그 메시아 아기는 베들레헴에서 자라야 한다고 느꼈다는 사실에서도 설명될 수 있다.동방 박사들은 거기서 그들을 방문한 것이다.그 후에 그들은 이집트로 피신했으며 상술한 이유로 헤롯이 죽은 다음 그들이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나사렛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게 된 것이다(마태 2장)....12살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말하고 있다.아마 그것은 유대 소년으로서 책임있는 구성원,이를테면"계명의 아들"로 종교집단에 가담하는 것이 허용되는 그 다음 해의 의식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이 중요한 행사는 유대 소년들이 13세가 되면 거행된다.


[누가복음 성경주석] 3장 1-2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디베료는 A.D.14년(8월 19일)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죽은 때부터 A.D.37년까지 통치한 로마 황제였다.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열 다섯 해는 그가 A.D.11년에 그의 의붓 아버지 아구스도에 의해서 그 지역 여러 도를 다스리는 공동 통치자로 임명된 때부터 계산된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그의 실제 즉위가 아닌 다른 연대에서 계산된 그의 즉위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예증되지 않고 있다.로마의 계산법에 의하면 이 열 다섯 해는 A.D.28-29년이 될 것이다.그러나 수리아에서는 군주의 통치가 셀루시드(Seleucid)시대 때부터 사용되어 온 방법에 따라 계산되었는데 이것은 통치 기원이 9-10월에 시작되었다.이 계산법으로 하면 디베료의 통치 2년은 A.D.14년 9-10월에 시작된 셈이 된다.사실 그가 황제가 된 것은 그보다 불과 한 달 전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그의 통치 15년은 A.D.27년 9-10월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분봉왕"이라는 칭호를 한급 높은 왕으로 바꾸려고 하다가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실각되었다.....몇년 전에(B.C.36년경) 루사니아라는 사람이 왕으로서 아빌레네를 다스렸고 또 다른 (이 사람의 후손으로 보이는) 루사니아가 후에 이 지역을 분봉왕으로 통치한 것을 입증하는 명각이 발견되었다....요한이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대중 앞에 나타난 것이 A.D.26년과 29년 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아마 정확한 연대는 A.D.27년이었을 것이다.

페데리꼬 바르바로

"황제 티베리오"는 리비아 트리질라와 티베리오 글라우디오 네로의 아들로 그는 기원 전 42년에 로마에서 태어났다.어머니 리비아는 아우구스토 황제비가 되고 그는 그의 양자가 되었다.기원 후 11년 곧 로마 기원 764년 내지 765년에 황제와 함께 국정에 참여하고 식민지 통치를 맡아 보았다.767년 8월 19일 아우구스토 황제가 죽은 후 791년에 죽을 때 까지 로마 제국을 다스렸다."십오년째 되던 해".티베리오 치정 15년을 확정하기란 어렵다.그 까닭은 그가 황제와 함께 국정에 참여한 때부터 계산할 것인지 아니면 황제의 죽음부터 계산할 것인지 이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전자로 가정을 한다면 재위 15년은 로마 기원 779년 혹은 780년 그리스도 기원 26년 혹은 27년에 해당된다.후자로 가정을 한다면 로마 기원 781년 혹은 782년,그리스도 기원 28년 혹은 29년에 해당된다.세속 역사가와 안티오키아의 화폐는 티베리오가 황제가 된 해를 아우구스토가 죽은 해로부터 계산하지만 루가는 히브리인의 풍습을 따라 기록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할 것 같다.히브리인은 764년 혹은 765년을 티베리오가 황제가 된 해라고 보았다.예수님은 로마 기원 748년 혹은 749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루가가 본장 23절에서 쓴 것처럼 779년 혹은 780년에는 30살이 되셨다...."갈릴레아 지방의 영주".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 그 나라는 4으로 나뉘고 유다,사마리아,이두메아를 아르켈라오가 맡고,갈릴래아,베뢰아를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가 다스렸다.헤로데 안티파스는 기원 전 4년부터 기원 후 39년 내지 40년 사이,이 지방에 군림하였다.그는 헤로데 대왕과 마르타치아의 아들인데 잔인하고 의심이 많은 쾌락주의자로서 루가의 기록에 남아 있다.로마 기원 792년경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리옹으로 추방당했다."필립보".헤로데 대왕과 크레오 파트라의 아들이며 아버지로부터 바나데아,드라고니데데,아우라니띠네,가우로니띠네 및 파네아를 이어받았다.헤르몬 산 기슭 가이사리아시 및 티베리아데 호수 북쪽인 벳사이다,율리아를 세워 37년을 다스린 후 기원 후 34년에 죽었다.헤로데의 아들가운데서 몹쓸 이름을 후세에 남기지 않은 오직 한 사람이었다."이두래아와 트라코니티스".이두래아는 팔레스티나 동북,다마스커스의 서쪽에 있는 산악 국가이다.트라코니티스는 다마스커스의 남쪽에서 포스라까지 펼쳐져 있었다. "리사니아".다마스커스 북서에 있는 안티레바논의 아빌레네 분국이었다.리사니아 분국의 존재를 부정한 어느 유리주의자가 있었으나 아빌레네에서 발견된 두 비석의 비문에서 루가의 기록이 확인되었다.


[누가복음 성경주석] 6장20절-8장 3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20.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첫째 조건은 마음을 재물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하느님의 나라의 보상은 반드시 빈궁 그 자체에다 주시는 것은 아니다...24.루가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저주는 에비온파의 영향이라고 비난하는 자가 있으나 여기서 불행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재물 자체가 아니고 그것을 악하게 쓰기 때문이며....30.그렇기는 하나 이 권고를 실행 할 경우에는 역시 현덕賢德을 잊지 말아야 한다.인내란 좋은 것이지만 악인이 더 담대하게 악을 행할 수 있는 구실을 주지 말아야 한다....39.적당한 지식과 현명없이 남을 지도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이 다스리고 있는 사람의 영적 멸망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정신적 지도자가 되어야 할 그리스도교인은 이러한 자기 교육,교양에 유의해야 한다....40.만일 누가 진리를 구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알맞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스승을 찿아야 한다.왜 그런가? 만일 스승이 그릇되다면 제자도 반드시 그릇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7장 2.가파르나움에 살고 있던 이 백인대장은 로마 주둔군의 지휘관이거나 헤로데 안티파스 휘하에 있던 장교인 것 같다.이 사람은 이방인이었다.전후를 보거나 특히 9절을 보면 알 수가 있다.유다교를 믿게 된 이방인도 아닌 것 같은데가파르나움의 유다인 회당을 도운 사실을 보면 유다인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된다....10."자기 집에 예수님을 맞아 들이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한 이 백인대장은 참으로 합당하게 자기 안에 예수님을 받아 들이고 있다"이 말은 위대한 성학자 아우구스띠노의 말이다. 11.나인은 나자렛 남동에 있고 가파르나움에서 걸어서 7-8시간 걸리는 곳으로 에스드레론 평야가 열리는 입구에 있었다.지금 아라비아 사람들이 네임이라고 부르는 동네 같다.나인이라는 동네는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성문이 하나밖에 없었을 것이다.그 성문을 나오면 평야와 묘지가 맞은 편에 있다....지금도 소아시아의 풍습으로 남아 있듯이 시체를 천으로 싸고 홑이불을 둘러 가지고 상여에 싣고 있었다....예수님의 행동은 옛 예언자들과도 다르다.엘리야(열왕기 상 17:17-24)나 엘리사(열왕기 하 4:18-36)가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렸을 때에는 그 기적에 앞서서 길게 야훼께 기도를 올렸고 많은 상징적인 징표가 된 행동을 하였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만 하셨다. 19.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으나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예수님의 참 자격에 대해서는 명백한 관념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역시 승리하시는 구세주를 꿈꾸며 그 빛나는 나라의 돌발적인 나타남을 감옥에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는데 지금은 지칠 지경에 있었다.실제로 요한이 예수님께 한 질문은 이 후자의 주장을 긍정하고 있다....28.요한이 위대한 것은 그의 사명 때문이었다.구약의 예언자 중에도 그 요한보다 뛰어난 사명을 다한 사람은 없었다.그러나 루가가 여기서 비교하는 인물은 구약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마리아나 사도들보다 뛰어 났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그렇긴 하지만 가령 요한이 아무리 위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자보다 뛰어날 수 없다.이 절에서 하느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종말 후의 천국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나라인 것이다.요한은 아직 사랑의 율법에 속하지 않은 구약의 사람이다.혹은 구약을 신약에 연결시켜 맺어 주는 다리이다.선구자로서 지닌 그의 사명은 하느님의 나라의 준비에 지나지 않았다.그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그보다 더 큰 은혜를 받고 있다.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은 청중에게는 신비에 찬 말씀이었다.그것은 그들에게 벌써 실현된 그 나라에 대해 생각할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33. 첫째 주장에 의하면 앉아 있는 아이들은 예수님을 거부한 유다인들을 뜻하고 고행생활을 하고 있던 요한에게는 더 즐거운 생활을 하라고 청하였다.또 예사로운 사람과 같이 하고 있던 예수님께는 더욱 더 고행,단식하기를 바란다.그러나 예수님도 요한도 그들의 요구를 받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쌍방을 다 거부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36.루가가 기록하는 초대연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초에 갈리레아에서 일어 났다.여인은 죄인으로 연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있었다.그것과 달리 다른 세 복음사가가 쓴 사건은 베다니아에서 열린 과월절 엿세 전의 일이다.여인은 예수님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위를 칭찬하신다.그리고 당신의 가까운 죽음을 알려 주셨다....38. "뒤에 와서".당시 소아시아의 습관으로는 식탁이 말발굽 형으로 되어 있어서 자리에 앉은 사람이 걸상 위 오른편에 발을 굽히고 앉아서 팔굽을 식탁에 얹고 식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예수님께서도 그와같이 앉으셔서 발을 오른쪽 뒤로 굽히셨다.그래서 이 행실이 나쁜 여자가 예수님 뒤에 섰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연회가 있기에 앞서서 신(샌달)을 벗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맨발이셨다.....소아시아에는 지금도 연회 자리에는자유롭게 들어 가 그 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아마 머리에 붓기에는 자신이 너무도 천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44. 어떤 연회에 초대를 받아 갈 경우,그 집에 들어가기 전에 샌달을 벗는다.주인은 손님에게 평화의 입맞춤을 하고 앉도록 권하고 나서 발을 씻게 하기 위하여 하인을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그것이 끝나면 주인 자신 혹은 하인이 손님의 머리와 수염에 향유를 부었고 식사 점에 손을 씻도록 물을 내놓았다.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이러한 예전을 갖추어 주지 않았던 것이다....8장 2.그녀의 출생지가 가파르나움과 디베리아데 사이에 있는 겐네사렛 서쪽 기슭에 있는 미그달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요안나는 요한이라는 이름의 여성형...수산나.뜻은 백합...히브리인의 경건한 여인들은 자기네의 스승 율법학자들을 경제적으로 협조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순례에 까지 따라 다닌 일은 거의 없었다.따라서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선교 여행을 따라 다녔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었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가버나움에서 약간 경사진 곳을 따라 그 능선 꼭대기가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거기서 12제자를 채택하셨으며 산상설교는 거기서 약간 내려와 평평한 곳에서 하셨다.마태는 군중들과 함께 걸어 올라가 그분에게 갔는데 그것은 분명히 산이었다.누가는 후에 그가 묘사한 장면을 보기 위해서 가이사랴에서 그리로 올라갔는데 그 산과 인접해 있는 로마 대로에서부터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는 그 '평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7장 11.이 곳은 가버나움 남쪽 엔돌에서 서쪽으로 약 2마일 떨어진 곳이었다.이곳은 작은 헤르몬(Little Hermon) 비탈을 배경으로 고지에 위치해 있었으며 오늘날까지 네인(Nein)으로 불려지는 작은 마을로 현존하고 있다.가버나움으로 가는 도로변에 있는 이 마을의 서쪽 문 앞에서 바위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루가복음 성서주해] 9장 51-62,10장,11장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루가는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선교의 새로운 기간을 쓰기 시작했다.그 중심은 예루살렘 여행인데 약 8달 동안의 일이었다(9:51-19:28).복음사가는 벌써 예수님의 수난 예언을 썼다......이 절에 쓰여 있는 예루살렘 여행 출발 외에 복음 사가는 다른 두 가지 출발,곧 13:22,17:11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예리코를 결정적으로 떠나신 (루가 18:31) 때를 기록하고 있다.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가신 여행이 3번 있었다고 하였다.그러나 그것은 언제의 일이었을까? 뷔제렐은 요한(요한 7:1-10:39,11:8-55)이 기록한 것과 같다고 말하고 레베스크는 첫째 여행은 요한(5장)과 같고 두 번째는 장막절과 성전 기념절 사이에 이루어졌고 세 번째는 이 마지막 명절 후에 이루어져 다른 두 공관 복음사가의 기록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복음사가가 세번이나 예루살렘의 여행을 되풀이하여 쓴 것은 이 기간을 수난의 상징으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52.그분은 사마리아인이 자기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하고 계셨기 때문에 먼저 앞잡이로서 음식과 숙소를 찿기 위해 제자들을 보내셨던 것이라 생각된다.예수님의 의혹에는 이유가 있었다.그들이 예수님 일행을 환영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기 때문이다.이 목적만으로도 유다인에 대한 사마리아인의 적대 행위를 하게 하는데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그들 사이에 불목한 것은 향용있는 사실인데,특히 축제 때에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순례는 보통 그곳을 지나 올라 갔다.사마리아인의 예배소는 가리짐에 있었는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자들이 자기네의 예배소를 업신 여기는 것으로 사마리아인은 생각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행을 환영하지 않았다....59.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 따르면 이 사람은 초대 교회에 명성이 있던 보조자 필립보였다고 한다.이 제자는 아버지를 묻으러 가게 해 달라고 청했다.말미야 며칠 안 되겠지만 그러나 이 제자에게는 아직도 세속의 물질적 근심에 사로잡힐 위험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었을까? 어떤 경우에는 거룩한 의무라고 생각되는 일조차 예수님을 위해 희생으로 바쳐야 할 것이다....10장 13.티베리아데 호수 북쪽에는 지금도"케라제"라고 하는 도읍의 유적이 있다....18.어느 교부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있어서 교만 때문에 루치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시고 그것으로써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실 의향이었다고 생각하였다.그러나 제자들의 기쁨은 자만심에서 온 것이 아니므로 지금 겸손을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고 여겨진다....30."내려 가다가".예루살렘은 800미터 높이에 있고 예리코는 해발 150미터의 땅이니 잘 한 표현이다. 그 사이에 있는 길은 광야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강도"를 만날 위험이 있었다....41. 교부들과 신비 신학자들은 마르타와 마리아에게서 있어서 그리스도적 생활의 두 가지 형이 있다고 생각했다.곧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활동 생활과 기도와 하느님께 마음을 온전히 기울이는 관상 생활이다.그러나 사랑을 실천하는 활동 생활도 만일 그것을 잘 해낸다면 결코 관상觀想 생활과 엇갈리는 것이 아니다. ....11장 1. 아마도 베다니아 부근에 있었던 일 같다.어느 전승은 올리브산이었다고 한다....2. 행복(진복 8단)의 수를 4으로 줄인 루가는 또 이곳에서도 그답게 말씀을 생략하였다."아버지의 나라"에는"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청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아버지의 뜻이..."운운하는 기도를 생략하고 마찬가지로"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청도"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라는 말씀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것도 생략했다.이 청을 한 사람은 사도였던 것 같다.여기에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들은 몇 사람 안 된다.이 제자의 청은 기도에 대한 열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동시에 세례자 요한에게서 기도 예문을 배운 그 제자들과 대항할 작정이었던 것 같다....."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 하시며"가 더 그 뜻을 뚜렸하게 해준다고 생각된다.여기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덕을 선언하고 우리의 성스러운 도덕생활로 그것을 힘차게 알리겠다고 하는 뜻이 있다.따라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사람이 하느님을 인정하고 찬미하도록 이끌어 가야 한다....16. 엘리야도 자기 사명의 진실성을 증거하려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 오게 하고 비에다 명령했다(열왕기 상 17:1,18:38,41;열왕기 하 1:10).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52.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간의 불화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예루살렘을 재건할 당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때 사마리아인들은 그 공사에 유다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결국 그들은 그 공사를 방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스4:3;느2:20).곧 성전과 제사장에 대한 대립이 그리심산에서 나타나게 되었고 그들의 절교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예수님 시대에 그 불화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그 반목의 궁극적인 원인은 실제로 포로 후기 시대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것은 사사들과 초기 군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사마리아인들의 메시야적 희망은 그들이'타헤브'곧"복원자"라고 불렀던 신명기 18:15절 이하의 그 "예언자"에 중심을 두었다.오늘날에는 그들 조상의 신앙을 고수하는 소수의 사마리아인들만이 팔레스타인에 생존하고 있다.....56. 발길을 돌이켜 갈론(Galud)계곡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다른 길을 택했던 것이다.....그렇게 해서 그는 문자 그대로'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통과하여 벧-산을 지나고 요단을 건너 베레아를 경유하여 여리고에 이르셨다."10장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 6개월 남짓되는 기간에는 특별히 이 지역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다.당시 트랜스 요르단 주민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많은 무관심 속에서 영적으로 아주 방치되어 있었다.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은 방치된 그 지역의 촌과 마을을 짧은 시간에 가능한 집중적으로 복음화 하기 위하여 그처럼 많은 제자들을 보냈을 것이다....4. 동방에서는 길거리에서 하는 인사가 유난히 길다....8. 제자들에게 식사 전에 의식상 부정한 음식이 있는지를 확인하느라고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가버나움 폐허에서 북동쪽으로 약 2마일 떨어진 현재의 케라제와 동일시 되고 있다....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계시록 12:9,12을 참조하라.'떨어지는".이 부정과거는 이미 결말이 난 사실을 가리킨다."여기서의 문제점은 현제 떨어지고 있는 사실이나 그 결과 즉 떨어져서 누워있는 상태가 아니라 이미 떨어졌다는 개념이다.사탄은 이미 그의 높은 권세의 자리에서 쫓겨나 던짐을 당했다.이런 이유때문에 그 70문도들은 귀신을 내쫓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그것은 주님이 사탄을 완전히 이기셨다는 증거였다.그러므로 그들도 그분의 이름으로 미래의 완전한 승리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Greydanus)...."마르다"는 아람어"마르"의 여성형으로 "주부主婦"를 의미한다."마리아"는(히브리어"마리암"또는"미리암"을 나타내는데) 확실한 어원은 알 수 없다.추측상으로는"바다의 별"海星이 어원일 가능성이 있다....11장 2.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말할때 약간 형식적인 "아비"(나의 아버지),또는"아비누"(우리 아버지)란 말을 썼으나 예수님은 아이들이(또 히브리어를 말하는 가정에서)자기들의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한 일반적으로 친근감이 있는 말"아바"를 썼다....6. 동방에서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종종 밤에 여행을 한다....52. 그들은 성경을 잘 못 해석하고 엄한 규정을 많이 첨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무력해지도록 함으로써 그렇게 했던 것이다.그들은 영적으로 타락하여 구속자가 오실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들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자신들도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타락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의 결과로서 그들은 태반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르지 못하게 하였다.


[루가복음 성서주해] 12장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두푼" 원문은 2 아스(라틴어,1/8 데나리온)...회당.유대인 재판소이다...13.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신21:17),유산을 나눌 때 맏아들은 형제의 두 몫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그것은 법률이 정하는 재판관들이 할 일이다.그분이 오신 것은 사람을 구원하시고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가리치기 위해서였다....16"밭에서".광대한 사유지를 말한다....24. 하느님께서 까마귀에게 먹이를 주시지만 그러나 까마귀들은 먹이를 얻으려고 이 곳 저 곳 날아다닌다.사람도 마찬가지이다.섭리로 보호해 주시지만 사람도 양식을 얻기 위해 성실하게 일해야 하는 것이다....35. 그들의 옷은 길었기 때문에 여행 할 때나 활동할 때에는 옷자락을 들어 허리에 띠를 매는 관습이 있었다.그러니까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일을 하기 위한 준비 혹은 일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뜻한다.36."혼인잔치에서 돌아 오는 주인".이 주인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다.히브리인은 밤 늦게 혼인 잔치를 벌이는(마태오 25:1)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주인을 영접하기 위해 등불을 준비해야 한다.주인이 집을 비우고 있을지라도 돌아오는 주인을 맞아들이기 위해 한 사람이 아니라 종들은 모두 밤을 세워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셨다가 후에 모든 이를 심판하려고다시 오시리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38. "밤중에".원문에는 제 2시경이라고 썼다.밤은 4시경으로 나뉘고 제2시경은 저녁 6시에서 9시까지,제2시경은 9시에서 12시까지,제3 시경은 12시에서 오전 3시까지,제4시경은 오전 3시부터 6시까지였다....42. 여기서 관리인이라고 한 것은 보통 노예들보다 좀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노예임에는 틀림이 없다.그러나 주로 집안 살림을 맡고 있었다.착한 관리인은 두 가지 자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곧 주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성실과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현명을 그리고 그 관리인이 제 직분에 충실하면 그것이 그 관리인에게 큰 행복이 된다. ...46. 글자 그대로 말하면 한 칼에 두 동강을 낸다는 말인데 여러 가지로 번역되었다.예로니모는 비유적인 뜻으로"거룩한 사회에서 쫓겨난다",곧 파문된다고 해석하였고 다른 이(도란도)는 채찍질을 당한다고 하였고 혹은 베어버린다고 풀이한 이(후비)도 있다.요컨데 사형에 처한다는 뜻인데 비유의 전체적 뜻으로 보면 영원한 벌을 가리키고 있다....49. 어느 해석자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가지고 어신 이"불"은 51절에서 말하듯 복음때문에 이 세상에 일어날 부조화,투쟁,박해를 의미한다고 하였다.또 예수님께서 이러한 박해를 바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의 용기와 성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간으로 하여금 갈라서서 싸우게 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께 대하여 지니고 있던 혹은 가지지 않았던 사랑 바로 그것이다.그 불이 성령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으나 하느님의 사랑 혹은 애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가치가 있다.라그랑즈는 말하고 있다."이 불은 상징적인 것이므로 사람의 마음에도 있는 것이다(루가24:32).또 그것은 영혼에 매우 유익한 것이어야 한다.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 불이 더욱 타오르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교부들은 이 불이 틀림없이 성령 혹은 사랑이라고 생각하였다.50. 그것은 수난과 십자가의 치욕이다.물은 성서에서 자주 고통의 뜻으로 사용되므로(시 18:16-17,32:6,69:14-15)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통도 세례라고 부른다....암브로시오와 토레오파그토를 따라서 어느 학자는 예수님께서 괴로와하고 계신 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피를 다 흘리려고 한 열렬한 소망때문이라고 하였고 또 다른 주장에서는 수난에 대하여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공포때문이라고 하였다....54. 그 구름이 서풍을 타고 오게 되면 지중해의 습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그러한 습기는 비가 되어 내린다.55. 바람은 남풍이지만 남동풍에도 사용된다.팔레스티나에서는 실제로 더위를 몰고 오는 것이 남동풍이다....58. 판사의 선고를 받은 채무자에게 그것을 지불하게 하거나 혹은 돈을 낼 때까지 감옥에 가두는 임무를 맡은 하급 관리이다."한 푼".렙돈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10. 그러나 그분이 승천하신 후(오순절의 기적과 그의 교회의 복음 전파에서) 성령을 통해 진리를 분명하게 계시하실 때에는 성령이 활동하시는 충만한 빛 가운데서 그의 역사를 마귀의 역사로 규정하는 것과 같은 행위로 성령을 고의적으로 모독한다면 결코 사赦하심을 받지 못할 것이다...28. 팔레스틴에서는 나무가 귀하기 때문에 보통 풀을 땔감으로 사용하고 있다....49. 불은 이중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즉 이것은 탈 수 있는 물질을 태워 없애고 비연소성의 물질은 순화하고 정련한다.주님은 여기서 그의 구원의 사역이 완성되어 그가 하시는 유익한 일이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인간의 생활속에 완전하게 파고들기를 바라는 깊은 염원을 말씀하신다.다시 말해서 악을 파하여 멸하고 심자들을 정결하게 하고 연단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정말 그분은 활동하시면서부터 바로 땅에다 이 불을 붙이기 시작하셨다.그러나 이 불은 그가 구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귀하신 후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 완전히 붙었던 것이다.그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을 가득메우고 있었던 것은 메시야가 오면 유대 민족이 당장 그들의 모든 원수를 물리치고 그 후에는 평온한 이상적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누가복음 성경주석] 13장 14장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1. "갈릴레아 사람들은".영광적인 기질을 지니고 만사에 앞서 독립을 갈망하며 그렇기 때문에 외국인 정부에 대하여 적대행동을 취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투쟁을 좋아한 갈릴레아인이 어느 축일을 이용하여 성전안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나 빌라도에게 진압되고 그 곳에서 살해되었다.역사가들은 거의 이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다.요세푸스 필라비우스(유다 고사18:9,3,18:3,1)가 잔인무도한 인간으로 묘사한 빌라도의 기질과 성전에서 폭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자주 축일을 이용한 유다인의 행동을 알아 보는데 알맞은 사건이다.이런 폭동때문에 성전에 가까운 안토나아성에는 언제나 진압부대가 대기하고 있다가 때때로 일어나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했다....4."실로암"의 성은 예루살렘 남동쪽 같은 이름을 가진 샘의 기슭에서 있었다.5. 끝까지 하느님께 저항하고 편견에 사로잡히고 소경이 된 완고한 유다인 거의가 무너져 내린 도성 밑에 생매장되었던 것이다....14. 율법학자도 급성의 병이나 큰 화가 일어났을 때 의사를 부르지 못하게 금한 것은 아니었으나 만성벼의 치료는 금하고 있었다.안식일에는<세우는 일>도 금하고 있었는데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은 부러진 뼈의 치료도<세우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21.서 말(그리스어 '사톤'1.5펙X3=4.5펙,39리터 혹은 1펙X3=3펙,25리터정도)=약100키로그램...22.루가10:38에 쓰여 있듯 그분은 초막절(장막절)을 지내려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다.요한에 따르면 12월에 있는 봉헌절 축일을 위하여 또 예루살렘에 가셨다.루가가 여기서 말한 것은 요한 10:22의 마지막 여행일 것이다....30."꼴찌지만 첫째가 되고".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쁨과 분발로 받아들이고 곧 실천에 옮긴 이방인이나 세리들이다."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한 유다인들이다....14장 1.지금 예수님께서는 유다인과 예루살렘을 떠나 페레아에 계시다.이 곳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적대행위도 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5.팔레스티나의 우물은 둘레를 높게 둘러 싸지 않고 단지 돌을 덮어두었기 때문에 우물에 빠지는 사람이 많았다....17."종을 보내어".소아시아의 관습이다.이 관습을 따라 주인은 전에 사람들을 초대하였고 당일이 되자 그 약속을 다시 환기시키고 혹은 길 안내를 위해 종을 보냈다.이것은 예의였다.이 종은 예언자 특히 유다인을 회개와 믿음으로 이끌려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셰례자 요한과 사도들을 의미한다.18.그는 밭을 샀으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가령 몰랐다 할지라도 꼭 그 날 보러 갈 필요가 없다.19.소를 샀다고 할지라도 그 날 꼭 부려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위의 두 사람은 정중하게 사양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단순한 물질적 이익 때문에 초대한 주인의 자비로운 초청을 거부한 것이다.21.결혼식은 이미 끝나지 않았는가!그렇다면 친절한 집주인에게 한 마디 인사라도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런 시간마저 없다니 당치 않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실로암 연못은 예루살렘의 남쪽 성벽과 동쪽 성벽이 합쳐지는 모퉁이 근처에 있었다.무너진 실로암 망대는 아마 실로암 연못 부근의 성벽위에 있는 고대의 방어 체제의 일부였던 것 같다.T.W.Manson의 다음과 같은 말은 옳은 말이다."본절에 묘사된 사고는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는데 이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왜냐하면 이것은 하나의 사고였지'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이것은 세상의 사학가들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못 된다" 6.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팔레스타인에서는 포도밭에 무화과나무와 그 밖의 다른 나무들을 심는 것이 통례이다.11.불구형 척추염(spondylitis deformans)이었다."그녀의 척추뼈가 단단한 덩어리와 융합되었다.32.여우,교활하지만 힘 없는 통치자"유대관용어에서'여우'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이것은 올바른 태도에 반대되는 저속한 교활을 상징한다.그리고 이 말은 실질적인 권력과 우대함을 지닌 사람과 반대되는 삼류급의 별볼일없는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서'사자'와 대조적으로 쓰이고 있다.헤롯을' 저 여우라고 부르는 것은 그는 위대한 인물도 정직한 사람도 아니며 그는 위엄도 영광도 갖지 못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제 삼 일"은 어떤 일이 마무리되어 끝나거나 완성되는 순간을 묘사하는 시적 표현이다.14장1.이 당시 유대인들은 평일에는 하루 두 번만 식사를 하였으나 안식일에는 세번 식사를 하였다."정찬(데이프논,그리스어))은 아침 예배를 끝낸 후 즉 정오를 전후하여 먹었다.안식일 식사에 손님들이 참석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평일에...주로 식사하는 시간은 오전과 오후였는데 오전일 경우 그들은 (점심이 아닌)아침 곧 로마인들의 ientaculum에 해당하는 path shacharith(히브리어)를 먹었고 오후(4시경)에는 주된 식사 곧se'udah(히브리어).cena(라틴어),데이프논을 먹었다"20.땅을 먼저 사고 나서 그 후에 그 땅이 어떠한지 보러가는 법이 없다.그리고 소를 이미 사고 난 다음에 그것을 시험하러 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매매가 끝났기 때문이다)22.길과 산울 가에서 집없이 사는 도시 밖의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게 된다.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을 무기치하게 생각하여 잔치에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강권하여" 데려와야 한다.

[루가복음 성서주해] 15장 16장 17장 18장1-14절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8."등불을 켜고".팔레스티나의 집은 거의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집안이 어둠침침했다.15.돼지는 부정을 탄 짐승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친다는 것은 유다인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수치이다.16."쥐엄나무 열매".건조되었을 때에는 좀 쓰고 약간 꿀맛이 나는 짐승먹이이지만 사람이 먹을 수도 있다.22."제일 좋은 옷"위대한 인물만이 입을 수 있는 것으로 발목까지 내려 오는 길이의 넓은 값진 옷이었다."가락지".그 가락지는 특별한 권위와 명예의 표시였다."신을 신겨주어라".자유인의 표시이다.종들은 맨발이었다....16장 1."청지기"상당히 큰 권한을 가지고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종이 아니기 때문에 부정이 드러날 때 쫓겨나기는 하지만 팔려가지는 않는다....청지기는 자기 장래를 위하여 주인의 재산을 쉽게 훔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 비난에는 이유가 있었다. 8."세속의 자녀들"이란 이 세상의 근심과 장사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고,"빛의 자녀들"이란 눈을 높이 들어 구원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다.이 세속의 자녀들은 장사에 몰두하고 수단의 선악을 따지지 않으므로 거의가 성공을 한다.그런데 빛의 자녀들은 구원이란 재산을 얻기 위해 세속의 자녀들만큼 부지런하고 현명한가? 그들에게 배워야 할 점이 있지 않은가? 빛의 자녀인 우리는 하늘의 보화를 얻기 위해 세속의 자녀들이 이 세상의 재산을 끌어 모으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듯 그런 근면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9.제자들은 부정한 재산으로 이 세상에서 친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어 줌으로써 스스로 하늘나라를 열어야 한다.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베푼 일은 당신에게 베푼 것이라고 똑같이 생각하셨다.그리하여 예수님 자신 가난한 사람이 되시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문을 열어 주신다."세속의 재물".여기서는 부정한 수단으로 벌어 들인 재산이라는 뜻이 아니다.사람이 재산에 집착하기 쉽고 또 악한 목적을 위해 쓸 수 있으므로 그것을 세속의 재물이라고 한 것이다. 11. 작은 일이란 세속의 재물이며 큰 일이란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 영적 선이다.재산을 충실하게 쓴 사람,곧 사랑을 실천하고 그리고 재산에 집착하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더 큰 선을 맡기기에 합당한 사람이다.정신의 재산을 맡은 사람이야말로 더 높은 범위에서 저마다 충실할 수가 있을 것이다.12."남의 것".이것은 재산이다.남의 것이라고 한 것은 재산이란 가지고 죽을 수도 없는 언젠가는 내 손을 떠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너희의 몫".곧 정신적인 선이다.이 선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성장에는 사람이 협력하고 내적인 것으로서 죽은 후에도 자신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늘나라에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17장 11.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다고 쓴 것은 이 번이 3번째이다....사마리아인의 냉대를 피하시려고 예리코 쪽,요단강 쪽의 골짜기를 지나 가신다.18."이방인".사마리아에는 앗시리아에서 온 이방인이 많았기 때문이다.21.교부들은 거의가 이것을 내적 은총의 뜻으로 보았다....착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22.제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재림의 하루이다.이 하루를 본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모든 박해와 고통을 참아내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 희망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18장 5."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본문의 그리이스말은 눈 밑을 친다는 뜻이다.그러니까 이 말은 비유적인 뜻으로 늘 같은 청을 되풀이하면서 머리를 숙인다는 뜻이라 하겠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이 세상 물질을 불의의 재물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세상 물질을 축척하고 사용하는데에는 불의가 개입되는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그러나 주님이 물질적인 소유 그 자체가 죄가 된다거나 부정하다고 가르치신 곳은 아무데도 없다.이런 물질을 저주스럽게 하는 것은 세상 재물과 관련된 인간의 죄스러운 태도와 행위이다...100"밧"(바토스)으로서 868갤론과 같다.100"고르"(코로스)로서 1,083부셀과 같다...작은 뿔은 어떤 히브리 문자를 다른 것과 구별하는 한 작은 획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그러나 Strack-Billerberk,Cadbury와 같은 사람들은 그것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율법의 어떤 문자 위에 그어놓은 장식용 획을 가리킨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나사로.하나님이 도우셨다....장식된 높은 대문으로 그 부자의 집이 호와스러움을 가리킨다....뽕나무의 뿌리는 특별히 강한 것으로 생각되었다."그 나무는 지상에 600년 동안 서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동쪽으로 돌아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통과하여 벧산을 지나 (여리고에서 다시 요단 강을 건너) 요단 강 동편 지역(트랜스 요르단)을 지나면서 계속 예루살렘을 향하였다.....하스몬가의 유대인 통치자 John Hyrcanus에 의해서 그리심 산 성전이 파괴된 후에도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예배 형식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요 4:20이하 참조).최근까지만 해도 자기들의 입장과 관습을 충실하게 고수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옛 세겜인) 팔레스타인의 나불루스에 100 여 명이 있었다...."모든 사람이 하는 대중 금식은 속죄일과 아빕월 9일(성전 파괴일) 그리고(가뭄,흉년,역병,전쟁과 같은 재앙이 있어서)국가적으로 필요한 일반적인 경우에 했다"...세리는 아마 바깥뜰에 서 있었고 그 바리새인은 안뜰에 자리를 잡았던 것 같다.

[누가복음 성서주해] 19:1-28,21:7-28,22:24-30,23:39-43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1."자캐오".히브리말 '자카이'는 바르다 혹은 깨끗하다는 뜻이다.4.그것은 교외에서 있었던 것이 아니다.그 거리에는 많은 가로수가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왜 그 지방 어느 집에나 있는 평평한 지붕에 올라 가지 않았던가 미심쩍어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세리였기 때문에 남의 집에 넣어 줄지 알 수가 없었고 그것보다 나무 위로 오르는 편이 손쉬우리라 생각했을 것이다.10.그는 사도 베드로의 제자가 되어 가이사리아의 주교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전한 어느 전승은 유다를 대신하여 그 자리를 차지했던 사도 마티아라고도 한다.12.이것은 유다 근세사에서 취한 비유이다.어느 귀족은 왕권 임명을 받으려고 먼저 먼 나라로 여행을 하고 그 후에 귀국하여 왕의 자리에 앉았는데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유다 고사 14:14,4:5).아르켈라오는 왕위를 얻으려고 로마에 갔으나 겨우 분국왕으로 임명되었다.이때에도 어느 유다인이 그와 행동을 함께 했는데 그것은 그 왕권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유다고사17:9,3:4;유다전기2:2,1:3). 14.가까운 신하들이 그의 즉위를 원치 앉았다는 이 사건은 역사적 사실이었다.어느 유다인 당파는 아르켈라오가 왕위를 얻지 못하도록 하려고 아우구스토 황제에게 사신을 보냈다.이 아르켈라오의 경우 반대한 자들은 일부의 당파 뿐이었으나 이 비유에서는 왕에게 반대하는 것이 백성 전부이다.27.그러나 왕좌에 오르기 전에 반대하는 자들은 더 엄한 벌을 받는다.그들은 사형 선고를 받고 소아시아 조정의 관습대로 곧 살해된다. 이 비유는 두 가지 교훈을 가지고 있다.하나는 사람이 받게 될 상에 대하여 다른 하나는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대한 것이다....21장 8.펠릭스 총독 시대에도 에집트에서 온 한 열광가가 자기의 음성이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린다고 자랑하여 약 3만 명의 백성을 모았다(유다전기II 13:5).이와같은 소동의 원인은 그 당시 한 유다인이 일어나서 세계 패권을 잡을 것이라고 한 아마도 성서속에 있는 어느 애매한 예언때문이었다고 하였다(유다전기IV 5:4).10.기원 30년에서 70년에 걸쳐 로마는 바르뜨인과 싸웠다(타치투스,안나레스 12-13,13:6-8).가르바,뵛데리오,베스파지아누스 황제 때 일어난 혁명의 연속(타치투스I, II,1).유다 국내의 내란(유다전기 II 12:1...유다고사 ,XVIII 9:1)등. 11."지진".아오데체아,그레타,스미르나 등지에 지진이 있었다.사도행전(11:28)과 요세푸스(유다고사 XX 5:2)도 글라우디오 황제 시대에 로마에 일어났던 기근에 대해 말하고 있다...하늘의 징표...아마도 마카베오 하(5:3)와 유다 전기(VI 5:3)에 쓰여있는 그러한 사건들일 것이다. 12.회당이란 유다인의 박해이다.그들은 매질을 하는 형을 처할 수 있었다(1고린토 11:24).마르코는 회당 외에 유다인의 최고재판소를 기록하였으나 이방인을 위해 쓴 루가는 그것을 감옥이라고 바꾸어 놓았다.또 신자들은 이방인 재판소에도 끌려 갈 것이다.사도행전은 스테파노와 바울로의 행적을 말할 때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유다인의 박해와 이방인의 박해가 얼마나 완전하게 이루어졌는가를 알려 준다.15.제자들이 받는 이 특별한 보호는 초대 교회와 순교자들에게 명백히 나타났고 사심이 없는 침착한 답변 앞에서 재판관은 어쩔바를 몰랐던 것이다.이후 이 보호는 오늘까지 이어져 온다. 18.하느님은 죽기까지 그들을 보호하시고 죽은 후에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혹은 이 곳이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면"너희 들은 생명을 잃을지라도 실은 머리카락 하나도 잃은 것이 아니며 부활의 그 날에 모두 돌려받을 것이다"(라그랑즈)라는 뜻이 된다.20.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을 위해 복음을 쓰는 루가는 마르코(13:14)의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라고 한 상징적인 말 대신"적군에게 포위된 것"이라고 썼다.예루살렘이 포위될 때 이미 멸망이 가까이 온 징조이다.25.예수님의 이 말씀은 중대한 것을 알릴 때 예언자가 쓴 멀투와 비슷한데 라그랑즈도"예수님의 이 말투는 이사야 혹은 예레미야,에제키엘,다니엘보다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선입관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28.여기부터 32절까지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어느 해석자(샨즈,구나벤바우엘,필리옹,프루멜 등)는 예수님의 내림을 보여 주는 징조라고 하였다. 22장 25.화폐나 비석에 새긴 글에서 임금님,은인이라는 명칭을 받으려 한다.트라이아노 황제는 어느 비석에다 구주救主 및 은인이라고 새기게 했다. 30."이스라엘 12 지파".사도들이 다스릴 나라의 시민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심판".참 심판은 외아들만이 하실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을 권위를 가지고 다스린다는 뜻이다. 23장 43."낙원".구약성서에는 2번 나온다.뜻은 나무가 우거진 동산이다(아가4:13;전도서2:5-6).해복한 온갖 즐거움을 누릴수 이는 공원인 것이다.신약성서에는 이 곳외에 고린토 후서(12:4)와 묵시록(2:7) 2곳에 나온다.교부들은 이 말을 하늘 나라(아우구스띠노)의 뜻으로 혹은 에덴 동산(데오필라투스,에우디 미우스,예루살렘의 치릴로,요한 크리서스또모)의 뜻으로 알아 들었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므나는 히브리어 마네,아람어 메네,라틴어 미나와 같은 것으로 그 가친느 5파운드 곧 16달러 정도였다.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종들이 상당히 많은 돈을 받는데 여기서는 모두 충성에 대한 하나의 텍스트로서 적은 액수의 돈을 받고 있다....펠라,현대 지명은 커빗-알-파길 11.A.D.61년에 브루기아에 막대한 큰 피해를 입힌 큰 지진이 있었다....63년에는 폼페이 절반을 매몰시킨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 있었으며.....하늘의 무서운 불가사의한 현상(서로 싸우는 군대의 별)과(성전문이 열리고 성전에서 천적 존재들이 떠나는 소리가 들리는) 큰 징조가 있었다...무엇보다도 이상했던 것은 (요세푸스가 해성이라고 부른) 별 하나가 상당한 기간동안 예루살렘 상공에 밤마다 나타났는데 그 모양이 검劍과 같았다고 한다....66년 10월에 케스티우스 갈루스의 군대는 예루살렘에서 격퇴를 당하여 후퇴하다가 벧-호른 부근으로 도주하였다.여기에는 주님이 주신 신호가 있었고..기독교인들은 요단강 저편의 펠라로 도망하였다....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A.D.70년 이전의 예루살렘 인구는 보통 600,000명이었다고 말하고 있다.그리고 만일 우리가 예루살렘이 포위되기 전에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수만 명씩 떼를 지어 예루살렘으로 몰려 들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5개월 동안의 포위 기간에 줄곧 그 곳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인구가 과잉된 그 도시에서 수십 만명이 죽었을 것이라는 것은 이해가 될 수 있는 문제이다....노호하는 바다와 파도에 대한 이미지는 민족들의 불온한 생활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서 종종 성경에 사용되었다.